-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당신의 양심과 분노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석기 ‘결사대’가 “내란” 음모를 꾸몄다는 스캔들이 터진 뒤,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것은 국정원의 뻔한 노림수도, 소위 RO 모임이 나눴다는 토론 내용도 아니었다. 진정 충격적이었던 것은 통진당, 혹은 주사파에게 미친 듯 돌팔매질을 하는 우파들과 조중동 무리의 사이사이로 오랜 세월 동안 “진보”를 말하던, 친근하고 익숙하던 이들의 얼굴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한겨레> · <경향>의 사설, 심상정 의원의 기자회견, 정의당의 공식 논평, 노동당 게시판에 올라온 일부 당원들의 게시물, 진중권·이택광과 허지웅· 한윤형 같은 논객의 글들……. 이 수많은 곳에서, 나는 지난 2주일동안 끊임없이 주사파는 가짜 진보이고, 국정원의 꼼수가 대중에게 먹히게 발목이나 잡아 온 존재들이며, “용납될 수 없는 헌정 질서 바깥의” 존재이자 “정신병자”라는 얘기를 읽어야만 했다.
“내란” 스캔들도 따지고 보면 “사상의 자유” 문제
언제부터 “사상의 자유”라는 가치가 진보를 자임하는 이들과 이토록 멀어지게 되었는지 나는 도통 알 수가 없다. 볼테르의 “나는 당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당신의 사상으로 인해 탄압받는다면 함께 싸우겠다.”는 오랜 명언조차 이번 “녹취록” 한 방에 진보좌파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버리게 된 것이라면, 국정원의 “대남심리전”(이라고 쓰고 여론 조작이라고 읽는다) 효과를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듯하다.
물론 어떤 이는 ‘민주적 질서’를 해치려는 생각을 하는 일이 어떻게 “사상의 자유”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느냐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1976년까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당 강령에 공공연히 포함시켰던 프랑스 공산당이 1950년대 후반 제1,2 야당 못지않은 의석 규모를 가졌던 역사적 사례를 떠올려보면, 결국 ‘민주적 질서를 해치는’ 사상이라는 규정의 경계는 법으로 정해져 있다기보다 그 사회의 민주적 역량과 자신감에 달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드골에 의해 “프랑스의 볼테르”로 칭해진 사르트르 역시 소련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쓴 바 있지만, 그가 “반체제 사상의 자유”를 단속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
게다가 사상은 머릿속에 있는 것이기에, 행동으로 표현되기 전에는 누구도 그 사상의 존재 여부와 영향력을 확인할 수 없다. 또, 비록 말과 글은 행동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역시 그 자체만으로는 힘을 갖지 못한다. 이런 차이를 구분하지 않은 채 사상에 대한 처벌의 권리를 누군가에게 용인한다면, 이는 권력의 돌이킬 수 없는 비민주적 타락을 야기할 것이다. 또, 사상에 대한 처벌이란 사상과 그를 지지하는 사람에 대한 이해를 위한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고, 토론을 통해 누군가의 양심을 설득하려는 시도 또한 포기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극히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만 한다.
그런 점에 비추어 봐도 우리는 먼저 정확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조작·왜곡 분야에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국정원은 국면전환에 대한 필사적 이해관계를 가진 상태에서, 문제의 “녹취록”을 우리에게 흘렸다. 그 내용을 우리가 일부 진실로 믿는다고 해도, 실제 어떤 사람들이 행동으로 “‘내란’을 일으키려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준비한 것”과 전시 상황에서 북한을 지지해 행동하는 문제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과 각오(?)를 말로 표현한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가 아닌가.
“녹취록”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에 있는 것
만에 하나, 지금 실제로 이석기 결사대가 유류와 통신시설을 파괴하고 군 의무 복무 중인 평범한 젊은이들을 사살이라도 하고 난 후라면, 그래서 이토록 유행병처럼 “주사파”에 대한 진보좌파 안의 비난과 냉소가 퍼지고 있는 것이라면, 여기서 “사상의 자유”를 언급하는 일 자체가 무망한 일일 수 있겠다. 그러나 기자가 ‘국정원 관계자’인지 ‘국정원 관계자’가 기자인지 도저히 구분조차 안 가는 언론들조차 “녹취록” 외에는 “내란음모죄”에 대한 증거가 확보되지 않았다는 보도를 내고, 법조계에서도 “녹취록”만 가지고는 “내란음모죄”가 성립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 마당에, 진보좌파들이 앞장서서 주사파의 “내란”모의의 ‘위험성’이나 실재 가능성을 과장해야할 이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사실, 많은 평범한 사람들도 “녹취록”에 담긴 내용이 현실적 위협이 된다고 보는 것은 아닌 듯하다. 온갖 인터넷 패러디물과 드립이 난무하는가하면, 밀리터리 커뮤니티를 중심으로는 “얼토당토 않은 장난감 총 개조 언급 때문에 우리만 서바이벌 총 구입이 어렵게 됐다.”는 성토까지 나온다. “빨갱이” 같은 표현을 고집하는 우익 할아버지들이나 일베 · 국정원의 사주를 받은 탈북자 댓글단 같은 이들만이 “녹취록”에 진지하게 거품을 물고 ‘체제 전복 위험’을 운운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 대중이 가진 반감의 핵심은 “내란 음모”에서 비롯한 것이라기보다, 남북 전쟁에서 북한 편에 서서 총을 잡겠다는 사상 그 자체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전쟁 불안을 심화시키는 북한 핵을 지지하고, 북한 같은 독재 국가를 이상으로 삼는 주의주장에 대한 반감이 “녹취록”에 기록된 자극적 언설에서 폭발적으로 극대화한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내란 행위 그 자체도 아닌, 그저 ‘친북적’ 정치 입장에 대한 대중의 반감과 처벌 논리를 진보좌파가 ‘지지’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반전평화의 신념을 가진 진보좌파가 “녹취록”의 핵심 내용과 같은 선택을 지지할리 없다는 점에서, 대중과 진보좌파는 비슷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진보좌파는 레드 콤플렉스가 뒤섞인 주사파에 대한 반감을 따라가야 하나
그러나 “녹취록”에 대한 대중의 반감에는 분명 여러 모순된 정치의식들이 교차하고 있다. 대중의 북한 독재에 대한 거부감이나 북핵 반대 정서는 당연히 올바른 것이지만, 남한의 현재 사회 구조에 대한 동의와 한국 사회 혹은 민주 사회에 대한 애정을 동일시하는 급진적 상상력의 부재는 진보좌파들과 동일시될 수 없는 것이다. 남과 북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전쟁의 진정한 원인을 찾고 자국 정부 전쟁 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거나 징집 거부를 선택할 수도 있는 진보좌파와, 자신과 전쟁을 수행 중인 지배세력을 동일시하며 애국주의 열풍에 동참할 수도 있는 다수 대중 사이에는 분명 정치적 전제에서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진보좌파라면 누구나 이런 대중과의 견해 차이를 좁히고 싶어 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지금 일부 진보좌파는 자신과 대중 사이의 이런 차이를 애써 무시하고는 그저 대중과 함께 돌을 던지는 일에 골몰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마치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자식이 선거에서 새누리당을 찍은 부모가 “노무현 그 놈 나쁜 놈이지”하고 욕할 때 이유불문하고 같이 맞장구를 치는 모습과 흡사하다. 이런 대화가 부모자식의 정치적 견해 차이를 좁힐 수 있을 리 없듯, 대중과 함께 주체주의를 비난하는 것 역시 급진적 정치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회 운동이 진지하게 주체사상과 결별한 좌파 사상을 받아들이길 원한다면, 주체사상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태도 역시 진지해야만 한다. 우리가 마르크스가 왜 시대를 풍미했는지 분석하고, 니체와 푸코가 왜 유행했는지를 알고자 하는 합리적 지성을 가지고 있다면, 주체사상에 대해서도 그런 접근을 시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하의 종교 비판을 비판하면서 지적했듯이, 어떤 믿음의 허구성을 그저 지적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대중을 사로잡는 그것의 물적 토대가 무엇인지를 보지 못한다면 말이다.
분명, 돌팔매질에 동참한 좌파들 중 누군가는 주체주의자가 아니면서도 그들의 시선에서 출발해 왜 그들이 북한을 ‘해방된 사회’로 보게 되었는지, 왜 북핵이 동북아 평화에 역설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믿는지, 심지어 남북이 전쟁을 했을 때 왜 북한 정부가 승리하는 것이 남한 민중들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낼 ‘내공’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또 그이들 중에 누군가는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참지 못해 사회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이 어쩌다가 그렇게 많이들 주체사상에 경도됐는지,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주체사상을 받아들인 대가로 지난 20년간 서슬 퍼런 국가보안법 아래서 어떤 고생을 감내해야 했는지, 어쩌다 2013년 그 더운 여름날 종교시설에 은밀히 모여 남북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변을 당할 것이라며 “예비검속”을 걱정하고 심지어 그 중 일부는 “21세기 빨치산”으로 살겠다는 결의까지 모으게 되었는지, 그 속사정을 뻔히 아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심상정 의원만큼은, 한 때 같은 당에 있었을 뿐 아니라, 80년대부터 지금까지 숱한 민주화 시위와 노동자 파업‧사회진보를 위한 거리의 싸움에서 주사파들과 함께 어깨 걸고 전경 방패와 최루탄을 이겨내던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87년 6월 항쟁 이래 한국 사회 운동의 진전에서 주체주의자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과 기여를 했었는지에 대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실천의 장에서는 그들이 우리의 “동지”라는 사실에 대해 말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녀는 설령 그녀 자신이 사회 변혁의 꿈을 ‘정치인이 아닌 운동가의 페르소나’ 쯤으로 치부하게 되었다손 치더라도, 자신의 옛 동지들에게 낡은 꿈을 버리지 않았으니 국정원으로부터 수사를 받으러 가라는 식의 말을 결코 해서는 안 됐다.
심상정 의원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지금 만일 주체주의에 대한 비판에 동참하고 싶다면, 대중들에게 위의 모든 이야기들을 전하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대중 앞에 정직하고, 역사 앞에서 공정한 태도다.
그 어느 때보다 ‘진영논리’가 절실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정치’를 단지 사상이 말과 글을 통해 대결을 펼치는 장 정도로 추상적으로 이해했을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십 수년간 함께 주사파와 운동하며 쌓여온 불신과 상처 때문에 더 이상 참기 어렵게 됐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국정원 댓글 사건에서 공세를 취하던 와중에 갑작스레 국정원의 수를 뻔히 알고도 당하는 상황이 되자 좌절감이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관우를 잃은 유비가 이성을 잃고 오나라로 진격한 것이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결국 이성적 대응을 촉구했던 제갈량이 옳았던 것처럼, 지금 진보좌파진영에게 필요한 선택지는 ‘국민 앞에 주사파 무릎 꿇리기’가 아닌 냉정한 현실 인식이다.
국가보안법이나 형법의 관련 조항은 대중의 평균 정서와 거리가 있는 급진 사상이라면 무엇이든 악마화하고 처벌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통진당이 “녹취록” 유출에 대해 오락가락한 대응을 하거나 침묵을 지키려 했던 것도 걸면 막거리는 국가보안법의 칼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법에 기초한 국정원의 정치 수사를 지지한다면, 이는 그 법들의 정당성을 승인하는 것이고, 공익의 이름으로 사상과 신념을 탄압하는 국가 폭력에 대한 진보 대중의 불감증을 조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낡은’ 사상이라는 이유로 누군가를 탄압할 수 있게 된다면, 이는 곧 주체사상을 지지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운동 내 다른 모든 세력도 탄압받기 쉬워지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국정원의 “마녀사냥”에 적극 반대하지 않는 것은 결국 우리 안에서 운동의 요구와 정당성을 실정법의 잣대로만 재려는 인식도 강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멀게는 프랑스 대혁명이 절대왕정의 법을 따랐을 리 없고, 가깝게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독재 정권의 법에 갇혀있었을 리 없다. 당장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의 헌법이라고 해도, 독일처럼 집총 거부를 기본권으로 보장하는 나라가 있는가하면, 한국처럼 아닌 경우도 있는 등 어느 하나의 법 모델이나 내용을 민주 질서를 보장하는 만고의 진리로 간주할 수도 없다. 법이란 한 편으로 안정성을 가져야 하지만, 동시에 무엇보다 변화하는 민의와 필요를 적절히 반영해야 한다. 그렇기에 진보 운동의 역사 발전에 기여하는 방식은 때로 부당하다고 여기는 법을 과감히 뛰어넘으려 하고, 그 노력의 정당성을 대중에게 인정받고자 전력투구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왔다.
반면, 이를 억누르려는 지배 세력은 시대와 국가를 불문하고, 항상 법이나 ‘상식’의 이름으로 진보의 야성을 거세하려 해왔다. 지배세력이 일부 받아들일 수 있는 온건한 요구를 하는 쪽은 끌어안아 체재 내화 시키고, 급진적 부문은 “불법”이나 “불순”의 딱지를 붙여 탄압하고 배척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 조선에서 항일 무장 투쟁과 정치 시위는 잔혹하게 탄압하면서도 물산장려운동·교육 운동 등은 일부 허용하는 방식으로 3.1 운동의 여파를 정리하려 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대체로 이런 지배세력의 분열전략에 말려 온건-급진으로 나뉜 채 단결하지 못한 사회 운동은 점차 약화되기 마련이며, 결국 지배 세력의 이해관계와 관용에 의지해서만 변화에 이를 수 있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주체주의는 명목일 뿐
이런 분열전략이 대중의 평균 의식 수준에 부합해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만 있다면, 지배층에게 사실 탄압의 명분은 무엇이든 전혀 중요하지 않다. 6‧25 전쟁의 상흔을 직접 겪은 세대가 여전히 존재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이제껏 “빨갱이”,“간첩”,“종북”,주사파 등이 잘 먹히는 소재였을 뿐이다. 국정원은 이미 수 차례“ 북한과 정치적으로 무관한 단체들을 탄압해왔다. 1990년대에는 ‘국제사회주의자’ 사건이 있었고, 2008년 촛불 직후에는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 탄압받았으며, 최근에는 ‘해방연대’가 타겟이 됐다. 한 때 우익들은 민주노동당이 2000년대 중반 상당한 성과를 거두자 당 강령에 기록된 “사회적 경제체제”라는 단어가 ‘사회주의’ 냄새가 난다며 정당해산신청을 내기도 했었다.
경제 위기 속에서 대중의 불만을 누르고 부자를 위한 경제 살리기에 매진해야할 박근혜 정부는 앞으로 설령 주체주의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무엇이든 새로운 트집거리를 찾을 것이 분명하다. 소련이 망한 뒤, 미국 지배세력이 “테러와의 전쟁”을 계기로 “비애국”이라는 새 꼬리표를 발명해냈듯이 말이다. 그 때마다 정말 대중은 “에이, 주체주의가 아니니까 저건 괜찮아” 라고 말할까.
좌파가 주체주의자들을 비판하고 꼬리를 자르는 것으로 대중의 ‘오해’를 피해나갈 수 있으리라는 환상도 버려야 한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96년 연대 사태에 대해 알고 있었던 나는 새내기 시절 내내 NL과 PD를 가리지 않고 모든 운동권을 피해 다녔다. 비슷한 과제들을 놓고 의회를 넘어 거리에서 운동을 건설하는 “운동권”들이 과연 밖에서 지켜보는 다수 대중에게 얼마나 각기 크게 다른 세력으로 비춰질 수 있을까. 하물며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곧 진보정당을 포함한 진보개혁 세력 전체의 실패로 여기는 이들도 상당히 많은데 말이다.
더구나 이런 “꼬리” 자르기에 대한 기대는 그 자체로 사회 운동을 분열시키고 약화시킨다. 국가 권력과 대중에게 미움 받지 않기 위해 너도나도 자신이 위험하지 않은 존재라고 몸을 숙이고, 대신 서로에게 침을 뱉는다면 어떻게 될까. 1940~50년대 미국에서는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메카시즘 광풍 속에서 숱한 ‘반미국행위’를 심판하기 위한 청문회가 열렸고, 청문회에 증인으로 소환당한 수많은 진보 인사와 노동 운동가들은 자신이 “빨갱이”가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누군가는 다른 진짜 “빨갱이”를 고발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노동운동 이력이 얼마나 ‘합법적’이며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았는지를 증언했다. 심지어 미국 공산당원들은 2차 대전 기간 동안의 파업을 막는 것이 ‘국익’이라며 노조 안에 있는 파업 지도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을 공권력에 고발하기도 했다. 결국 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 노동운동의 전투성은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또 무엇보다 소련과 미국의 동맹이 냉전으로 전환되면서, 미국 공산당은 자신을 방어해줄 어떤 좌파적 동료들도 곁에 두지 못한 채 메카시즘 광풍 앞에 스스로를 노출시켜야 했다.
대중 앞에 “진실”을 말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국정원 직원들은 대선 기간 동안 댓글 다느라 야근한 이후 가장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불법 수사 논란을 받아치려면 ‘내부고발자’가 돈으로 매수한 프락치가 아니라는 점도 입증해야 하고, ‘내란 실행계획서’ 비슷한 같은 것을 찾으려면 압수한 문서들과 수첩들을 다 읽어봐야 할 것이며, 파워포인트로 RO 조직도도 그럴 듯하게 그려내야 하고, 환전하면 33만원 밖에 안 되는 루블화도 그럴듯한 ‘해외 공작금’으로 거듭나게 해야할 뿐만 아니라, 이석기 의원의 금강산에 관광도 대북접선 투어로 둔갑시켜야 할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진보좌파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우리도 국정원만큼 분주하게 움직여야 한다. NLL 대화록으로 뻥을 치고, 대남심리전은 하지만 조직적으로 댓글 단 적은 없다고 우기고, 댓글 수사 과정 은폐 동영상은 모른다고 발을 빼는 국정원이 내놓을 ‘수사결과’를 수수방관하며 기다릴 것인가. ‘적기가’를 불렀는지 아닌지, ‘이민위천’의 저작권이 김일성에게 있는지 사마천에게 있는지, 이석기 의원의 말투가 얼마나 북한스러웠는지, 이런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사람들 앞에서 주사파가 얼마나 시대착오적이고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상인지를 그저 비판만 하고 있을 것인가.
초원 복집 사건에서도 녹취록이 있었지만 김기춘은 청와대 비서관으로 화려하게 복귀했고, BBK 사건에서는 동영상이 있었지만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었으며, 삼성 X-파일 사건에서도 녹취록이 있었지만 이건희는 솜방망이 처벌 후에 삼성 회장님으로 복귀했다. 수사 은폐 동영상의 존재 앞에서도 김용판은 시종일관 당당했다. 이 사건들과 이석기 ‘결사대’ 중에 무엇이 더 명실상부 “내란”스럽다고 봐야할까. 그런 저들이 “내란”을 운운하고 “국민 앞에 진실”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을까. 그들의 간사한 혀놀림 앞에서, 너희도 통진당도 모두 똑같이 싫어요 하고 ‘공평무사’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것이야 말로 “현실성 없는” 순진함이라고 밖에 볼 도리가 없지 않을까.
모름기지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은 지혜를 가져야 한다. 무수한 ‘진실’이 이야기될 때, 우리는 그 진실 뒤에 놓인 배경과 진실이 낳을 결과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저들이 주사파를 추락시키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가진 것이라고는 여론의 힘밖에 없는 우리가, 여론의 분노와 관심이 계속해서 “댓글”이 아닌 “내란” 스캔들에 대한 진실로 향하도록 놓아둔다면, 결국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누군가의 편에 서기를 요구받고 있다. 정의와 불의를 가로질러 달리는 이 현실이라는 기차 위에, 정치라는 치열한 전장 위에, 중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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