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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11일 목요일

[오마이뉴스] 진보정당끼리 '너희는 악마'... 이제 그만 좀 하지?

[Ohmynews]진보정당끼리 '너희는 악마'... 이제 그만 좀 하지?

[진보정치 연속 집담회 ②] 진보정당 내 새로운 흐름들


14.09.13 21:10l최종 업데이트 14.09.13 21:10l
손우정(roots96)

원문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31829

진보정치의 희망은 있는가? 6.4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 이후 정치적 주변화에 내몰린 한국 진보정치에 대한 조롱과 냉소가 만연하고 있다. 정치전문가들 역시 수많은 주문을 쏟아내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런 조언은 대부분 '외부 시각'에 머물러 있다. 당사자들은 진보정치를 어떻게 평가하고 전망하고 있을까? 몇 차례에 걸쳐 진보정치 당사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본다. - 기자 말

NL과 PD. 진보정치를 둘러싼 여러 논쟁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개념이다. 혹자는 이를 '정파'라 부르고, 누군가는 '의견그룹'이라고 부른다. '진보정치'를 매개로 결합되어 있는 다양한 생각들은 'NL적 견해'와 'PD적 견해'로 너무 쉽게 단순화되어 버린다. 80년대 후반, 일명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확립된 이 구도는 20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도 견고하게 작동하고 있다. 단순히 '생각' 혹은 '노선'만이 아니라 진보정치를 주도하는 인물들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과연 진보정치가 이 두 가지 생각의 흐름으로 단순하게 구분될 수 있을까? 최근 진보정치의 위기와 때로는 사망선고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이런 구도를 나름의 방식으로 넘어서려는 작은 흐름들이 나타나고 있다. 한 진보정당 당원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진보정당 30대/40대초 친목모임'(이하 '친목모임')은 소속정당과 정파를 초월해 새로운 진보정치 전망을 함께 모색하려 시도하고 있고, '진보정당을 평가해보자'(이하 '진정해')는 모임은 평당원의 시각에서 진보정당의 위기를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시도다.


지난 3일, 경기도 용인에서 이들이 모였다. 3040친목모임을 처음 제안한 '금강초롱'(필명·38·진보당), '진정해'를 진행하고 있는 추공(필명·49·노동당), 6·4지방선거에 성남시의원으로 출마했다 낙선한 배준호(31·정의당), 친목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윤경준(41·비당원)씨다. 이들 역시 전통적인 기준으로는 NL(금강초롱, 윤경준)과 PD(추공, 배준호)로 구분할 수 있지만, '핵심'이 되지 못한 '주변인'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10년간 다른 정파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가 뭔지도 몰랐다"

- 진보정당 내 다양한 정파에 소속된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모이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다. 이런 모임을 만든 이유부터 들어보자.

▲ 금강초롱(필명·38·통합진보당 당원) 울산 미포만에서 
태어나 노동운동의 태동기와 부흥기, 쇠락기를 
모두 지켜보며 커왔다. 학생운동시절 국민승리21 활동을 시작해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 평당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3040친목모임을 처음 제안했다. ⓒ 손우정

금강초롱(진보당) : "나도 진보당 내에서 특정 정파에 속해 있긴 하지만 다른 정당은 물론 같은 당 내 다른 정파의 비슷한 또래들을 잘 모른다. 심지어 그들이 무슨 노래를 즐겨 부르는지조차 몰랐다. 진보정당에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데 진보정당은 계속 분화하기만 했다.

수직적인 정파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면, 이걸 흔들 수 있는 가로축이라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싶었다. 그래서 3040친목모임을 처음 제안했다. 30대에서 40대 초는 각 정당에서 허리세대라 기존의 정파 축을 가장 효과적으로 흔들 수 있는 세대다. 그래서 나이도 생각이 비슷한 43세까지로 제한했다(웃음).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또래들이라 그런지 호응도 좋고 진보당, 노동당, 정의당, 녹색당 당원은 물론 진보정당 당원이 아닌 분들도 참여하고 있다."

추공(노동당) : "노동당 내부에서 진보정당의 지난 과정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몇 년 전부터 나오긴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당에서는 이런 문제의식을 실현할 공론장 자체가 없다. 그래서 나라도 먼저 연속 토론회 형식으로 평가 작업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지방선거 이후 네 차례 정도 진행됐고 앞으로도 계속 할 생각이다. 주로 노동당 당원들이 참여하고 있고 간간이 통합진보당과 정의당 당원들도 참여하고 있다."

- 만든 사람 생각과 참여하는 사람 생각이 좀 다를 수도 있겠다.

배준호(정의당) : "정의당에서는 정파논리가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 상황이고 후진양성을 위한 당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주요 관심사라 다른 정당과의 모임은 사실 절박함이 없다. 그렇지만 다양한 진보정당들 간에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창구는 필요한 것 같아 참여하려 한다. 꼭 4개 정당이 통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악마화할 필요가 있나? 기성세대는 모르겠지만 우리 세대는 소통과 공감의 욕구가 있다. '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항상 궁금했는데,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기대하는 마음이 크다."

윤경준(비당원) : "2012년 통합진보당이 분당하면서 탈당했지만 여전히 진보정당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유지하면서 살아 왔다. 정파와 정당을 초월한 3040친목모임이 만들어졌다기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다만 이 모임이 단순한 친목도모에서 끝나면 안 되고, 정견과 입장이 달라도 공존할 수 있는 공론장으로 작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파시스템 없이 서로 다른 입장이 어떻게 상호공존하고 대중과 만날 수 있을지, 이 모임에서 그 방법을 찾아보고 싶다."

진보정치의 인적 재생산, 이미 한계 왔다

- 두 모임의 강조점이 조금은 다른 것 같다. 특히 친목모임은 30대와 40대초로 모임대상을 제한한 것이 특이하다. 그동안 진보정치 1세대는 주류로 활동했고 20대는 '청년세대'라는 의미에서 주목받아 왔지만, 30대에서 40대초에 이르는 세대는 가장 진보적인 정치성향을 드러내면서도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이른바 '낀 세대'의 반란으로 봐도 되나?

윤경준 : "반란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억눌려 왔던 것 같다. 우리 세대는 어쩌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 우리에겐 지하 고문실에 끌려가던 선배세대와는 다른 가벼움과 자유로움, 발랄함이 있다. 그런데 진보정당에만 들어오면 우리의 발랄함을 잃어버리고 경직된다. 왜 그럴까?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고장난 정파 시스템 때문이다. 우리 몸에 맞지 않지만, 한번 만들어 놓은 (정파) 시스템이 업그레이드되지 않으니까 거기에 맞춰갔다. 밖에서는 비판해도 막상 자기가 속한 정파조직 안에서는 말도 못하는 분위기... 결국 이런 경직성이 자기교정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정파가 정치적 책임을 진 적도 없다. 쓸 만한 사람들은 정파 체계에서 질식하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다음 세대를 키워낼 수 없었다. 역량 손실이다."

금강초롱 : "국민승리21 때부터 진보정당 활동을 해왔는데 민주노동당 10년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다른 정파 당원들과 정서적, 화학적 결합이 전혀 없었다. 구386세대라 불리는 선배세대가 진보운동을 처음으로 활성화한 분들인데, 진보운동의 후퇴기라고 하는 지금도 그분들이 여전히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그 기간이 벌써 20년이 넘는다. 30대에 앞장섰던 선배들이 50대가 되어서도 앞장서고 있는 거다. 우리는 그동안 뭘 했나? 나쁘게 말하면 그냥 '몸빵'한 거다."

- '몸빵'만 했다는 것은 진보정당 내에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을 말하는 것 같다. 지금 30대 초에서 40대 초에 이르는 활동가 중 눈에 띄는 사람이 매우 드문 것이 사실이다. 진보정당에서 이 세대의 위치나 이미지는 어떤가?

▲ 배준호(31·정의당 당원) 
2006년 말 민주노동당 가입 후 2011년 진보신당에 
입당했다. 2012년 5월 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 폭력사태 후 
통합진보당에 입당, 분당 때 진보정의당에 합류했다. 
지난 6.4지방선거에서 성남시의원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손우정

배준호 : "좋지 않다.(웃음) 30대, 40대 선배들을 보면 당직 생활을 하면서 생계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직업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어떤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선배들의 길을 따라가야겠다고 마음먹을 정도로 자기 갈 길을 잘 찾아 가거나 선배들에게 자리를 넘겨받는 과정을 본 적이 없다. 전반적으로 우울해 보인다. '나는 저런 방식으로 살지 않겠다, 나를 희생하고 버려가면서 (정당활동을) 하지는 않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래서 정치 활동과는 별개의 직업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윤경준 : "우리는 학생운동의 영향력이 아직 남아 있을 때 대학생활을 했고, 이게 진보정당 활동까지 이어졌다. 어쩌면 지금 진보정당을 주도하는 선배들과 학생운동을 경험해 보지 못한 후배들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 세대다. 그동안 진보정치가 어려워져도 도망가지 않고 버텼다. 그러면서 자기 개발도 못하고 계속 소진만 됐다. 선배들은 여전히 '주역'으로 남아 있고 후배들은 '새로운 세대'로 주목받지만 우리는 그냥 '낀 세대'다."

추공 : "나는 낀 세대가 아니라 '주도하는 세대'에 속하지만 주도해본 적은 없다.(웃음) 그렇지만 친목모임을 지켜보면서 아쉬운 것도 있다. 구체적인 진지함보다는 아직은 친목활동 중심이다. 나름대로 자신의 정립이 있어야 기존 세대를 비판할 수 있다. (선배세대가) 보기보다 경험과 고민의 깊이가 깊은 사람들이라 웬만하면 흔들리지 않는다. (정말 세대교체를 하겠다면) 진지하게 고민해서 수없는 실패와 도전을 반복해야 한다.

사실 진보정당의 문제를 세대문제로 접근하는 건 좀 별로인데, 자꾸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의미는 분석해봐야 한다. 진보정치운동을 시작했던 주체가 지금도 계속할 필요가 있냐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명망가 리더들이 진보정치운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했던 사람들이 계속 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진보정당 1세대가 (자신의 자리를 후배에게 내어 주고) 다른 일을 찾거나 후배들이 실력을 키울 수 있는 장을 열어 줘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선 후배들을 신뢰해야 한다. 일을 맡길 때 해본 사람과 안 해본 사람 중 안 해본 사람들을 시킬 수 있어야 후배들에게 책임 있는 일을 맡길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안 한다."

정파 시스템으로 인한 분열, 불가피했나?

- 세대 문제가 제기되는 주된 이유를 정파 시스템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30대와 40대초 세대가 선배세대와 정서적 공감을 이루면서도 기존의 정파 질서에 지나치게 순응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인가?

▲ 윤경준(41·비당원) 
학생운동을 하다가 2006년 민주노동당에 입당, 
2012년 통합진보당 분당 때 탈당해 비당원으로 남아 있다. 
촛불시위에 자주 참여하면서 진보정치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고 있다. ⓒ 손우정

윤경준 : "그렇다. (운동하던 사람들) 모두가 진보정당에 입당하고 있었던 2000년 초중반에는 '다 정당에 들어가면 운동은 누가하나?'는 생각이 컸다. 그런데 막상 (나도 진보정당에) 입당해 보니 이건 완전히 운동권 정당이었다. 운동권들이 주도하는 정당이라는 장점은 지켜야 하지만 운동문화와 경험이 없는 당원들은 숨 막혀서 도망가는 분위기가 있었다. 예를 들어 2008년 분당 이후 진보신당에 전형적인 운동권과는 거리가 먼 '촛불시민'들이 대거 입당했다. 그분들과 기존 정파들이 아름답게 결합했나?

아니었다. 갈등이 심했다. 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과 동거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물과 기름도 이렇게 섞이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문화적 차이가 있는 이들이 함께 모이게 된 것은 엄청난 성과지만 결국 그 문화적 차이를 넘어서지 못했다. 민주노동당 초기에 어땠나? 변호사나 전문가들이 자기 이익을 포기하면서 당에 들어왔다. 그런데 결국 못 버티고 대부분 다시 나갔다. 왜 이런 문제들이 고쳐지지 않았을까? 결국 정파시스템 문제다."

금강초롱 : "진보정당이 가장 실력이 있었던 시절이 민주노동당 초창기였던 것 같다. 지지계층과도 끈끈한 관계였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사안들은 대부분 그때 민주노동당이 법안 제출하면서 해결하려고 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당의 활동을 (모든 정파, 개인들의) 공동 성과로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사실 그 많은 성과 중 어느 한 정파가 독자적인 힘으로 이뤄 냈던 것이 얼마나 되나?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서로 자신의 실력을 너무 높게 봤다. 분당해도 독자적으로 성공할 수 있고 나가는 사람들을 잡지 않아도 실패하지 않을 실력이 있다는. 결국 실력을 과신한 분열이었다. 진보운동은 같이 함께 하는 사람들 간에 의리가 있어야 한다. 의리가 없을 때는 느슨해지고 힘을 모을 수 없다."

추공 : "의리에서 해법을 찾는 건 위험하다. 의리 이전에 과학이 전제되어야 한다. 정파는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블랙홀이다. 외부에서 비판해도 무시하면 그만이다. 사실 분열은 자기 정체성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정파가 문제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시스템이 없는 게 문제다. 공개 시스템이 있으면 (정파활동이) 정치적인 유연성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결국 분열은 정파 시스템 문제 때문이었지만, 합치는 것도 정파 시스템(의 혁신)으로만 가능하다.

그동안 대중정당과 정파 시스템 간의 관계를 정립하지 못했다. 대중노선이 뭐냐고 물었을 때, (현재의 진보정당들은)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대중노선은 다양한 입장들이 공존해서 민주적 합의를 구성해서 나와야 하는데 특정 정파의 이데올로기가 대중정당의 이데올로기로 되어 버린다. 패권주의도 특정 정파만의 문제가 아니라 NL이나 PD나 다 같이 가지고 있는 문제였다. 대중노선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금강초롱 : "그렇지만 죽더라도 치열하게 안에서 싸웠어야 하지 않나? 2008년 분당 때, 지지자들은 벼락 맞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특히 노동계급 내에서의 충격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추공 : "참다 참다 못해서 나간 것이다. 그 안에서 의미 있는 행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면 남았겠지. 지금까지는 그런 가능성이 다 봉쇄되어 있었다. 다수파의 봉쇄 작전으로 아무 가능성이 없었던 아닌가? 누구든지 먼저 다수파가 되었을 때, 같이 연합하고 연대할 (대중정당) 시스템을 만들지 못했다. 민주노동당 초기에 평등파가 다수파였을 때도 못 만들었다."

배준호 : "나도 2008년 분열이 꼭 나빴다고 보지는 않는다. 변화가 필요했고, 내부적으로는 불가능했다. 충격이 필요했다. 당연한 순서였던 것 아닌가? 분열 때문에 진보정당이 쇠퇴한 것이 아니라 이미 쇠퇴한 것이 분열로 확인 된 것이다."

윤경준 :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우리 지지층을 놓고 봤을 때 크게 변한 것은 없다. 지금 10%지지율을 누가 1%씩 더 가져갈까 하는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여론조사에서 16%, 23% 지지율 찍을 때, 우리를 쳐다봐 줬던 그 국민들이 지지층이 될 수 있는 외연의 최대치다. 지금의 분열상이 10%를 넘는 그런 국민들의 지지를 수용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진보정치 재편? 먼저 매력적인 모습 갖춰야

- 기존 정파시스템을 비판하지만 분당에 관해서는 자주파, 평등파의 시각차이가 여기서도 반영되고 있는 것 같다. 진보정치의 전반적 위기 속에서 서서히 진보정치 재편 논의가 일어나고 있긴 한데 이것도 여전히 정파 논의 중심이다. 어떻게 지켜보고 있나?

윤경준 : "논의 자체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계속 미뤄 놓으면 2016년 총선 직전에 또 가치는 버리고 실리 중심의 접근이 이루어질 것이다. 미리 논의해보는 것은 바람직하다."

금강초롱 : "지금은 누구랑 통합하자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보다 자신들의 진보정당 활동에 대해 평가하고, 자기 성찰하는 국면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통합진보당이 좀 더 제대로 된 평가를 내놔야할 시점이라고 본다. 가장 많은 당원을 가지고 있는 진보당에게 계속 제기되는 과제가 있다. 패권적인 부분과 대북관 같은 것들. 자기 과제에 대해 나름의 대안을 보여줄 수 있을 때 진보정치 재편 논의가 빨라질 것이다. 진보당은 최근에 평가와 전망 위원회를 만들어서 토론했는데 긍정적인 출발이다. 노동당도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이런 것들이 서로를 만나가는 과정 같다."

추공 : "노동당 내에서도 통합, 재편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는 회의적이다. 내용이 반영되지 않으면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된다. 통합을 하든 재편을 하든 실력이 있어야 하는데, 평가도 제대로 안하고 무슨 근거로 통합을 하나? 노동당 일각에서는 제3지대에 당을 새로 만들고 나서 정의당과 합당하겠다는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진보당은 빠져 있는데, 왜 인천은 되고 울산은 안 되는지 설명해 줘야 한다(흔히 자주파는 경기동부, 울산, 인천 등 세 그룹으로 분류된다. 2012년 통합진보당 분당과정에서 인천 일부는 정의당으로 합류했고 나머지 그룹은 잔류했다. - 기자 말). 진보당은 종북세력으로 몰려 있으니까 그런 것인데, 너무 실리적인 발상이다."

배준호 : "옛 애인이 그립다고 다시 만난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는다. 물론 다시 만날 수 있는 조건이 있다. 그 사람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니라 다시 매력적으로 보일 때다. 지금 (진보정치 재편) 정서는 힘드니까 다시 만나자는 것이다. 새롭게 사랑을 느꼈을 때 다시 만날 수는 있지만, 외로움에 사무쳐 다시 만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돈 많은 사람이 우리에게 연애하자고 손 내미는 현 상황에서 진보정당들이 다시 만나려면 각자의 매력을 찾는 게 중요하다(7·30재보궐 선거 이후 새정치연합 일부 의원들은 정의당과의 통합을 거론했다.- 기자 말). 과거 지지율에 대한 향수? 잊고 시작해야 한다. 이 비전이면 되겠다는 판단이 들 때 재편 논의를 할 수 있다. 현재의 패배감 때문에 옛날 생각을 하는 것은 심정적으로는 이해는 되지만 진보정치 하는 사람들의 각오로는 부적합한 생각이다."

진보정치 부활, "어떤 노력이라도 시작할 때"

- 진보정치 재편은 역시 어려운 주제다. 아직 모든 것이 막연한 상황에서는 '상대'보다 '자기'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이 모임 역시 성공여부와 무관하게 의미 있는 노력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비판만 하는 조직이나 개인은 넘쳐난다. 비판을 넘어서는 대안을 가지고 있는가?

▲ 추공(필명·49·노동당 당원)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뒤 진보신당에 입당하면서 
정당활동을 했다. 용인에서 협동조합 운동을 펼치다 
노동당 내에서 진보정당 평가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 손우정

추공 : "내가 진행하고 있는 '진보정당 평가해보자'를 줄이면 '진정해'가 된다. 일단 서로 좀 진정할 필요가 있다. 당원들의 지금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탈정치'쯤 된다. 정파중심의 당운영이 만들어낸 결과다. 정파는 당연한 현상이지만, 정파가 당원을 향한 정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선의에 의존하거나 대오각성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시스템을 제도화해야 한다.

당원들이 자기 목소리를 찾는 과정은 이 제도화 과정과 맞물린다. '진정해'를 진행하면서 요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당직자, 정파 활동가들은 평당원들도 자기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에게 귀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는 것도 실력이다. 노동당만이 아니라 진보정당 전체의 문제다."

금강초롱 : "이제 과거 형태를 답습하거나 같은 사람들이 순서만 바꿔 나오는 시스템보다는 새로운 사람들이 진보정치의 꿈을 꽃피우는 시기가 되어야 한다. 여론조사를 보면 가장 진보적인 세대가 30대, 40대 초인데 진보정치에서 전면적으로 나선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열정과 에너지를 많은 당원들의 힘과 열정, 지혜로 운영되는 진보정당을 만들기 위해 써야한다.

그동안 실력 있는 젊은 세대들이나 진보적인 꿈을 가진 사람들이 중앙당이나 정책연구소에서 일하지 못했다. 기성정당에서 일하고 있는 진보정당 당원들도 많은데, 그 친구들이 중앙당이나 정책연구소에 들어와서 그동안 연구한 내용이나 현장 경험들을 쏟아내도록 해줘야 한다. 그런데 그런 친구들이 지금은 (진보정당에) 못 들어온다. 실력보다 정파차원의 안배에 치중한 인사 때문이다."

- 그런 대안을 어떻게 실현하겠다는 것인가? 주장만 해서 될 문제였다면 애초에 됐을 것이다. 구체적인 대책이 있나? 세력화하겠다는 것인가?

금강초롱 : "세력화? 우리가 정파를 초월한 젊은 당원들의 친목모임을 만든다고 하니까 '또 다른 정파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번도 주류가 된 적이 없다. (웃음) 필요하다면 시도해볼 생각은 있다. 우리의 시도가 올바르지 않은 길로 가게 된다면 당내에서 다양한 제어시스템이 작동할 것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새로운 흐름들조차 없다면 활력 없는 노쇠한 진보가 될 수밖에 없다.

정파의 긍정성을 부정하진 않지만 지금의 정파 시스템은 가장 자주적이고 창조적이어야 할 진보정당을 너무 딱딱하게 만들고 있다. 진보정당 활동가들은 개인의 사리사욕보다 민중이 주인으로 서는 세상을 만들려는 목표를 더 앞세운 사람들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세대부터 수동적인 자세나 정파적 경직성을 버리고 진보정치의 새로운 실험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성공여부는 알 수는 없지만 이런 흐름이 계속 나오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윤경준 : "두 번의 분당과정을 겪으면서 지지율 자체는 얼마 안 빠졌다고는 하지만 사람은 많이 잃었다. 실망하고 떠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나? 이런 사람들이 돌아와야 진보정당 내에서 정파혁신이든 정풍운동이든 가능하다. 지금처럼 경직된 정파가 주류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는 실질적인 혁신 주체를 만들기 어렵다. 물론 떠난 사람들도 성찰할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성찰하고 힐링할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모임에서는 여러 정당, 여러 정파, 비당원들이 일단 함께 어울려 보는 엠티 같은 것도 준비 중이다. 물론 정파를 배척하려는 태도는 맞지 않다. 그들은 당에 대한 애정과 헌신성이 훌륭한 사람들이다. 다만 그 사람들이 실수하지 않을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스스로는 못한다. 우리는 그런 혁신 공간을 만들려는 거다."

배준호 : "난 좀 밝은 것부터 해봤으면 좋겠다. 당에서 활동하는 분들은 우울함 같은 것이 베여 있는 것 같다. 후배들이 따라서 살고 싶은 모델을 만들어보고 싶다. 선배들과 달리 '상처 받지 않고 저렇게 유연하게도 당활동이 가능하구나'하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게 진보정치 문화를 젊고 밝고 즐겁게 바꿔야 한다. 농담 섞어 이야기해보면, 젊은 미혼당원들끼리 만나는 미팅같은 것도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웃음) 어렵고 복잡한 문제보다 문화적인 교류부터 시작하면 좋지 않을까?"

정치는 과정보다 결과로 평가받는 영역이다. 진보정치의 위기를 둘러싼 다양한 해법들 역시 어떤 결과를 내놓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도 그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시점에서는 과정 자체가 주목받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각 진보정당 내에서 시작되고 있는 작은 흐름들은 여러 부족한 점들이 눈에 띈다 하더라도 충분히 주목받을 가치가 있다.

물론 이 집담회에 참석한 이들의 시도에 어떤 대표성을 부여하거나 무조건 정당화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어떤 '움직임'을 만들고 있다는 것은 진보정치 부활의 필요조건이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면 진보는 더 이상 진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많은 흐름, 더 다양한 목소리에서 진보정치의 새로운 희망을 찾아보려는 시도가 부질없지 않은 이유다.

덧붙이는 글 | * 이 집담회는 박정환, 강종구, 정용일, 이상범, 김은희, 박래훈, 강시원, 안영선, 오은혜, 정규식, 김보연, 윤지선, 이승철, 홍기웅, 홍명근님의 후원으로 진행되었습니다.
* 속기·정리: 정경윤, 장소후원 : 용인 '당신의 부엌'




2013년 6월 11일 화요일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 대단결 10대 강령

재봉틀
http://blog.daum.net/kwank99/4444674 복사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 대단결 10대 강령>


  북한은 1993년 4월 7일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5차 회의에서 그 동안 통일관련 주장들을 종합하여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을 채택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전민족의 대단결로 자주적이고 평화적이며 중립적인 통일국가를 창립하여야 한다.
  2. 민족애와 민족자주정신에 기초하여 단결하여야 한다.
  3. 공존, 공영, 공리를 도모하고 조국통일 위업에 모든 것을 복종시키는 원칙에서 단결하여야 한다.
  4. 동족사이에 분렬과 대결을 조장시키는 일체 정쟁을 중지하고 단결하여야 한다.
  5. 북침과 남침, 승공과 적화의 위구를 다같이 가지고 서로 신뢰하고 단합하여야 한다.
  6. 민주주의를 귀중히 여기며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하여 배척하지 말고 조국통일의 길에서 
      함께 손잡고 나가야 한다.
  7. 개인가 단체가 소유한 물질적, 정신적 재부를 보호하여야 하며 그것을 민족대단결을 도모하는데 
      이롭게 이용하는 것을 장려하여야 한다.
  8. 접촉, 래왕, 대화를 통하여 전민족이 서로 이해하고 신뢰하며 단합하여야 한다.
  9.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북과 남, 해외의 전민족이 서로 련대성을 강화하여야
10. 민족대단결과 조국통일 위업에 공헌한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조선중앙연감) (1993. 4. 7)


[북측자료]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
  글쓴이 : 남측본부     날짜 : 06-08-10 17:52     조회 : 1784    
  트랙백 주소 : http://tongil-i.net/2006/bbs/bbs/tb.php/data1/166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
  -1993년 04월 06일   김일성   

    근 반세기에 걸치는 분단과 대결의 력사를 끝장내고 조국을 통일하는것은 온 민족의 한결 같은 요구이며 의지이다.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서는 전 민족이 대단결하여야 한다. 민족의 운명을 우려하는 사람이라면 북에 있건 남에 있건 해외에 있건, 공산주의자이건 민족주의자이건, 무산자이건 유산자이건, 무신론자이건 유신론자이건 모든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 단결하여야 하며 조국통일의 길을 함께 열어 나가야 한다.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고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고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여 모두다 나라의 통일과 통일된 조국의 륭성번영을 위하여 특색 있는 기여를 함으로써 민족분렬을 끝장내고 통일된 7천만 겨레의 존엄과 영예를 세계에 떨쳐야 한다.

    1. 전 민족의 대단결로 자주적이고 평화적이며 중립적인 통일국가를 창립하여야 한다.

    북과 남은 현존하는 두 제도, 두 정부를 그대로 두고 각당, 각파, 각계각층의 모든 민족성원들을 대표할수 있는 범민족통일국가를 창립하여야 한다. 범민족통일국가는 북과 남의 두 지역 정부가 동등하게 참가하는 련방국가로 되여야 하며 어느 대국에도 기울지 않는 자주적이고 평화적이며 쁠럭불가담적인 중립국가로 되여야 한다.

    2. 민족애와 민족자주정신에 기초하여 단결하여야 한다.

    전 민족은 각자의 운명을 민족의 운명과 하나로 련결시켜 민족을 열렬히 사랑하고 민족의 자주성을 생명으로 지키려는 하나의 뜻으로 단결하여야 한다. 우리 민족의 존엄과 긍지를 가지고 민족의 주체의식을 좀 먹는 사대주의와 민족허무주의를 배격하여야 한다.

    3. 공존, 공영, 공리를 도모하고 조국통일위업에 모든것을 복종시키는 원칙에서 단결하여야 한다.

    북과 남은 서로 다른 사상과 리념, 제도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서로 침해하지 말고 함께 진보와 번영을 누려 가야 한다. 지역적, 계급적리익에 앞서 전 민족의 리익을 도모하여야 하며 모든 노력을 조국통일위업을 이룩하는데 기울여야 한다.

    4. 동족사이에 분렬과 대결을 조장시키는 일체 정쟁을 중지하고 단결하여야 한다.

    북과 남은 대결을 추구하거나 조장하지 말아야 하며 모든 형태의 정쟁을 중지하고 비방중상을 그만두어야 한다. 동족끼리 적대시하지 말고 민족의 힘을 합쳐 외세의 침략과 간섭에 공동으로 대처하여야 한다.

   5. 북침과 남침, 승공과 적화의 위구를 다같이 가시고 서로 신뢰하고 단합하여야 한다.

    북과 남은 서로 상대방을 위협하지 말아야 하며 침략하지 말아야 한다. 서로 상대방에 자기의 제도를 강요하려 하지 말아야 하며 상대방을 흡수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6. 민주주의를 귀중히 여기며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하여 배척하지 말고 조국통일의 길에서 함께 손 잡고 나가야 한다.

    통일론의와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여야 하며 정치적반대파라고 하여 탄압, 보복, 박해, 처벌하지 말아야 한다. 친북, 친남을 시비하지 말아야 하며 모든 정치범을 석방, 복권시켜 조국통일위업에 함께 이바지하게 하여야 한다.

    7. 개인과 단체가 소유한 물질적, 정신적재부를 보호하여야 하며 그것을 민족대단결을 도모하는데 리롭게 리용하는것을 장려하여야 한다.

    통일되기전에는 물론, 통일된 후에도 국가적소유, 협동적소유, 사적소유를 인정하고 개인 또는 단체의 자본과 재산, 외국자본과의 공동리권을 보호하여야 한다. 과학, 교육, 문학, 예술, 언론, 출판, 보건, 체육을 비롯한 모든 부문에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명예와 자격을 인정하며 공로자가 받고 있는 혜택을 계속 보장하여야 한다.

    8. 접촉, 래왕, 대화를 통하여 전 민족이 서로 리해하고 신뢰하며 단합하여야 한다.

    접촉과 래왕을 가로 막는 온갖 장애물을 제거하고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래왕의 문을 열어 놓아야 한다. 각당, 각파, 각계각층에게 동등한 대화의 기회를 주어야 하며 쌍무적, 다무적대화를 발전시켜야 한다.

    9.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북과 남, 해외의 전 민족이 서로 련대성을 강화하여야 한다.

    북과 남, 해외에서 조국통일에 유익한것은 편견없이 지지성원하고 해로운것은 함께 배격하여야 하며 각자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 나 서로 보조를 같이 하고 협조하여야 한다. 조국통일을 위한 애국사업에서 북과 남, 해외의 모든 정당, 단체와 각계각층의 동포들이 조직적으로 련합하여야 한다.

    10. 민족대단결과 조국통일위업에 공헌한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민족대단결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공을 세운 사람들, 애국렬사들과 그 후대들에게 특혜를 베풀어야 한다. 지난 날 민족을 배반하였던 사람들도 과거를 뉘우치고 애국의 길에 나서면 관용으로 대하며 조국통일에 이바지한 공로에 따라 공정하게 평가하여야 한다.

2013년 5월 25일 토요일

박헌영은 정말로 미국의 간첩이었나?

박헌영은 정말로 미국의 '간첩'이었나
[해방일기] 1946년 7월 5일     김기협 역사학자

1946년 7월 5일

1953년 3월 21일 북한 외무상 박헌영이 체포되었다. 이승엽 등 관련 인물들은 그 해 7월에 기소되었는데, 수괴로 지목된 박헌영은 1955년 12월에야 기소되었다. 죄목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전복 음모와 미제국주의자들을 위한 간첩 행위"였다. 기소장에 기록된 그의 '진술' 가운데 간첩 행위와 관련하여 이런 대목이 있다.

1945년 11월 초순에 나는 남조선 주둔 미군 사령관 하지를 서울 반도호텔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습니다. 그 사무실에는 하지와 그리고 이미 오래 전부터 나하고 간첩 연계를 맺고 있던 언더우드가 있었습니다. 이때 하지와 언더우드는 나를 반가이 맞이하여 주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자기의 사령관인 하지에게 향하여 나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1939년 10월부터 알게 되었는데 그때에 이미 친미적으로 나아가겠다고 언약한 바 있습니다"라고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하지도 나에게 대하여서는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나의 활동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 석상에서 정식으로 하지의 간첩으로 될 것을 약속하고 난 다음 하지에게 다음과 같은 과업을 수행할 데 대한 지시를 받았습니다.

즉 하지는 나에게 앞으로 "당신의 세력을 규합하고 남조선 공산당 내에서 지위를 튼튼히 하기에 노력할 것이며 북조선지역 공산당 조직 내부에 당신의 세력을 적극 부식시킬 것, 공산당 내에서의 일체 활동에 대하여 중요하다고 보는 것은 사전에 알려줄 것이며 공산당 내에서 호상 분열 사상을 조성시킬 것, 우리와의 관계가 나타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공산당을 합법적인 방법으로 타협적으로 나아가도록 지도하며 친미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다. 조선 사람은 일본 시대에 비합법적 투쟁과 폭동 파업 등의 방법으로 나아가서 분쟁을 많이 일으켰는데 미국 사람들 앞에서는 그러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렇게 앞으로의 활동 방향에 대하여 강조하였습니다. 나는 이에 대하여 그렇게 하겠노라고 언약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언더우드는 나에게 앞으로 자기는 나와 더 만나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알아달라고 말하기에 나도 좋다고 대답하고 나의 이러한 관계에 대하여 비밀에 붙여 주기 바란다고 제의하니 그는 그에 대하여서는 안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비밀 회견은 한 시간 이상 계속되었으며 통역은 언더우드가 직접 하였습니다. (<박헌영 노선 비판>(김남식·심지연 편저, 두리 펴냄), 463~464쪽에서 재인용)

여기 나오는 언더우드는 원두우-원한경-원일한 3대(代) 선교사의 중간인 원한경(元漢慶, 1890~1951년)이다. 1930년대에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지내고 미일 전쟁 발발로 쫓겨 갔다가 군정청 고문으로 임명받아 1945년 10월 26일 조선에 돌아왔다.

박헌영의 재판은 권력 투쟁의 산물이므로 공정한 재판일 수 없는 것이었고, 그의 혐의나 '진술'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럴싸하게 만들기 위해 애를 썼을 것도 또한 당연한 일이다. 1945년 11월 초의 만남도 그 자체가 조작된 것일 리는 없고 실제로 있었던 비밀 회동의 내용을 어느 정도 윤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 기소장에는 박헌영이 1939년 10월 "당시 서울 연희전문학교 교장이었으며 선교사로 가장한 미국 정보기관의 노련한 탐정인 언더우드"와 연계를 맺고 미국의 고용 간첩으로 전락되었다고 했다. 출옥 직후의 박헌영이 항일 운동에 동정적이던 언더우드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언더우드가 군정청 고문 취임 직후 공산당 총비서 박헌영과 하지의 비밀 회동을 주선한다는 것도 있을 법한 일이다.

임경석의 <이정 박헌영 일대기>(역사비평사 펴냄) 225~227쪽, 239~240쪽에 따르면 박헌영과 하지의 첫 번째, 두 번째 만남은 1945년 10월 27일과 11월 15일이었다고 한다. 기소장에서 말한 11월 초순의 모임이 10월 27일의 모임을 가리킨 것 같지는 않다. 언더우드가 바로 그 전날 입국했는데, 그렇게 빨리 움직였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첫 만남이 큰 성과 없이 끝난 것을 언더우드가 나중에 알고 보완을 위한 비밀 회동을 주선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자리에서 간첩 고용 계약이라도 맺은 것처럼 주장하는 기소장 내용은 터무니없는 것이지만, 비밀 회동이라면 뭔가 비밀 거래는 있었음직한 일이다. 군정청과 공산당 사이의 거래가 아니라 그 관리자인 하지와 박헌영 사이의 거래가 가능했다. 두 조직의 관리권(executive power)을 가진 두사람 사이의 양해 관계는 두 사람 모두에게 이득을 줄 수 있었다. 정보의 공유만 하더라도 관리자의 역할에 크게 보탬이 되는 것이었고, 행동의 조율을 통해서는 더 큰 이익을 바라볼 수 있었다.

박헌영이 공산당에서 강한 지도력을 유지하는 데는 하지와의 비선(秘線)도 한 몫을 맡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기소장의 주장처럼 공산당을 팔아먹는 짓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나름대로는 당을 위한 행동이었다 하더라도, 이런 비밀 거래는 편의주의에 빠질 위험이 크다. 자신의 이익이 곧 당의 이익이라는 믿음을 가지면 당의 이익보다 자기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기 쉽다는 말이다.

김남식과 심지연은 1946년 9월 6일의 체포령(박헌영 등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미군정의 체포령)을 계기로 박헌영의 미국에 대한 태도가 전반부의 '우의적 친선 방향'에서 후반부의 '적대적 대립 방향'으로 옮겨간다고 본다.

미국과 미군정에 대해 박헌영은 일관된 견해를 갖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도에 정반대로 태도를 바꾸어 많은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즉 46년 9월 체포령을 계기로 그의 견해는 우의적 친선 방향에서 적대적 대립 방향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체포령을 내린 군정 당국에 대한 보복 심리에서 나온 조치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미국을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호칭하는 등 마르크스 레닌주의적 이론 무장에 미흡해 "객관세계를 분석함에 있어서도 공산주의적 관점과 시각에서 일탈할 수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박헌영 노선 비판>, 76쪽)

1946년 봄까지 박헌영과 공산당이 미국과 미군정에 대한 직접 공격을 삼가고 미군정의 조선인 관리들과 경찰이 미군정의 노선을 벗어나는 행동을 한다고 비난했다. 미군정과의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전술적 고려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미군정의 이미 드러난 의도에 대해서까지 너무 눈을 감은 느낌이 든다. 지나치게 유화적인 태도가 공산당의 활동 노선 설정에까지 지장을 준 것으로 많은 비난을 모았다. 박헌영이 진짜 간첩 노릇까지는 아니더라도 당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미군정과 비밀 관계를 갖고 있었으리라는 의심을 일으키는 점이다.

공산당과 미군정 사이의 관계는 5월 초순 미소공위 정회와 함께 결정적인 악화의 길에 들어섰다. 5월 6일 정판사 사건수사가 벌어졌고 이튿날 미군 방첩대(CIC)가 조봉암의 편지를 공개했다. 미군정이 좌우 합작 지원 방침을 결정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미군정이 원하는 방향으로 좌우 합작을 진행시키기 위해 공산당이 좌익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상황을 깨뜨리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정판사 사건으로 수배되었던 공산당 재정부장 겸 총무부장 이관술이 7월 6일 체포되었다. 이를 계기로 사건 처리가 빨라져 7월 9일에 이관술을 제외한 12인이 검찰로 송국되었고, 7월 19일 9인이 기소되었다. 김용린 검사장은 '사건 전모'를 이렇게 발표했다.

1) 조선정판사 사건 관계자 급 범죄 사실

조선정판사 사장(조선공산당원) 박락종 동 서무과장(조선공산당원) 송언필 동 인쇄주임(조선공산당원) 신광범 동 창고주임(조선공산당원) 박상근 동 평판과장(조선공산당원) 김창선 동 평판부과장(조선공산당원) 정명환 동 인쇄직공(조선공산당원) 김상선 동(조선공산당원) 김우용 동(조선공산당원) 홍계훈

상 박락종 송언필 신광범은 작년 9월에 부내 장곡천정 74번지 근택삘딩을 접수하여 동소에서 경영하던 근택인쇄소를 조선정판사라 개칭하고 인쇄업을 경영하였는데 김창선 외 수명은 일정 시대 근택인쇄소 직공 재직 시 관헌의 명령으로 조선은행권을 인쇄한 사실이 있고 또 동 인쇄원판을 절취 소지함을 기화로 하여 상 전원이 공모하여 공산당비 급 정판사 경영비에 사용하기 위하여 작년 10월 하순부터 금년 2월 상순까지 수회에 긍하여 상 정판사 내에서 조선은행권 100원 권 1200만 원을 위조하여 조선공산당본부 재정부장 이관술에게 교부 사용케 하여서 경제를 교란케 (…)

(<동아일보> 1946년 7월 20일자)

용의자들이 검찰로 송국된 직후 7월 11일자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공산당의 혐의를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맹렬히 규탄했다. 그러나 이 사설의 마지막 문단을 보며 쓴웃음을 금할 수 없다. 뒷골이 당기기는 당긴 모양이다.

"지금까지에 알려진 내용은 경찰의 활동에 의한 군정 당국의 발표를 중심으로 한 사실뿐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이상의 논단을 내리기에는 충분한 재료가 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못 일부의 □□ 추측과 같이 사건이 어떠한 정치적 작위 하에서 경찰이 강작하였거나 위작한 사실이 판명된다 할진대 우리는 경찰을 과신한 우리의 불명과 군정 당국의 발표에 의거한 우리의 불찰을 천하에 사죄하는 동시에 그 사건의 중추를 해부하여 이 붓이 꺾일 때까지 규명할 것을 엄숙히 공약하는 바이다."

2013년 5월 24일 금요일

박헌영은 이론가가 아니라 책략가였다!


박헌영은 이론가가 아니라 책략가였다!

[프레시안 books] <박헌영 트라우마> 서평에 대한 반론

김기협 역사학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5-24 오후 6:26:38
    
     
이 글은 손석춘의 책 <박헌영 트라우마>(철수와영희 펴냄)에 대한 비평이 아니다. 그 책에 대한 안재성의서평 '김일성 대신 그이가 북한의 지도자였다면?'(☞바로 가기 : 김일성 대신 그이가 북한의 지도자였다면?)에 대한 비평이다. 짧은 글 한 꼭지에 비평을 단다는 것이 좀 어색한 일이기는 하지만, 안재성이 남로당 인물들에 대한 조사와 서술을 많이 해온 분이라는 점에서(<박헌영 평전>(실천문학사 펴냄)도 썼다) 서평에 나타난 그의 관점을 점검할 필요를 느낀다.

그는 글머리에서 "박헌영과 절친하던 소련의 역사학자 샤브시나 여사"의 증언을 재인용함으로써 박헌영에 대한 애정을 밝혔다.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고 본다. 샤브시나는 해방 당시 서울에 주재하는 소련 부영사의 부인이었는데, 그의 기록 <1945년 남한에서>(김명호 옮김, 한울 펴냄)을 보면 매우 편파적인 기록자다. 해방 직후 상황의 외국인 목격자로서 그의 기록을 내 <해방일기>(너머북스 펴냄) 작업에 많이 활용하고 싶었지만 심한 편파성 때문에 가치가 적었다.

▲ <박헌영 트라우마>(손석춘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 ⓒ철수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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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을 일방적으로 미화한 샤브시나의 묘사를 글머리에 옮겨놓은 데서부터 박헌영을 높이 평가하려는 안재성의 의지가 확인되고, 이 의지가 글 전체를 관통한다. 때로는 박헌영을 높이 평가해 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으로까지 나타난다.

예컨대 그는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 아니라고 단언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남한 진보지식인들의 이러한 무지와 편견 혹은 기회주의적 측면"이라고 여지없이 매도한다. 이런 가혹한 비판을 하면서 그 대상을 명확히 표시하지 않는 것은 올바른 비판의 태도가 아니다.

나는 비록 진보지식인도 아니고 박헌영에 관해 깊은 연구를 쌓지 못한 사람이지만, 최근 3년간 해방공간의 상황을 넓고 깊게 살피려 애써 온 사람으로서 박헌영에 대한 안재성의 평가를 수긍하지 않는 이유를 나름대로 밝히고 싶다.

안재성은 글 끝에서 박헌영은 1945년 11월 30일 방송 연설이 "합리적이고도 감동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고 극찬하며 독자들에게 읽어보기를 권하는데, 나는 그에게 공산당-남로당 외의 그 무렵 다른 연설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듣기 좋기로 그만 못한 연설을 찾기 힘들 것이다. 정태식이 대독한 이 연설에는 당시 좌익에서 누구나 주장하던 상식적 내용을 넘어서는 것이 없다.

말보다 실천이 중요하다. 이 연설에서 박헌영은 6개 강령을 제창했는데, 그 대부분을 박헌영 자신이 행동에서 등진 것으로 나는 본다. 예컨대 제5조는 '정론 논쟁의 올바른 수단 방법'인데 박헌영이 이끄는 공산당-남로당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태를 많이 보였다. 그리고 제6조는 '각 정당은 주의 강령이 동일할 것 같으면 단일 정당으로 통일할 것'인데, 1946년 여름에서 가을에 걸친 좌익 합당 과정에서 박헌영 일파는 극히 패권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손석춘은 책 8쪽에서 "심지어 박헌영은 미제의 간첩이라고 부르짖는 진보세력도 남쪽에 나타났다"고 했는데 그런 주장을 내가 살펴본 것은 없다. 하지만 '간첩죄'의 일부분은 사실일 것 같다는 생각을 박헌영의 행적을 더듬어 오며 나는 갖게 되었다.

예컨대 그의 '월북'을 둘러싼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46년 9월 7일 미군정은 박헌영을 비롯한 공산당 간부들의 체포령을 내렸고, 떠들썩한 체포 작전으로 서울 시내가 발칵 뒤집혔다. 박헌영은 잠적했다가 몇 주일 후 몰래 38선을 넘었다. 그 직후에 공산당이 남로당으로 개편되었는데 허헌이 명목상 위원장을 맡은 남로당을 박헌영은 해주에서 지도했다.

9월 7일의 체포령이 경찰 아닌 군정사령부 쪽에서 나온 것부터 이상한 일이다. 당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기자들에게 "이번 사건은 경찰에서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상부명령으로 경찰이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수배 이유는 미군정 비방으로 포고령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당시 비슷한 혐의로 체포된 이주하는 공안방해죄로 8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런 사소한 혐의로 공산당 대표를 체포한다는 것은 미군정에게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좌익 지도자 입장에서는 체포를 당하고 법정투쟁과 선전공세를 펴는 것이 자연스러운 길이었다. 손석춘은 책 189쪽에 1946년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불법화했다고 적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박헌영 자신에게 북쪽으로 넘어갈 동기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서울이 모든 면에서 조선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공산당도 서울에 당 중앙이 있었고 박헌영이 그것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소련의 직접 지원을 받는 이북에선 공산주의 세력의 성장이 원활했다. 박헌영은 해방 직후 서울에 오자마자 소련영사관에 매달려 활동의 근거로 삼았는데 이북 주둔 소련군은 영사관보다 비교가 안 되게 더 큰 지원 통로가 되었다. 1946년 7월 김일성과 함께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을 만났을 때 박헌영은 소련의 지원을 놓고 경쟁하기 위해 이북에 가 있을 필요를 느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상황에서 체포령은 마치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려준 격이었다. 그래서 박헌영과 미군정 핵심부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 사령관과 박헌영의 초기 만남을 둘러싼 의문도 이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

임경석의 <이정 박헌영 연대기>(이정박헌영기념사업회 엮음, 역사비평사 펴냄)에 의하면 두 사람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만남은 1945년 10월 27일과 11월 15일에 있었다. 그런데 박헌영의 기소장에는 11월 초순 언더우드와 함께 하지를 만난 일이 적혀 있다. 언더우드(원한경)는 10월 26일에 사령관 고문으로 조선에 부임했는데, 해방 전에 박헌영에게 도움을 준 일이 있다고 한다. 박헌영 기소장에는 언더우드가 "선교사로 가장한 미국 정탐기관의 노련한 탐정"으로 지목되어 있다.

사령관 고문으로 막 부임한 언더우드가 아는 사이인 공산당 지도자와 사령관 사이의 비밀모임을 주선하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비선(秘線)을 유지함으로써 각자의 조직에서 관리자 역할에 도움을 주고받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약간의 정보 교환만 해도 하지에게는 좌익의 동향 파악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박헌영에게는 좌익의 헤게모니 장악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생각하면 박헌영의 항일투쟁 경력에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그가 똥을 집어먹는 등 정신병자 행세로 병보석을 받은 얘기를 손석춘이 책 앞머리에 적었는데,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같은 사건으로 수감된 죄수들 가운데 옥사한 사람은 있어도 병보석은 박헌영 하나뿐이었다. 병이 나면 감옥 안에서 죽게 놔두지, 풀어주지는 않는 상황에서 죽을병도 아닌 정신병으로 병보석? 그리고 병보석으로 나온 몇 달 후에 해외탈출 성공? 일제당국과 사이에도 어떤 교감이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 증거는 없지만 합리적 의심이다.

▲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박병엽 지음, 정창현·유영구 엮음, 도서출판선인 펴냄). ⓒ도서출판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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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말하지만 이 글은 손석춘의 책이 아니라 그에 대한 안재성의 리뷰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재성 글의 근거를 확인하기 위해 손석춘의 책도 대충 훑어보았는데 양쪽 모두에 해당되는 문제 하나를 지적해야겠다. 보천보 얘기다.

안재성은 '보천보'가 어느 작은 마을에 있는 둑 이름이라고 했다. '보천洑'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데 사실 '보천堡'는 면소재지 급의 마을 이름이다. 어떻게 이런 착오가 나왔는지 궁금해서 손석춘 책을 뒤져보니 78쪽에 실린 원경의 발언 내용이다. 물론 문제의 초점은 보천보 전투의 주인공이 김일성이냐 여부에 있는 것이지만 기본 팩트는 정확하게 제시해야 독자의 신뢰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원경의 잘못된 생각을 아무 여과 없이 독자에게 전한 것은 두 분 모두에게 아쉬운 일이다. '프레시안 books' 편집자에게도 아쉬운 일이다.

현실에서 좌절을 겪은 인물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박헌영을 높이 평가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손석춘이 책 뒤에 '8월 테제'를 붙여놓은 것은 이것이 그가 이론적 지도자 자격을 얻은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중석은 '8월 테제'의 "많은 부분이 12월 테제의 번안이라고 판단될 정도"라고 평했다.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펴냄), 236쪽)

12월 테제는 1928년 제6차 코민테른의 비타협적 노선에 따른 것이었다. 1935년의 제7차 코민테른에서는 연대를 중시하는 쪽으로 노선이 바뀌었다. 그런데 박헌영이 제7차 코민테른의 노선을 해방 때까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바로 샤브시나의 증언으로 알아볼 수 있다.

재건위원회에서 정치노선을 작성할 때 박헌영은 우리 영사관 도서관에 자료 특히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 관련된 자료를 여러 번 의뢰하곤 하였다. (임경석, <이정 박헌영 연대기> 214~215쪽에서 재인용)

해방 직후 서울 시내 여기저기 "박헌영 선생은 어서 나타나 우리를 지도해 주시오!" 하는 벽보가 나붙어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 나는 박헌영의 지도력이 '8월 테제'보다 이런 책략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비밀을 좋아하는 책략가였다는 사실은 그의 행적 어느 대목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다.

박헌영의 책략가 성향이 민족사회나 좌익 전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가 이끈 공산당과 남로당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현시적 효과를 위해 당의 역량과 인민의 신뢰를 지나치게 소진시켰다는 지적은 널리 제기되어 왔다. 한국전쟁 발발에 대한 그의 책임도 그 연장선 위에서 거론되는 것이다. 그가 실제로 행사한 권력보다 더 큰 권력을 쥐었을 경우 이 민족에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나는 상상할 수 없다.

안재성의 저술을 내 작업에 고마운 마음으로 많이 활용해 왔지만, 근거 없는 생각을 너무 앞세우지 말아야 독자의 신뢰와 이해를 더 잘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번 글이 특히 그랬다.

박병엽의 진술을 안재성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하다. 노동당 간부 출신으로 남한에서 여생을 보낸 박병엽의 회고 내용이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2책, 중앙일보사 펴냄)에서는 '서용규'라는 가명으로 소개되었고, 최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도서출판선인 펴냄)과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도서출판선인 펴냄)에서 본명으로 나타났다. 나는 <해방일기> 작업 중 많은 장면에서 그의 진술이 정황에 부합한다는 판단을 내렸는데, 아마 안재성은 나랑 다른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2013년 3월 30일 토요일

[전문] 조선중앙통신 '정부·정당·단체 특별성명'


[전문] 조선중앙통신 '정부·정당·단체 특별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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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장은지 기자 = 북한은 30일 '정부·정당·단체 특별성명'을 발표하고 "이 시각부터 북남관계는 전시상황에 들어가며 따라서 북남 사이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는 전시에 준하여 처리될 것"이라고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밝혔다.

다음은 성명 전문.

우리의 자주권을 유린하고 나라의 최고리익을 침해하는 미제의 반공화국침략책동이 극히 엄중한 단계에 들어선 것과 관련하여 백두의 천출명장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께서는 조선인민군 전략로케트군 화력타격임무수행과 관련한 작전회의를 긴급소집하시고 화력타격계획을 최종 검토, 비준하시였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내리신 중대결심은 세기를 넘어 이어온 미국과의 대결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전환적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판가리싸움의 선언으로서 미국과 괴뢰패당을 비롯한 반통일적대세력에 대한 최후경고이며 우리 군대와 인민의 멸적의 의지를 담은 정의의 최종결단이다.

지금 우리의 영용한 인민군 장병들과 전체 인민들은 미제의 무모한 전쟁도발책동에 치솟는 격분을 금치 못하면서 경애하는 원수님의 중대결단을 받들어 원쑤들과의 결사항전에 산악같이 일떠서 조국통일대전의 최후승리를 이룩하고야말 불타는 결의에 넘쳐있다.

미국과 괴뢰패당의 북침전쟁책동이 최극단에 이르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는 이미 성명을 통하여 나라의 자주권과 최고 존엄을 수호하기 위한 우리 군대와 인민의 단호한 군사적 대응의지를 내외에 엄숙히 선언하였다.

미국이 우리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핵전략폭격기 《B-52》를 남조선지역 상공에 들이민데 이어 미국 본토에 있는 스텔스전략폭격기 《B-2A》를 비롯한 최첨단전략 타격수단까지 남반부 상공에 깊숙이 진입시켜 우리를 겨냥한 폭격훈련을 강행한 것은 용납할수 없는 극악무도한 도발이며 공공연한 도전이다.

미국의 무모한 북침핵전쟁소동에 편승하여 괴뢰패당은 《선제타격》과 《강력한 응징》을 떠들다못해 그 무슨 《지휘세력타격》과 지어 우리의 최고 존엄의 상징을 감히 어째보려는 기도까지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미제의 강도적인 침략야망과 괴뢰역적패당의 북침기도가 도를 넘어섰으며 위협공갈단계로부터 무모한 실전단계에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조성된 험악한 정세는 미제와 괴뢰패당과는 말로 할 때가 지났으며 오직 선군총대로 단호히 결산하여야 한다는 최고사령부의 판단과 결심이 천만번 정당하다는것을 더욱 명백히 실증해준다.

지금 미국과 괴뢰호전광들은 이번 《B-2A》스텔스전략폭격기의 핵폭탄 투하연습에 대해 《북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느니,《방어훈련》이라느니,《동맹국의 리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느니 하고 떠들지만 그것은 저들의 침략적 정체를 덮어놓고 내외여론의 비난을 회피하며 우리의 불벼락을 모면하기 위한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이 핵무기를 휘두르며 힘의 정책에 매달리던 시대는 영원히 지나갔다.

미제의 핵공갈에는 무자비한 핵공격으로, 침략전쟁에는 정의의 전면전쟁으로! 바로 이것이 우리의 단호한 대답이며 억척불변의 립장이다.

천하제일 명장이신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의 시대에는 모든 것이 다르다는 것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이제 적대세력들은 선군조선이 없는 지구는 존재할수 없다는 백두령장의 철의 의지와 무비의 담력, 무서운 본때를 몸서리치게 맛보게 될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판가리결전의 최후시각은 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정당, 단체들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작전회의에서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내리신 최종결단과 최고사령관의 최후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천만군민의 한결같은 의지를 담아 다음과 같이 엄숙히 천명한다.

1. 이 시각부터 북남관계는 전시상황에 들어가며 따라서 북남사이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은 전시에 준하여 처리될것이다. 조선반도에서 평화도 전쟁도 아닌 상태는 끝장났다.

우리 혁명무력이 실제적인 군사행동에 진입한 조건에서 북남관계도 자동적으로 전시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북남사이에서 우리의 존엄과 자주권을 조금이라도 해치는 그 어떤 도발적 행위에 대해서도 예고없이 즉시 단호한 물리적 행동으로 사정을 보지 않고 무자비하게 징벌할 것이다.

2. 미국과 괴뢰패당이 서해 5개섬이든 군사분계선 일대이든 그 어느 지역에서든지 북침전쟁의 불을 지르기 위한 군사적 도발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국지전으로 한정되지 않을 것이며 전면전쟁, 핵전쟁으로 번져지게 될것이다.

미국이 하와이와 괌도를 비롯한 태평양상의 군사기지들과 본토에 있는 핵전략폭격기까지 남조선지역 상공에 들이밀어 북침핵전쟁책동을 광란적으로 벌리는 조건에서 조선반도에서 그 어떤 군사적 충돌도 전면전쟁, 핵전쟁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우리 혁명무력의 첫 타격에 미국본토와 하와이, 괌도를 비롯한 태평양작전전구안의 미제침략군기지들이 녹아나고 남조선주둔 미군기지들은 물론 청와대를 비롯하여 괴뢰통치기관들과 괴뢰군기지들도 동시에 초토화되며 침략자, 도발자들은 씨도 없이 불타 재가루로 될 것이다.

3. 우리는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고 조국통일대전의 최후승리를 이룩할 것이다. 우리의 조국통일대전은 3일 대전도 아니며 미국과 괴뢰호전광들이 미처 정신을 차릴 사이없이 단숨에 남조선 전지역과 제주도까지 타고앉는 벼락같은 속전속결전, 하늘과 땅, 바다는 물론 전방과 후방이 따로없는 립체전으로 될 것이다.

이 성스러운 정의의 대전은 북과 남, 온겨레가 참가하는 거족적인 전민항쟁으로서 그앞에 극악한 대결광신자들과 호전광들, 인간쓰레기들을 비롯한 민족반역자들은 가차없이 벌초대상이 될 것이다.

정의의 조국통일대전에 일떠선 우리 군대와 인민, 온 민족의 의지와 힘을 막을 자 이 세상에 없다.

백두산 절세위인들의 위대한 영상을 높이 모신 우리 민족은 세기와 세기를 이어오며 쌓이고 쌓인 한과 숙원을 가슴 후련히 풀고 조국통일의 찬연한 새날을 기어이 안아옴으로써 이 땅에 천하제일강국을 반드시 일떠세우고야 말 것이다.

주체102(2013)년 3월 30일
평 양.

2013년 3월 29일 금요일

2013년 3월 30일...역사에 기록될 전시상황

한시간동안의 설겆이전쟁이 그릇 몇개를 남겨놓고 끝났다.기름기가 너무많아 ..물에 불려 놓음..
외세의 개입으로 한국전쟁은 500만명의 사망이라는 근현대사에 최악의 전쟁으로 남겨놓고 원점에서 끝났고 , 찝짭한 상태의 휴전으로 60년이 지났다. 뭔가 마무리 되지 못한.. 초유의 60년간 휴전 이제 끝났다.

2013년 3월 30일...역사에 기록될 전시상황

선언 이제 마무리 되어야 한다.

이 불완전한 상황이... 북미중 평화협정과 북미수교로..

남한은 뭘해야 하는가!! 바로 중재다!! 정신줄 바로 챙겨라 이땅의 진보민주세력이여!!

민주당 정신 차려!!!

2012년 11월 13일 화요일

[소설가 김갑수 선생님의 글] 김지하는 변한 것일까 아니면 본색을 드러낸 것일까

김지하는 변한 것일까 아니면 본색을 드러낸 것일까

시인 김지하가 박근혜 후보 지지발언을 한 것이 화제가 되고 있다. 김지하는 불과 한두 달 전까지 자기 입으로 칭찬했던 안철수에 대해서는 ‘깡통’이라는 표현으로 비하했다. 주지하듯이 김지하는 박정희 독재에 저항한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이럴 때 흔히 “그 사람이 그럴 줄(은) 몰랐다.”고 반응한다. 이 말에는 ‘그 사람이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갑자기 변했다’는 판단이 전제되어 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작은 의문에 휩싸여든다. 과연 그 사람이 갑자기 변한 것일까?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인데 이제야 본색을 드러낸 것일까? 내 능력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점은 사람이란 ‘쉽게 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사람의 과거와 이면사를 정밀히 들여다보면 벌써부터 그럴 소지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수가 많다. 사실 김지하의 변화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1980년대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변화의 징후를 명백히 보여주었다.

나는 지난 번 글에서 유시민의 예를 들어 사람이 일찍 실명보다 큰 허명을 비주체적으로 얻어 유명인사가 될 때, 삶이 왜곡되기가 쉽고 그 결과 사회 문제와 관련하여 심각한 정신분열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말을 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김지하는 유시민보다 훨씬 더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다.

김지하는 불과 20대의 나이에 담시 <오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오해는 하지 마시라. 나는 <오적>의 저항적 가치를 과소평가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다만 <오적>의 창작이 예술가 김지하의 자발적 원망(願望)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밝히고 싶은 것이다. 오적, 즉 다섯 도적은 당시 사회에 널리 알려진 소문이었는데, 이를 착안한 <사상계> 편집장 김승균이 5·16 특집을 기획했다가 급한 사정이 생겨 3일 만에 김지하에게 쓰도록 청탁한 것이었다. 김지하는 <오적>의 창작 계기를 묻는 질문에 “산이 있으니까 오르듯이, 오적이 있으니까 오적을 썼다”고 아리송하게 답한 적이 있다. 이럴 때 김승균 편집장의 아이디어로 썼다고 답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을는지.

다음으로 우리가 김지하와 함께 떠올리는 것은 시 <타는 목마름으로>이다. 이 시는 노래로 만들어져 운동권 가요의 필두에 위치했다. 다음 두 편의 시 구절을 읽어 보자.

나의 학습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책장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자유여.
- 엘뤼아르의 시 <자유> 중에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 김지하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 중에서

김지하의 시는 엘리아르의 시를 참조한 것 같다. 예술 창작에서 표절과 인유(다른 작품을 참조)는 다르다. 표절이 되지 않으려면 다른 이의 것을 인유했다는 점을 ‘공공연’하고 ‘명백’하게 밝혀야 하는데 김지하는 <타는 목마름으로>를 발표하면서 웬 일인지 그렇게 하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

김지하의 또 다른 유명한 글로 <옥중양심선언>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도 사실은 고(故) 조영래 변호사의 창작이었다. 김지하는 노태우 시절 <조선일보>에 ‘젊은 벗에게 -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글을 전면으로 게재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나서, 일단 제목은 ‘젊은 벗에게’로 붙여놓고 실제로는 <조선일보> 독자를 겨냥해 쓴 교묘한 글이라는 느낌을 가졌다. 또한 생명의 가치는 지고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군부독재의 폭압 대신 학생의 화염병을 생명파괴의 주범으로 지목하는 대목에서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 김지하는 변한 것이 아니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 따름이다. 그는 노무현 서거 당시 봉하마을의 추모객들을 공산주의자들로 몰아붙였다. 참고로 그는 황석영, 손학규와 절친한 사이다. 그는 2009년 이명박과 어울리는 황석영을 적극 비호한 바 있다. 또 하나 더 참고로, 황석영은 소설가 조정래(앞의 조영래 변호사와 혼동 말기를)와 별로 사이가 안 좋다. 김지하가 갑자기 안철수를 ‘깡통’이라고 비하하게 된 것이 만에 하나 조정래가 안철수의 후원회장이 된 것과 관련된다고까지 보고 싶지는 않다. 아무튼 대한민국의 유명인사들 사이에 의외로 혈친주의가 강고하다는 점은 따로 지적하고 싶다.

2012년 11월 2일 금요일

[민족21] “우리나라 력대 국호들의 의미 모두 같다”

“우리나라 력대 국호들의 의미 모두 같다”
북 《통일신보》 기고|북 30대 공명성 역사학 박사의 최초 주장
《통일신보》 기자 webmaster@minjog21.com
34세의 나이에 조선사회과학원 력사학연구소 근대사 실장이 된 북의 차세대 역사학자 공명성 박사. 그는 우리 민족의 역대 국호 의미가 모두 동일하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담은 박사논문을 제출해 화제가 되었다. 그를 《통일신보》가 만났다.
홍영식 / 《통일신보》 기자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실장인 30대의 공명성(34) 박사는 최근 력사학계에 새별처럼 떠오른 전도 유망한 새세대 과학자이다.
대학 생활 5년, 연구사 생활 13년, 이것이 그의 경력이다.
그는 《조선고대사연구》 《조선력사사전》 《조선력사상식》 《조선대백과사전》 등 국보적 가치를 가지는 도서 집필에 참여하였고 30여 건의 론문들을 발표했다. 33살에 《조선력대국호연구》라는 박사론문을 발표하여 학계의 파문을 일으킨 것도 몇 달 전 일이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한 생이 걸려도 못다 할 큰 연구 성과들을 거둔 그 남다른 비결은 무엇일가.

언어해석학적 국호 해석 배격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에서 만난 공명성 박사.[통일신보]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를 찾은 기자는 정창규 소장(56)을 만났다.
소장은 “공명성 실장은 재능과 열정, 실력이 뛰여난 보배”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와 함께 공명성 실장의 방에 들어섰다. 크고 작은 책들과 원고더미들이 쌓인 곳에서 공명성 박사는 사색에 잠겨 있었다.
정창규 소장은 일단 연구에 몰두하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지 주위세계를 다 잊는 정열가가 공명성 실장이라고 말하였다.
‘정열 없는 천재란 없다’는 말이 그의 경우를 두고 하는 것 같았다. 청춘의 넋과 열정을 민족사 연구에 바쳐 가는 그의 진지한 탐구 자세와 불같은 열정에 연구 사업에서의 성공의 비결이 있는 것 같았다.
공명성 박사와 마주 앉았다. 보통 키에 다부진 체격, 둥구스름한 얼굴, 이악한 성미의 반영인 듯 곱슬진 머리. 리지적인 두 눈, 저도 모르게 그의 지성의 세계에 빠져드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기자에게 공명성 박사는 사양조로 말했다.
“사실 처음부터 박사론문을 쓸 의도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그가 《조선력대국호연구》라는 제목으로 론문을 쓰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7년 전인 1997년, 우리 나라 력대 국호들에 대한 외곡된 견해들을 바로잡고 주체적 관점에서 그 력사적 의미와 유래를 새롭게 밝히려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공명성 박사의 말.
“아마 가장 짧은 명칭 속에 가장 깊은 뜻이 담긴 말을 찾는다고 하면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국호일 것입니다. 국호에는 나라와 민족의 존엄과 영예가 집약적으로 반영되여 있습니다. 해당 나라 사람들의 시원과 념원, 신앙 그리고 세대를 이어 오며 개척해 온 슬기와 재능의 력사가 담겨 있지요. 이로부터 국호를 외곡하거나 말살하는 것은 결국 그 민족 자체를 말살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에 의하면 지난 시기 음흉한 목적을 추구하는 일본을 비롯한 일부 반동사가들에 의해 우리나라 력대 국호들이 외곡해석되여 왔다고 한다.
그들은 고구려라는 말이 몽골어나 퉁구스어로 해석된다느니, 백제라는 말이 만주어로 풀이된다느니, 발해라는 말이 녀진어의 ‘말갈’과 같다느니 하면서 국호에 대한 언어해석학적인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혈연적 단일성을 흐려 놓고 민족사의 유구성을 말살하려 했다.
단순히 학술적인 문제이기 전에 반만년 력사를 가진 슬기로운 우리 민족의 명예와 존엄과 관련한 문제였기에 공명성은 아직은 학계에서 숙제로 남아 있던 이 초미의 과제 해결을 스스로의 공민적 의무로 받아들였다.

역대 국호 의미는 ‘태양이 솟는 밝고 선명한 나라’
아직은 높뛰는 애국열 하나로 미지의 탐구세계에 도전한 그였다. 허나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더우기 연구의 나날은 온 나라가 허리띠를 조이는 ‘고난의 행군’ 시기이기도 했다. 련이어 덮쳐드는 시련의 파도 속에서도 연구사업만은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그 기간 《고대사회》 《삼국사기》 《고려사》를 비롯하여 그가 읽은 책만 해도 370여 권, 하나의 문헌자료 조사를 위해 수백 리를 다녀오기도 했다. 수년 간에 걸친 정력적인 연구 끝에 공명성 실장은 마침내 비과학적인 력사 외곡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그 속에 숨겨진 보석 같은 진리를 찾아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력대 국호들에 담겨진 진정한 력사적 의미와 유래들을 과학적으로 새롭게 밝혀냈던 것이다.
공명성 실장으로부터 론문 내용에 대한 해설을 듣던 기자는 놀라움과 흥분을 금할 수 없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금껏 존재해 온 우리나라 력대 국호들이 모두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에서였다.
그의 말이 흥미 있었다.
“5천년을 헤아리는 우리 민족 력사에는 수많은 나라가 흥망성쇠했고 또 나라마다 자기의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예 소유자 국가들이였던 조선(고조선), 부여, 구려, 진국과 봉건국가들인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고려, 조선(리조)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번 연구과정에 이 많은 나라들이 비록 건국시기와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그 이름들에 담겨진 력사적 의미는 한가지, 즉 ‘동방의 해 뜨는 나라’ ‘태양이 솟고 밝고 선명한 나라’라는 공통된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새롭게 밝혔습니다.”
그의 연구에서 특징적인 것은 국호의 의미를 순수 언어해석학적인 방법(한자의 뜻으로만 해석하는)이 아니라 해당 나라 사람들의 시원(혈연적 계보), 건국 과정, 신앙과 념원, 고유 조선어 등에 대한 해석을 통해 립체적으로 분석 종합한 것.
우리 민족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국호 ‘조선’의 의미와 유래에 대한 공명성 박사의 말을 들어보자.
“지금까지 국호 ‘조선’에 대해 각이한 해석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 실례로 한문식으로 해석한 ‘동쪽에 해 뜨는 땅에서 살았기 때문에 조선이라고 한다’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국조보감》 《조선고이》 《기자조선》 에 이렇게 되여 있지요.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이 정확한 것으로 될 수 없는 것은 그것을 안받침 할만한 력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순수 한자 뜻이나 ‘조선’과 비슷한 음가를 가진 말을 결부시켜 해석하려 한 데 기본 원인이 있었지요. 국호 조선의 의미는 단군에 의한 고조선의 건국과 밀접한 련관 속에서 고찰해야 합니다. 단군은 우리 민족의 건국 시조입니다. 력사적으로 볼 때 국호는 새 왕조가 서거나 정권이 교체되는 것과 함께 새로 명명되는 것이 통례이며 거기에는 정권을 쥔 세력의 정치리념이 반영되게 됩니다.”
이러한 력사적 사실들에 기초하여 조선이란 국호가 고조선의 아사달(평양의 강동-아사달이란 뜻은 밝게 빛나는 아침, 광명을 가져다 주는 동방의 아침을 의미)과 건국 시조인 단군(태양의 후손, 하늘이 낸 임금이란 뜻)의 군주 칭호, ‘박달’이라는 종족명과 깊은 련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의미는 ‘태양이 솟는 동방의 나라’라는 것을 밝혔다.

학계에 던진 파문
이와 같은 방법론으로 공명성 실장은 고조선 이후 국호들의 의미로 새로 정리했다.
그에 의하면;

  • 부여 - 태양(하늘)과 불을 절대적인 것으로 숭배하면서 단군조선족의 후손임을 나타내기 위해 부여 사람들이 정한 국호로서 태양, 불이라는 뜻.
  • 진국 - 태양이 솟는 동족이란 뜻. ‘진’은 고유 조선어로 동쪽을 나타내는 말이고 고대 조선 사람의 후손들로서 ‘태양’과 ‘해 솟는 동쪽’을 숭배한 진국 주민들의 신앙관념이 반영된 것.
  • 고구려 - 태양, 선손이라는 뜻으로 ‘고’와 비슷하고 성스러우며 크다는 뜻의 ‘구려’라는 말의 결합으로서 ‘태양이 솟는 신비한 나라’, ‘천손이 다스리는 신적인 나라’라는 뜻.
  • 백제 - 고유 조선어로 ‘박달’, ‘밝은 산’이란 뜻.
  • 신라 - 하늘(태양)을 숭배하던 고조선 유민들이 세운 나라로서 ‘새 날이 밝는 곳’, ‘태양이 솟는 벌’, ‘새벌’이란 뜻.
  • 발해 - 고유 조선어로 ‘밝은 해(태양)가 비치는 나라’, ‘밝은 태양이 솟는 나라’라는 뜻.
  • 고려 -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서 고구려와 같이 태양(하늘), 신성하다, 거룩하다는 뜻.

결국 렬거된 국호들의 의미를 하나로 통합하면 ‘태양이 솟는 밝고 선명한 나라’, ‘동방의 해 뜨는 나라’로 된다. 그의 이 론문이 학계에 던진 파문은 컸다.
지금껏 조선이란 이름의 뜻이 ‘해 솟는 맑은 아침의 나라’라는 데 대해서는 누구나 다 아는 상식으로 되고 있었다. 그러나 고조선으로부터 리조 시기까지의 모든 국호들이 모두 그와 꼭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데 대해 과학적으로 해명한 것은 그에 의해서 처음인 것이다.
우리 민족이 여러 나라로 갈라져 존재해 왔지만 단군을 원시조로 하여 하나의 피줄과 언어, 력사와 문화를 가지고 대대로 한 강토에서 살아 온 하나의 겨레임을 국호 연구를 통해 새롭게 확증했던 것이다. 열렬한 민족애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낳은 고귀한 결실이였다.
이로 하여 공명성은 2002년 11월 박사학위를 받았다. 33살의 젊은 나이에 학계의 당당한 인정을 받는 박사로, 력사학계를 떠메고 나갈 기둥감으로 단연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다.
사실 공명성 박사가 뛰여난 재능과 실력을 선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0년 전인 1993년, 그는 20대 나이에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연구조에 망라되여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연구조의 임무는 신화적 존재로만 단정되고 전해져 온 단군 유적과 관련 자료들을 전면적으로 조사발굴하는 것이였다.
련구의 중요성으로 하여 김석형 원사, 채희국 후보원사, 선영종 후보원사 등 관록 있는 력사학자들로 구성된 20여 명의 연구조에서 공명성은 당년 23살로서 가장 나이가 어린 연구사였다.

“력사는 전례가 가르치는 철학”
박사학위증을 수여받고 기뻐하는 공명성 박사와 가족들.[통일신보]
연구조 성원들은 고심 어린 노력이 깃든 수많은 물질적, 문헌적 자료들을 가지고 평양에서 3차례에 걸쳐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학술 발표회를 열고 고조선의 건국 년대는 B.C. 2993년이며 평양이 단군의 출생지, 고조선의 수도였다는 력사적 사실을 확증했다.
공명성 박사는 자기의 성공적인 오늘에 대해 말할 때면 늘 옛 스승들을 잊지 못해 한다.
중학 시절에 그는 재미나는 옛 이야기책과 력사책들에 묻혀 시간 가는 줄 모르던 ‘력사 애호가’였다.
그의 꿈은 지나간 모든 력사를 환희 꿰뚫는 력사학자가 되는 것.
소망대로 사회과학원의 교육체계에서 력사학을 전공하게 된 그는 홍기문 선생, 김석형 선생과 같은 명망 있는 스승들에게서 력사학을 배우게 되였다. 한 생을 력사 연구에 바쳐온 전세대 로학자들로부터 그는 풍부한 력사지식과 함께 뜨거운 애국의 넋, 력사학도로서의 참된 자세를 물려받았다. 력사 연구 성과로써 부강조국에 이바지할 푸른 꿈과 참된 넋을 키워준 고마운 스승들이였다.
이와 함께 과학자들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민족의 귀중한 재보로 아끼며 연구와 생활조건을 위해 온갖 혜택을 다 돌려준 조국의 품은 그의 희망과 탐구의 나래를 활짝 꽃피워준 어머니의 품이였다.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근대사 실장인 공명성 박사는 우리나라 력사학회 회원으로서 조선 일본군 ‘위안부’및 강제련행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 위원을 겸하고 있다.
현재 그는 일본이 력사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입힌 막대한 피해와 죄행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동시대 인간들, 후대들에게 이에 대해 똑똑히 알려 주어 비극의 력사를 다시금 되풀이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에서라고 한다.
“력사는 전례가 가르치는 철학이라는 말이 있듯이 단순히 흘러간 과거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오늘과 래일이 비껴 있지요.”
공명성 박사는 이 분야에서도 북남 력사학자들이 주체성과 민족적 립장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외세에 의한 력사외곡 행위와 반세기 이상에 걸친 민족의 분렬은 하나의 력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북남 사이에 서로 다른 인식의 차이를 낳고 있습니다. 력사학자로서 이것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다르게 인식되여 온 력사를 하나로 만드는 것, 이것이 곧 통일로 향한 길이 아니겠습니까.”
외곡된 민족사를 바로잡는 것으로서 통일에 이바지하겠다는 공명성 박사. 가슴 속에 애국애족의 더운 피를 안고 사는 이런 실력있는 새세대 과학자들이 력사학계를 떠메고 나갈 기둥으로, 통일의 주역으로 믿음직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다. [2003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