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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3일 일요일

“의료-교육은 쿠바가 선진국”

“의료-교육은 쿠바가 선진국”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10>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기사입력 2005-04-27 오전 9:37:44

미국의 사설 병원들이 내미는 청구서는 살인적이다. 사립학교들도 등록금이 비싸기로 악명이 높다. 의료보험에 들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많은 저소득층 사람들이나 자유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의료보험 없이 살아간다. 그 비율은 전체 국민의 16%에 이른다. 미국인 6명 가운데 1명은 의료보험과는 거리가 멀다. 여기에 숱한 불법 체류자들을 합치면 무보험자 비율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미국과는 대조적으로, 1천1백만 쿠바 사람들은 의료혜택만큼은 확실히 받는다. 아프다 싶으면 병원엘 입원하고, 진료나 수술이 거저다. 그래서일까, 쿠바 사람들의 평균수명(남자 74.77세, 여자 79. 44세)과 유아사망률(1천명 당 6.45명)은 선진국 수준이다.
  
  “학교-병원은 부자들 전유물 아니다”
  
  교육과 의료분야 하나만 떼놓고 본다면, 쿠바는 결코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이 아니다. 유럽의 선진 복지국가들이 부럽지 않다. 이는 1959년 카스트로 혁명의 성공사례로 선전되는 부분이다. 카스트로는 혁명 바로 뒤 "학교와 병원은 부자들만 가는 것이 아니다. 쿠바인민 모두를 무지와 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며 교육-의료부문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것을 쿠바인들은 ‘교육-의료 복지혁명’이라 일컫는다. 아바나 대학에서 만났던 탈리아 풍 리베론 교수(마르크스철학 전공)는 의료-교육부문에서 카스트로 혁명의 성과를 이렇게 요약해 주었다.
  
쿠바의 문맹율은 0%에 가깝다.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쿠바 여학생들. ⓒ김재명

  “국민총생산(GDP) 잣대로 보면, 쿠바는 가난한 나라다. 그러나 의료와 교육의 질과 보급률에 관한 한 쿠바는 선진국이다. 인민 대중의 입장에선 크게 만족할 만한 혁명 성과다”
  
  쿠바 병원은 3단계로 나뉜다. 1차 진료는 우리로 치면 보건소 같은 곳이고, 그곳에서 정밀진단이 필요하다고 의사가 판단한다면 2차 진료소(일반병원), 그리고 보다 정밀한 수술이 요구되는 경우는 3차 진료소(대형 종합병원)로 옮겨간다. 쿠바 어딜 가든 골목길이나 거리 한 귀퉁이엔 1차 진료기관인 보건소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을 찾는 쿠바 사람은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그곳을 거쳐 일반병원이나 대형 종합병원으로 가더라도 입원비나 수술비 부담이 없다. 병원 수속비를 마련 못해 병원 문턱에서 죽었다는 얘기는 카스트로 혁명 이전에나 들리던 전설이 돼버렸다.
  
  “관광도 즐기고 병도 싸게 고치고”
  
  카스트로 정권은 옛소련이 쿠바에게 건네는 원조액과 예산의 상당 부분을 의학 연구에 투입했다. 그 결과 쿠바는 남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지에서 번지는 전염병인 뇌막염 예방 백신을 비롯한 각종 의약품과 생명공학 기술 특허를 갖게 됐다. 쿠바는 그렇게 해서 개발해낸 의약품들을 해외로 수출해 벌어들인다. 2002년만 해도 2억5천만 달러 어치를 수출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쿠바 약은 믿을 수 없다”며 악선전을 해댔지만, 유럽 시장에서 쿠바 의약품은 좋은 평가를 받는다. 특히 쿠바산 B형 간염백신은 미국산보다도 우수하다고 알려진다. 인도와 중국, 러시아는 쿠바 기술자들과 손을 잡고 백신공장들을 자국 안에 세웠다. 카스트로 정권은 서구 의약품시장을 파고들기 위해 캐나다, 독일, 스페인 회사들과 합작을 추진해왔다.
  
  쿠바의 의료산업은 외화벌이 기관이기도 하다. 석유자원이 풍부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은 반미라는 잣대로 보면 쿠바 카스트로 정권과 입장을 같이한다. 현재 베네수엘라에는 쿠바 의사 1만 명이 머물고 있다. 차베스 정권은 쿠바에게 석유를 대주고, 카스트로는 그 반대급부로 의사를 대주고 있는 모습이다. 쿠바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 가운데는 관광이 주목적이 아니라, 병원에 입원할 요량으로 오는 사람들이 많다. 이를 쿠바에서는 ‘의료 관광객(medical tourist)'이라 일컫는다.
  
쿠바의 초등학교 교실. 체 게바라의 사진이 눈길을 끈다. ⓒ김재명

  해마다 5천명쯤으로 추산되는 외국인 의료관광객들이 쿠바에 한두 달 가량 머물면서 관광도 즐기고 싼값에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받고 가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중남미 사람들이지만, 유럽에서도 많이 온다. 아바나 시내 특급호텔인 ‘아바나 해방호텔’ 로비에서 만났던 50대 후반의 독일인 관광객 귄터는 파킨슨씨 병에 걸려 고생하는 아내를 치료하기 위해 쿠바로 왔다. 그는 “믿을 만한 의료진과 시설을 갖추었으면서도 비싸지 않아 좋다”고 말했다.
  
  미 경제봉쇄의 어두운 그림자
  
  쿠바 의료복지에 문제점과 어려움이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40년을 넘긴 미국의 경제봉쇄정책(미국쪽 용어는 embargo, 쿠바쪽 용어는 bolckade)이다. 미국의 경제봉쇄 탓에 일부 주요 약품(또는 원료)들이 제대로 들여오지 못한다고 쿠바 사람들은 불평을 한다. 한국의 외교안보연구원 같은 기능을 하는 쿠바 국제관계고등연구소(ISRI) 카를로스 알수가라이 교수(국제정치학)의 지적.
  
  “쿠바에서의 약값은 매우 싸다. 문제는 미국의 봉쇄정책 탓에 때로는 주요 약품과 원료가 품귀현상을 빚고, 따라서 그 약이 꼭 필요한 환자들이 고통을 겪고 결과적으로 사망률을 높인다”
  
  1990년대 초 공산권이 무너지고 쿠바에 대한 경제원조가 끊기고 옛소련과 동구권으로의 수출 길조차 막히자, 쿠바의 의료복지정책도 여유가 없어졌다. 병원에서는 소독약이 모자랄 형편이 됐다. 쿠바 사람들은 1990부터 1993년 사이의 어려웠던 시절을 ‘특별한 기간(special period)'이라 부른다. 의사들의 월급도 상대적으로 전보다 줄어들었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나아졌지만, 쿠바의 의사들은 전문직업인으로서 만족감을 느낄 만큼 월급을 많이 받지는 못한다.
  
1차 진료기관인 보건소의 여의사는 “쿠바의 병원에선 입원비는 물론 수술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자랑한다. ⓒ김재명

  사회주의 경제체제 아래서 개인병원 개업이란 없다. 쿠바 의사들은 모두 국가로부터 월급을 받는다. 그렇지만 노동강도가 청소부나 경찰보다 높지 않다는 이유로 상대적으로 월급이 적다. 한달에 20-25달러가 고작이다(청소부는 30달러 이상). 그런 까닭에 일부 의사들은 의사 가운을 벗고 외국인들을 태우는 택시 운전사, 호텔 종업원, 또는 자신의 집을 개조해 외국관광객을 맞는 개인호텔(까사 파르티큘라, 이른바 민박집) 관리인으로 변신하는 일이 벌어지는 상황이다(이 연재 6회에서 다뤘던 ‘쿠바인의 생존술’ 참조).
  
  쿠바의 의료체계가 대중화에 성공해 돈 없는 사람들에게 천국이라 하지만, 모든 부문에서 의료기술이 첨단 선진화됐다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필자가 한때 묵었던 개인호텔(까사 파르티큘라, 이른바 민박집) 관리인의 아들은 35세의 잘 생긴 사내였다. 이름은 까르밀로. 5년 전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하반신을 못 쓰고, 휠체어로 움직였다. 까르밀로는 이즈음 “쿠바보다 더 나은 의료설비를 갖춘 선진국으로 간다면, 마비된 척추신경이 살아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비디오 테이프는 놀랍게도 광주 조선대학 부속병원에서 척추가 마비된 환자가 차츰 회복되는 내용을 녹화한 것이었다. 까르밀로는 “갈 수만 있다면 한국에 가서, 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싶다”며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바나 거리의 청소부. 노동강도로 임금이 결정되는 쿠바에선 청소부 월급이 의사보다 많다. ⓒ김재명


[특파원 eye] 쿠바가 자랑하는 의료

[특파원 eye] 쿠바가 자랑하는 의료

KBS 특파원 현장보고 2012.04.21

http://news.kbs.co.kr/news/NewsView.do?SEARCH_NEWS_CODE=2466007

<앵커 멘트>

가난한 나라, 독재의 나라 쿠바가 바깥 세상에 자랑하는 것이 세 가지인데, 시가, 야구, 그리고 의료분야입니다.
이중에서도 가정진료제 등 선진화된 의료체계는 쿠바의 의술과 더불어 다른 나라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가 어떻게 앞선 의료체계를 만들었을까요?
국현호 순회 특파원이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공원 한복판에서의 공연, 이른바 ‘거리의 악사들’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악사들은 모두 정신병원 환자들입니다.
병을 모두 치료하고 사회로 돌아갈 것에 대비하는, 사회적응을 위해 거리 공연에 나선 것입니다.
쿠바에서 쉬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곧 무너질 듯한 낡은 건물. 또 영화에나 나올 법한 오래된 자동차. 경제가 낙후된 쿠바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현재 쿠바의 공식적인 1인당 GDP는 5,984달러.
우리나라의 1/3도 안 되고, 미국의 1/13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국민들의 평균 수명이 78.6세, 영아 사망률은 미국보다 낮은 천 명당 4.5명입니다.
국민 180명에 의사 한 명꼴로, 미국과 영국에 비해 월등합니다.
어려운 경제 속에서도 어떻게 이런 여건을 갖추게 됐을까?


아바나 주택가의 한 아파트 건물, 1층 진료소에서 의사 산체스 씨의 하루가 시작됩니다.
산체스 씨가 돌보는 주민은 천 백 명 정도.
모두 이웃들입니다.

진료소를 찾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직접 왕진까지 나섭니다.
<인터뷰> 주네트 소델로(임부) : “서로 이웃사촌인 동시에 친구이기 때문에 매우 잘 지내고 의사로서 많은 관심을 가져줍니다.”
쿠바 의료 체계의 가장 기본이 되는 '패밀리 닥터' 이른바 가정진료소 제도입니다.
의사 1명이 평균 120가구 정도의 동네 주민을 돌봅니다.

<인터뷰> 이를리스 산체스(의사) : “환자 대부분의 병력을 거의 다 알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예방 진료를 하지만 상황에 따라 병에 걸려서 찾아오는 환자들도 있습니다.”

이런 제도는 1984년부터 시작됐습니다.
치료도 중요하지만 예방에 큰 중점을 두겠다는 게 쿠바정부의 의도였습니다.
쿠바의 모든 가정진료소는 주변 병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주변 병원들은 요일 별로 각 전문의들을 이곳 진료소에 보내, 보다 전문적인 치료와 예방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현재 패밀리 닥터 수는 전체 의사의 절반 정도인 3만 천여 명. 이들이 국민의 98%를 담당합니다.
여기서 치료가 어려운 환자는 각 지역의 종합 진료소를 거쳐, 우리나라의 2차, 3차 기관에 해당하는 큰 병원으로 옮겨집니다.
우뚝 솟은 현대식 고층 건물. 쿠바 최대 규모의 종합병원입니다.
전문의 6백여 명 등 의료진만 3천 명이 넘습니다.

40살 라미레스씨는 3년 전 간암 판정을 받고 이 병원에서 간 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수술비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밀라그로스 라미레스(간이식 환자) : "제가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특히 무료로 수술을 받을 수 있으니까 걱정이 하나도 없었어요."
<인터뷰> 로하스(알메이헤이라스 병원 의사) : "우리는 인본주의적 의료 서비스에 초점 을 두고 있습니다. 쿠바 시민에게 특화된 의료 서비스를 지원하죠."

쿠바 정부가 지난해 의료 분야에 투자한 돈은 전체 예산의 10% 정도.
코스타리카 1.27%, 브라질 0.64% 등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비중입니다.
7만 3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지난 2005년 파키스탄 대지진.
발목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발길을 내딛습니다.

자원봉사에 나선 쿠바 의사들입니다.
지원의 손길마저 끊긴 험한 산악 마을의 주민들은. 예상치 못한 외국인의 도움에 기운을 얻었습니다.
이렇듯 쿠바가 지금까지 해외에 파견한 의료진은 66개 나라에 4만 명 남짓 됩니다.

<인터뷰> 마리솔 노아(쿠바 보건복지부 간부) : "쿠바의 의료 서비스는 국제주의의 이념에 입각해 연대적이고 인도주의적입니다. 우리는 지진 또는 태풍 등의 자연재해를 입은 모든 사람을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러면서 쿠바의 높은 의료 수준은 세계에 널리 알려졌고, 쿠바를 찾는 외국인 환자도 크게 늘고 있습니다.
2년 전, 제왕절개 수술 도중 뇌에 산소 공급이 끊기며 몸 전체가 마비됐던 베네수엘라 여성입니다.

다섯 달 전에 쿠바에 와 치료를 받으며 희망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인터뷰> 파스쿠알리나 데 무로(환자보호자) : "몸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몇 마디 말을 했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이 여성이 치료를 받는 곳은 국립 뇌신경 연구센터.
환자 250명 중 절반 가까이는 외국인들입니다.
이 여성환자처럼 쿠바를 찾는 외국환자들은 해마다 5천 명이 넘습니다.

쿠바의 한 대학 캠퍼스, 강의실에서는 신입생을 대상으로 해부학 강의가 한창입니다.
외국학생들을 받아 가르치는 라틴 아메리카 의과대학입니다.
외국인들에 대한 치료도 치료지만 외국에 의술 자체를 가르쳐주기 위해 만든 대학입니다.
이른바 ‘고기를 잡아주기보다 낚시하는 법을 알려주겠다’는 겁니다.
학생들은 주로 의료 후진국 출신입니다.

<인터뷰> 후안 카로조 에스테베스(라틴아메리카 의대 총장) : "쿠바 의사들과 같은 원칙에 따라 교육하고 있습니다. 배움을 중요시하는 것은 물론 의사로서 연대, 국제주의, 인간에 대한 애정, 무조건적 진료와 동정심 등을요."
볼리비아 출신의 이 학생도 1년 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이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인터뷰> 다이아나 수비라니(볼리비아 출신 학생) : "볼리비아에서 천 명의 지원자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단지 30명만이 이곳으로 왔습니다."
현재 이곳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68개 나라 천5백여 명. 학비 등 모든 비용이 무료입니다.

단 쿠바 시골에서 1년간 의료 봉사활동을 해야 하고,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가서도 낙후되고 어려운 곳에서 의사 생활을 해야 한다는 선서를 해야만 합니다.
의사가 된 뒤에도 입학 당시 초심을 잃지 말라는 뜻입니다.
의료 강국 쿠바의 면모는 생명공학 분야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곳은 쿠바의 폴로시엔티피코, 그러니까 과학종합지대라 부르는 곳입니다.
쿠바 사람들은 과학의 기둥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주요한 종합 연구센터와 각종 병원의 80% 이상이 이 주변에 모여 있습니다.

그 중심부에 자리 잡은 국립 면역 연구소.
쿠바 고유의 백신을 개발하는 곳입니다.
최근에는 암 치료 연구에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2002년 개발한 폐암 백신은 세계적으로 그 효과를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인터뷰> 페드로 로드리게스(쿠바 국립 면역연구소 연구원) : "총 5차례의 1차 임상실험을 실행했고 이후 2002년부터 폐암 백신의 효과를 입증하는 2차 임상실험 결과를 획득했습니다."
이곳을 비롯해 쿠바 연구소들이 보유한 생명공학분야 특허는 5백 개가 넘습니다.

50년간 계속된 미국의 경제 봉쇄.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이 같은 성과를 만들어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 호세 데 헤수스(쿠바 보건복지부 간부) : "많은 노력과 희생이 불가피했지만, 쿠바의 의료서비스 지표는 세계 상위권에 도달하는 등 세계보건기구와 범미 보건기구에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독재의 나라, 경제적으로 가난한 나라, 쿠바….
그러나 세계는 가난하게 살지만 부자로 죽는다며 이 나라의 의료를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2012년 10월 23일 화요일

쿠바의 무상의료, 다른 나라는 성공 못한 이유


쿠바의 무상의료, 다른 나라는 성공 못한 이유    - 2012/08/06 06:28 白泉

2012년 선거혁명/복지국가 2012/08/06 06:28 白泉

쿠바의 무상의료, 다른 나라는 성공 못한 이유

쿠바가 전 세계에 자랑하는 예방의학·무상의료·가족주치의 제도는 절체절명의 무로부터 쌓아간 것이다. 쿠바의 의료 체계를 부러워하면서도 아직 성공한 나라가 없는 것은 지금 있는 것을 버리지 못하는 탓이다.

장정일 (소설가)

바캉스 삼아 제목에 ‘쿠바’가 들어가는 책을 모두 모았다. 나는 음악과 책만 있으면 더위 따위 아무렇지도 않은데다가,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신념에 찬 사람이다. 맨 먼저 20대에 읽었던 C. 라이트 밀스의 <들어라 양키들아(Listen, Yankee)>(아침, 1985년)를 집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한껏 팽배했던 1980년대의 ‘반미’ 정서 속에서였지만, 문학청년들에게는 또 다른 통로가 있었다.

1961년 5월1일. 김수영은 그해 봄, 정향사에서 펴낸 <들어라 양키들아>를 읽고 이런 일기를 썼다. “<들어라 양키들아> 독료. 뜨거운 마음으로, 무수한 박수를 보내면서 읽었다. <사상계>사에 북 리뷰를 썼다. 아아, 들어라 양키들아.” 김수영은 당대의 진보 매체였던 <사상계>의 청탁을 받고, 막 번역된 그 책을 읽었다. 그러나 원고를 보내고 보름 뒤에 터진 5·16 쿠데타 탓에 ‘반미적 내용’으로 가득한 그의 서평은 빛을 볼 수 없었다.

<김수영 전집 2-산문>(민음사, 1981년)에는 그때 사장된 서평이 전재되어 있다. 김수영은 미국 자본가(제국주의)와 결속한 쿠바 토착 지배계급(봉건주의)에 대한 전복이 쿠바혁명이라는 C. 라이트 밀스의 관점에 동의한다. 쿠바혁명의 표층이라고 해야 할 이 관점의 학술적 명명은 반제·반봉건혁명이다. 성격은 다르지만 우리나라의 4·19혁명(1960년)은 쿠바혁명(1959년)과 한 해 터울로 태어난 연년생이다. 그래서 김수영은 한동안 쿠바혁명을 늘 의식할 정도였다. 그는 3년차인 쿠바혁명과 2년차인 4·19혁명을 비교하면서, 혁명은 ‘무(無)’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혁명이 성공하려면 쿠바에서처럼 무의 자리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4·19혁명은 원통하게도 그 처지를 포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혁명은 왜 무의 처지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일까? 시인의 상상은 뜬구름 같다.


쿠바혁명의 심층은 독립전쟁

300년 넘게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는 1868년부터 산발적인 독립전쟁을 벌인 끝에, 1898년 승리를 목전에 두었다. 그러자 전황을 관찰하던 미국 국무부는 크게 당황했다. 미국이 쿠바를 미연방에 합병하고자 골몰한 것은 1801년부터였는데, 쿠바가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면 미국은 쿠바를 잃어버리게 된다. 미국이 그 고민을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유재현의 <담배와 설탕 그리고 혁명>(강, 2006년)에 소상히 나온다. “1898년 미국은 아바나 항구에서 전함 메인호의 침몰을 빌미로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 침몰로 266명이 몰살당해야 했는데 후일 메인호의 침몰은 미국이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제국주의적 탐욕을 전쟁으로 채우기 위해 제 나라 군인들의 목숨을 바다 밑으로 수장해버렸다.”

미국은 스페인 함정이 어뢰 공격을 했다면서 선전포고를 했고 스페인은 석 달도 견디지 못하고 쿠바와 함께 푸에르토리코·필리핀·괌을 덤으로 미국에 양도해야 했다. 미국은 때늦게 뛰어들어, 쿠바인에게 가야 할 승리를 가로챘다. 천샤오추에의 <쿠바, 잔혹의 역사 매혹의 문화>(북돋움, 2007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899년 1월1일 스페인은 정식으로 미국에 쿠바를 이양했다. 쿠바인들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30년간 치열한 투쟁을 벌인 끝에 스페인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났지만 다시 미국의 신패권주의하에 50여 년을 보내야 했다.”


카스트로의 결정적 순간

쿠바를 차지한 미국은 군정을 실시하면서, 미국 재계와 쿠바의 엘리트 계층을 하나로 묶는 ‘재계-국가 통치동맹’을 만들었다. 알짜(경제)는 미국이 먹고, 허울(통치)은 토착 엘리트에게 맡긴 것이다. 1902년 군정을 마치고 쿠바를 독립시켜 주었다지만, 이 체계는 아무런 손상 없이 1959년 쿠바혁명 때까지 유지됐다. 미국은 군대를 철수하면서 쿠바 헌법에 ①미국은 언제라도 쿠바 내정에 간섭할 수 있으며, ②미국 해

<의료천국, 쿠바를 가다>요시다 다로 지음파피에 펴냄

군이 필요한 장소라면 어떤 특정한 곳이라도 매도 및 임대해 주어야 하고(현재의 관타나모 기지는 이 헌법의 잔재다), ③미국 이외의 나라와 조약을 체결하거나 영토를 할양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넣게 했다. 이 헌법은 1934년에 폐기되었으나, 쿠바는 여전히 미국의 보호국이었다.

본문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미국 학자인 C. 라이트 밀스는 쿠바혁명의 심층이 독립전쟁이었다는 것을 용케 알았다. 쿠바혁명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 제목이 ‘들어라 쿠바인들아’가 아닌 것은 그런 까닭이다. 쿠바혁명이 미국과 벌인 제2의 독립전쟁이었다는 것은, 이후에 미국이 한 줌의 토착 엘리트를 앞세워 벌인 군사 작전과 50년 넘게 이어지는 경제 봉쇄로 증명된다. 온갖 공산국가나 독재국가와 수교했던 미국이 유독 쿠바와 국교를 맺지 않은 것은, 쿠바를 자기 나라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것이다. 페터 벤데가 엮은 <혁명의 역사>(시아출판사, 2004년)나 로버트 서비스의 <코뮤니스트>(교양인, 2012년)에 실린 쿠바혁명 편에는 아쉽게도 그런 성찰이 없다.

피델 카스트로는 마르크스·레닌을 배우지 못했고,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혁명 직후 미국 중앙정보국이 상원에 제출한 보고서가 보증한다. 로버트 서비스의 관찰처럼 혁명에 성공한 카스트로는 미국에 잘 보이고자 ‘반제국주의 담론’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고, 여느 친미 국가의 신임 지도자가 그렇듯이 득달같이 미국으로 달려가 링컨 동상 앞에서 자신의 자랑인 군모를 벗었다. 하지만 미국은 쿠바와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지 않았다. 이제 쿠바는 모든 것을 무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요받았다. 그때 미국이 환대했다면, 카스트로는 미국이 후원하는 또 한 명의 라틴아메리카 독재자가 되었을 것이다.

지구상의 빈국 쿠바가 전 세계에 자랑하는 예방의학·무상의료·가족주치의 제도는 자본·기술·인력의 풍요가 아니라, 절체절명의 무로부터 더듬더듬 쌓아간 것이다. 린다 화이트포드·로렌스 브랜치의 <또 하나의 혁명, 쿠바 일차의료>(메이데이, 2010년)와 요시다 다로의 <의료천국, 쿠바를 가다>(파피에, 2011년)에 나와 있듯이 쿠바의 의료 체계를 부러워하고 흉내 내고자 하면서도 아직 성공한 나라가 없는 것은, 작금의 것을 하나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어느 글에서 “복지사회란 경제적인 조건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탐구가 상식이 되는 사회에서나 가능하다”라고 했다. 요모조모 경제만 따지는 자리에서는 영혼(인간)이 보일 리 없다. 그래서 혁명은 무에서 출발해야 성공한다고 했나보다.

2012년 10월 16일 화요일

쿠바의 의료복지에 관하여


http://www.cuba.or.kr/technote/board.php?board=kkkorder&command=body

사단법인 한쿠바교류협회

쿠바의 의료복지에 관하여
 
쿠바의료는 "패밀리 닥터 제도" 와 "예방의학" 중심 임. 국민소득 5,700달러에 평균수명 76세 유아사망율 1,000명 (4.6명) 미국의 (6.5명) 보다 낮은 수치를 자랑하고 있다.
의사 1인당 환자를 관리하는 인원은 평균 160명, 한국의 630명에 비해 상당히 적은 인원을 관리 함으로써 환자에 대한 집중성을 가짐으로 보다 체계적인 환자 관리가 된다고 본다.
 쿠바의 의료진료 체계
쿠바의 진료체계는 패밀리 닥터 와  시군구 지구 진료소가 1차진료기관이고. 2차 진료기관 은 시군구 병원과 주병원이고, 전국병원 (대학병원, 연구센터, 바이오 의료산업)가 3차 진료기관으로 분류된다  패밀티 닥터 제도 
패밀리 탁터 제도는 우리나라에서 환자가 의사를 찾아가는 진료시스템이라 하면 쿠바는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패밀리 닥터는 각 마을 단위로 설치되어 있다. 근무는 오전에는 내원 환자를 치료하고, 오후 에는 가정방문을 하여 환자가 있는지 살펴보고, 일반적인 환자를 진료한다. 또한 병원내 숙소를 설치하여 응급환자들이 언제든지 내원하여 치료할 수 있게끔 하고 있다. 패밀리 닥터 제도를 통해 환자의 80%를 치료한다.  패밀리 탁터에서 치료할 수 없는 환자는 시군구 진료소나 전국병원 에 후송하여 진료케 하고 있다.
 
 쿠바 의료 의 특징  
 쿠바의 모든 진료에 대해서는 전액 국가에서 부담 한다.
 쿠바의 의료의 특징은 패밀리 닥터 제도에 의한 예방의학 중심이다. 전체환자의 80%를 패밀리 닥터 제도를 통해 치료한다.
쿠바는 의사를 육성발굴하기 위하여 교육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국가가 부담한다. 그리고 모든 의과대학 졸업생  들은 졸업후 농촌지역이나 제3세계에 파견되어 근무하여야 한다는 의무적 책임을 부여함 따라 전세계 6만명의 의사들 이 빈민구호 및 재난 구호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패밀리 닥터의 골간이다.
  쿠바의 의학은 백신개발 및 바이오 관련 연구에 관해서 세계적으로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또한 이들이 개발한 백신이나 바이오 기술은  개발도상국 이나 제3세계 국가에 대해서는 무료로 공급을 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 의과대학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 전경
학생선발기준: 의사가 없는 농촌이나 두메산골 출신학생 우선선발

학과제도: 입학후 2년동안 본과 교육, 4년동안 전국21개 병원으로 파견 되어 새내기 의사들과 현장 실습을 함

  학비: 재학중 드는 모든 비용은 국가에서 전액부담 그리고 매월 100페소 가랑 장학금도 지급함 단 졸업후 농촌지역이나 두메산골에 의무적으로 근무하여야 함

※ 쿠바는 매년 4000년 명 정도의 의사가 배출됨, 일부는 농촌 및 산간벽지로 일부는 제3세계 국가에 파견되어 의료 활동을 함
 
쿠바의 사회복지제도 

쿠바의 사회복지제도는 무상의료제도와 같이 교육 , 주거 등 기본적인 복지제도와 더불어 장애인, 노인 복지에 관해서도 국가가 책임을 진다.

중증장애인의 교육시설 운영에 있어서 중증 장애인은 교육시설에 기숙을 하면서 주말에 집으로 돌아가면서 학교에서 집중적으로 관리를 한다. 그리고 경증 장애인은 통학을 하고,  학급당 학생 약 7~8명 정도이고 교사1명당 보조교사  4명 정도 배치되어 관리 한다. 시설 한곳당 영양사, 간호사, 기술 교사를 포함한 약55명 정도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쿠바정부는 2001년 부터 환자가 병원에 와서 치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전문의사가 정신지체장애인 이나 일반 장애인들의 집으로 방문하여 집중 치료케 하고 있다. 그리고 쿠바는 인구 100명당 1.25% 정도 장애인들이 존재하고 이들을 국가가 직접 관리한다

 
쿠바 의료 복지 및 교류 활동 과제 

한쿠바교 교류협회는 지난 2004년 부터 쿠바의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 및 정신지체인의 집, 다운증후군 , 엔젤랜드 초등학교 등 매년 1~2회 거쳐 사회복지 시설 및 의료기관을 방문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설 방문 을 통해 이들은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  장애인 보호시설 기관에 기저귀 및 보호대 등 관련 물품이 부족함. 

- 초등학교 및 교육기관은 학습자재 나 기초 학용품이 매우 부족함 

- 관련시설물 이 매우 낡아 환자나 학생들이 사용하는데 매우 불편함. 

-의료시설은 시스템적으로는 매우 이상적이나, 의약품이나 관련 기자재들이 매우 낡아 작동을 하는데 매우 불편하게 사용하고 있음. 
 ▽쿠바 의료시설 및 장애인 보호시설 
 

쿠바 국민소득 세계 94위인데, 월급은 25달러?


쿠바의 독립영웅 호세 마르티

현지인들이 타는 1950년대 만들어진 구형 택시에 자그마치 7명이 함께 끼어서 쿠바 호텔의 대명사인 나씨오날 호텔(Nacional Hotel) 근처까지 타고 갔다. 호텔 근처에서 쿠바인들이 자주 먹는 길거리 피자로 점심을 해결했다. 길거리 허름한 곳에서 파는데, 한 판의 크기가 손바닥보다 조금 커서 한 끼 분량 정도 되며 가격은 10페소였다. 물론 현지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세우페로 10페소는 우리 돈으로 500원 정도이다.

커피를 마시려 나씨오날 호텔로 들어갔다. 커피 한 잔에 3페소였다. 1세우세가 미화 1달러에 해당하니 우리 돈으로 3600원 정도이다. 바로 눈앞에 펼쳐진 카리브 해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기타를 맨 3명의 악사들이 오며 노래를 불러도 좋겠냐고 한다. 그들은 쿠바 민요를 주로 부른다. <관타나메라(Guantanamera)>의 본 노래를 하기 전 그 도입부에 부른 의성음은 너무 자연스러웠고 듣기 좋았다.

▲  나씨오날 호텔 악단
ⓒ 이규봉

관타나메라는 관타나모(Guantanamo) 출신의 시골 소녀를 뜻한다. 쿠바의 독립영웅 호세 마르티(Jose Mart, 1853~1895)가 1889년 발표한 시 <소박한 시>가 1950년대에 <관타나메라>의 가사로 알려졌다. 호세 마르티는 16세에 독립전쟁인 10년 전쟁에 참가한 쿠바에서 제일로 알아주는 애국자이다. 그는 1892년 뉴욕에서 쿠바혁명당을 조직했고 1894년 쿠바에 상륙하는 독립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1895년 쿠바 동남부를 기점으로 제2차 독립전쟁을 시작했으나 그해 4월 정부군과 전투에서 사망했다.

<관타나메라>의 작곡가는 호세이토 페르난데스이다. 가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 관타나모의 농사짓는 아낙네여
   나는 종려나무 고장에서 자라난/ 순박하고 성실한 사람이랍니다.
   내가 죽기 전에 내 영혼의 시를 여기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내 시 구절들은 연두빛이지만/ 늘 정열에 활활 타고 있는 진홍색이랍니다.
   나의 시는 상처를 입고 산에서 은신처를 찾는/ 새끼 사슴과 같습니다.

여기서 과히라(guajia)는 농사짓는 여인을 말한다. 관타나모는 쿠바 남동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쿠바 속의 미국이나 마찬가지이다. 쿠바가 스페인에서 독립하려고 하던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 중에 미국이 개입해 이 땅을 강제로 차지했고 공식적으로는 임대하고 있으나 강탈이나 마찬가지이다. 관타나모는 미국의 가장 오래된 해외 기지로 국제법은 물론 미국법도 지키지 않는 초법적인 지역이다.

미국은 200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나 알카에다 혐의로 체포한 사람들을 이곳에 억류했다. 미국 정부는 그들을 전쟁포로로서 정당한 대우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가족은 물론 변호사 접촉도 못한 상태에서 장기 구금을 하며 고문과 같은 가혹행위를 가하는 등 비인도적인 대우를 하여 국제앰네스티를 비롯한 많은 인권단체들과 유럽 각국의 비판을 초래했다.

▲  혁명광장의 체 게바라와 까밀로 씨엔푸에고스
ⓒ 이규봉

혁명광장(Plaza de la revolucion)으로 갔다. 쿠바혁명 4인방 중 이미 고인이 된 체 게바라(Che Guevara)와 까밀로 씨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의 윤곽이 광장을 마주보는 건물 벽에 선명하게 붙어있다. 까밀로 얼굴 아래 적힌 문구는 피델이 혁명에 성공하고 아바나로 입성했을 때 "우리 잘하고 있나?" 하는 피델의 질문에 까밀로가 한 대답이다. "그래. 너 잘 하고 있어. 피델(si vamos bien, fidel)" 밤에는 윤곽을 따라 불이 켜진다. 하얀색의 호세 마르티의 동상이 우뚝 솟아있는 기념관 1층에서 마침 그림 전시회 개막을 하고 있었다. 쿠바 그림이라고 알려주듯 색상이 매우 화려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 홀로 헤밍웨이가 즐긴 칵테일로 유명하다는 모히또(Mojito) 한 잔을 마시며 그림을 감상했다.

▲  전시관에 설치된 그림. 작가 이름을 모르겠다
ⓒ 이규봉

다시 까사에 도착하니 우리 방에 이미 새 사람이 투숙했다. 정 선생을 만나 한국 학생이 구입한 휴대전화를 빌렸다. 우리가 직접 구입하려 했지만 외국인이 직접 구입하려면 가격이 두 배나 된다고 한다.

마누라들은 남편이 돈 벌어 오면 좋아한다

연말임에도 예약을 서두르지 못해 우리는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까지 가는 버스 비아줄(Viazul)을 예약하지 못했다. 기차도 있었으나 그 누구도 기차를 추천하는 사람은 없었다. 쿠바의 정 선생 도움으로 승합차를 대절할 수 있었다. 1960년대 폭스바겐 밴에 조립한 자전거 4대를 싣고 전 선생과 나 그리고 고 원장 부부 네 명은 밤 8시에 산티아고 데 쿠바를 향해 출발했다.

택시 기사 맥시무스는 430세우세를 벌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아내와 나누려 했는지 같이 왔다. 그는 비교적 영어를 잘 구사하였고 유머감각도 있었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돌아올 때를 생각해서 도로 환경이 어떤지 살피려 했으나 어둠 때문에 잘 보질 못했다. 낮에 일하고 또 밤에 일을 하니 맥시무스는 얼마나 피곤했겠는가? 그럼에도 그는 한 잠 안자고 우리를 위해 쿠바의 동쪽 끝에 있는 쿠바 혁명의 해방구 산티아고 데 쿠바까지 달렸다. 공식적으로 861km의 거리이다.

그는 가는 도중 한 서너 번 정도 쉬었나 보다. 네 시간에 한 번 정도. 총 14시간 걸려 다음 날 아침 10시 좀 넘어  산티아고 데 쿠바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인근에 있는 까사를 구해 짐을 풀었다. 기름 값으로 한 200세우세 정도 지불한 것으로 생각해 볼 때 맥시무스는 한 밤 운전으로 쿠바 근로자 10개월 분 임금은 벌었을 것이다. 우리가 돈을 지불할 때 그 부인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저 마누라들은 남편이 돈 벌어 오면 이렇게 좋아한다니까!

여기서 기름 값 에피소드, 쿠바는 뭐든지 다 빼돌린다고 한다. 디젤의 경우 주유소에서 미터기에 보이는 대로 값을 지불하기도 하지만 그 외 암시장에서 구하기도 한다. 쿠바 정부가 정부트럭에 대한 기름값을 운전사에게 지불하면, 트럭 운전사는 사용 후 남는 기름을 모두 주유소에다 판다. 주유소는 웃돈을 얹어 일반 운전사들에게 다시 기름을 판다. 현재 디젤 가격이 리터당 1.2세우세이나 암시장 기름은 아바나 시내는 0.6세우세 시골은 그 보다 조금 더 싸다고 한다. 

▲  맥시무스 부부와 함께. 맨 왼쪽 필자, 전 선생, 맨 오른쪽 고 원장 부부
ⓒ 이규봉

쿠바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10년 현재 5520달러로 세계 94위이다. 그렇다면 한 달에 약 460달러이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 지급받는 월급은 25달러 정도이다. 쿠바로 시집 간 정 선생의 시댁을 예로 들어보자. 공장 노동자이신 시아버님이 25달러, 학교 선생님이신 시어머님은 30달러, 야구선수인 시동생은 20달러 그리고 함께 사는 시동생의 여자 친구는 80달러이다(손톱 아트를 하는 이 여자 친구는 어떤 땐 월수입이 400세우세 정도 되기도 한단다). 이러고 보니 피부에 와 닿는 평균 노동자의 월급은 25달러 정도 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우선 집세는 자기가 받는 월급의 10% 이하를 내면 되고 의료비, 탁아비, 교육비 모두 무료이다. 월급 외의 소득도 있을 수 있다. 부업으로 가축 키우는 것, 정부로부터 저렴하게 배급받는 생필품. 이런 것을 모두 포함하면 한 달에 약 460달러 수준은 될 것 같다. 그러나 쿠바에서도 자본주의가 점차 도입되면서 소득이 특히 높은 계층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는 인민들의 소득 불균형을 초래하여 불평등한 사회가 될 것임을 예고한다.

예를 들어 좋은 집을 할당받아 까사를 운영하거나 달러를 직접 만질 수 있는 관광업 등에 종사하게 되면 월 소득은 훨씬 높아진다. 게다가 좋은 친척을 두어 외국에서 보내온 돈까지 합하면 그들의 소득은 평균 노동자의 임금을 훨씬 상회한다.

2012년 10월 9일 화요일

쿠바헌법 43조/쿠바헌법 50조


http://youtu.be/PMi7OnqzECk

쿠바헌법 43조
피부색,성별,종교,국적에 관계없이
의료혜택을 받을 똑같은 권리가 있다

쿠바헌법 50조
모든국민은
무상의료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국가는 국민들에게 의료를 무료로 제공할 의무가 있다

제도 그리고 뛰어난 쿠바의사의 봉사정신

1963년 이후 세계 101개 나라에 10만이 넘는 의사들이 무료 의료봉사에 참여했다. 쿠바의 의사들은 그들의 손길이 필요한 어는 곳이든 나타난다. 2005년 8월 파키스탄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그 어떤 구호단체도 지진의 위험을 감수하고 히말라야 산맥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쿠바의 의사들은 그곳에 병원을 세우고 수많은 사람을 살렸다. 베네수엘라 빈민촌에도 그들은 있다. 베네수엘라 빈민지역 무상의료운동 ‘바리오 아덴트로’에 참여하는 의사는 대부분 쿠바 의사들이다. 돈이 없어 백내장 수술을 할 수 없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게 다시 세상을 보여주는 일도 한다. ‘기적의 작전’으로 불리는 이 유명한 프로젝트는 수만의 빈민들에게 시력을 돌려주었다.

또한 다른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불러 무료로 의료교육을 시킨다. 의료 봉사대를 파견하는 것은 그 나라의 자체적인 의료를 해결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쿠바 의사들의 봉사정신은 이런 실적들로 다 표현해 낼 수 없다.

“아이의 순수한 미소, 부모의 감사하는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없다.” 한 쿠바의 의사의 말


쿠바의 의료수준은 높고 의료 관광국으로의 명성은 두텁다. 이런 높은 의료수준은 근본적으로 쿠바가 사회주의 국가이고 국방비의 55%를 삭감해 교육, 의료에 투자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한국의 의료는 무상의료가 힘든 시스템이고 의사들이 무료봉사를 활발히 하지 않는 것도 사실 사회시스템상의 열약함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쿠바의 의사들은 돈, 편안한 삶, 다른 어떤 것보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선택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많은 의사에게 혹은 의사를 꿈꾸는 이들에게 바람직한 의사의 모습을 생각할 기회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