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3일 화요일

쿠바의 무상의료, 다른 나라는 성공 못한 이유


쿠바의 무상의료, 다른 나라는 성공 못한 이유    - 2012/08/06 06:28 白泉

2012년 선거혁명/복지국가 2012/08/06 06:28 白泉

쿠바의 무상의료, 다른 나라는 성공 못한 이유

쿠바가 전 세계에 자랑하는 예방의학·무상의료·가족주치의 제도는 절체절명의 무로부터 쌓아간 것이다. 쿠바의 의료 체계를 부러워하면서도 아직 성공한 나라가 없는 것은 지금 있는 것을 버리지 못하는 탓이다.

장정일 (소설가)

바캉스 삼아 제목에 ‘쿠바’가 들어가는 책을 모두 모았다. 나는 음악과 책만 있으면 더위 따위 아무렇지도 않은데다가,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신념에 찬 사람이다. 맨 먼저 20대에 읽었던 C. 라이트 밀스의 <들어라 양키들아(Listen, Yankee)>(아침, 1985년)를 집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한껏 팽배했던 1980년대의 ‘반미’ 정서 속에서였지만, 문학청년들에게는 또 다른 통로가 있었다.

1961년 5월1일. 김수영은 그해 봄, 정향사에서 펴낸 <들어라 양키들아>를 읽고 이런 일기를 썼다. “<들어라 양키들아> 독료. 뜨거운 마음으로, 무수한 박수를 보내면서 읽었다. <사상계>사에 북 리뷰를 썼다. 아아, 들어라 양키들아.” 김수영은 당대의 진보 매체였던 <사상계>의 청탁을 받고, 막 번역된 그 책을 읽었다. 그러나 원고를 보내고 보름 뒤에 터진 5·16 쿠데타 탓에 ‘반미적 내용’으로 가득한 그의 서평은 빛을 볼 수 없었다.

<김수영 전집 2-산문>(민음사, 1981년)에는 그때 사장된 서평이 전재되어 있다. 김수영은 미국 자본가(제국주의)와 결속한 쿠바 토착 지배계급(봉건주의)에 대한 전복이 쿠바혁명이라는 C. 라이트 밀스의 관점에 동의한다. 쿠바혁명의 표층이라고 해야 할 이 관점의 학술적 명명은 반제·반봉건혁명이다. 성격은 다르지만 우리나라의 4·19혁명(1960년)은 쿠바혁명(1959년)과 한 해 터울로 태어난 연년생이다. 그래서 김수영은 한동안 쿠바혁명을 늘 의식할 정도였다. 그는 3년차인 쿠바혁명과 2년차인 4·19혁명을 비교하면서, 혁명은 ‘무(無)’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혁명이 성공하려면 쿠바에서처럼 무의 자리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4·19혁명은 원통하게도 그 처지를 포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혁명은 왜 무의 처지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일까? 시인의 상상은 뜬구름 같다.


쿠바혁명의 심층은 독립전쟁

300년 넘게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는 1868년부터 산발적인 독립전쟁을 벌인 끝에, 1898년 승리를 목전에 두었다. 그러자 전황을 관찰하던 미국 국무부는 크게 당황했다. 미국이 쿠바를 미연방에 합병하고자 골몰한 것은 1801년부터였는데, 쿠바가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면 미국은 쿠바를 잃어버리게 된다. 미국이 그 고민을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유재현의 <담배와 설탕 그리고 혁명>(강, 2006년)에 소상히 나온다. “1898년 미국은 아바나 항구에서 전함 메인호의 침몰을 빌미로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 침몰로 266명이 몰살당해야 했는데 후일 메인호의 침몰은 미국이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제국주의적 탐욕을 전쟁으로 채우기 위해 제 나라 군인들의 목숨을 바다 밑으로 수장해버렸다.”

미국은 스페인 함정이 어뢰 공격을 했다면서 선전포고를 했고 스페인은 석 달도 견디지 못하고 쿠바와 함께 푸에르토리코·필리핀·괌을 덤으로 미국에 양도해야 했다. 미국은 때늦게 뛰어들어, 쿠바인에게 가야 할 승리를 가로챘다. 천샤오추에의 <쿠바, 잔혹의 역사 매혹의 문화>(북돋움, 2007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899년 1월1일 스페인은 정식으로 미국에 쿠바를 이양했다. 쿠바인들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30년간 치열한 투쟁을 벌인 끝에 스페인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났지만 다시 미국의 신패권주의하에 50여 년을 보내야 했다.”


카스트로의 결정적 순간

쿠바를 차지한 미국은 군정을 실시하면서, 미국 재계와 쿠바의 엘리트 계층을 하나로 묶는 ‘재계-국가 통치동맹’을 만들었다. 알짜(경제)는 미국이 먹고, 허울(통치)은 토착 엘리트에게 맡긴 것이다. 1902년 군정을 마치고 쿠바를 독립시켜 주었다지만, 이 체계는 아무런 손상 없이 1959년 쿠바혁명 때까지 유지됐다. 미국은 군대를 철수하면서 쿠바 헌법에 ①미국은 언제라도 쿠바 내정에 간섭할 수 있으며, ②미국 해

<의료천국, 쿠바를 가다>요시다 다로 지음파피에 펴냄

군이 필요한 장소라면 어떤 특정한 곳이라도 매도 및 임대해 주어야 하고(현재의 관타나모 기지는 이 헌법의 잔재다), ③미국 이외의 나라와 조약을 체결하거나 영토를 할양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넣게 했다. 이 헌법은 1934년에 폐기되었으나, 쿠바는 여전히 미국의 보호국이었다.

본문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미국 학자인 C. 라이트 밀스는 쿠바혁명의 심층이 독립전쟁이었다는 것을 용케 알았다. 쿠바혁명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 제목이 ‘들어라 쿠바인들아’가 아닌 것은 그런 까닭이다. 쿠바혁명이 미국과 벌인 제2의 독립전쟁이었다는 것은, 이후에 미국이 한 줌의 토착 엘리트를 앞세워 벌인 군사 작전과 50년 넘게 이어지는 경제 봉쇄로 증명된다. 온갖 공산국가나 독재국가와 수교했던 미국이 유독 쿠바와 국교를 맺지 않은 것은, 쿠바를 자기 나라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것이다. 페터 벤데가 엮은 <혁명의 역사>(시아출판사, 2004년)나 로버트 서비스의 <코뮤니스트>(교양인, 2012년)에 실린 쿠바혁명 편에는 아쉽게도 그런 성찰이 없다.

피델 카스트로는 마르크스·레닌을 배우지 못했고,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혁명 직후 미국 중앙정보국이 상원에 제출한 보고서가 보증한다. 로버트 서비스의 관찰처럼 혁명에 성공한 카스트로는 미국에 잘 보이고자 ‘반제국주의 담론’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고, 여느 친미 국가의 신임 지도자가 그렇듯이 득달같이 미국으로 달려가 링컨 동상 앞에서 자신의 자랑인 군모를 벗었다. 하지만 미국은 쿠바와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지 않았다. 이제 쿠바는 모든 것을 무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요받았다. 그때 미국이 환대했다면, 카스트로는 미국이 후원하는 또 한 명의 라틴아메리카 독재자가 되었을 것이다.

지구상의 빈국 쿠바가 전 세계에 자랑하는 예방의학·무상의료·가족주치의 제도는 자본·기술·인력의 풍요가 아니라, 절체절명의 무로부터 더듬더듬 쌓아간 것이다. 린다 화이트포드·로렌스 브랜치의 <또 하나의 혁명, 쿠바 일차의료>(메이데이, 2010년)와 요시다 다로의 <의료천국, 쿠바를 가다>(파피에, 2011년)에 나와 있듯이 쿠바의 의료 체계를 부러워하고 흉내 내고자 하면서도 아직 성공한 나라가 없는 것은, 작금의 것을 하나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어느 글에서 “복지사회란 경제적인 조건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탐구가 상식이 되는 사회에서나 가능하다”라고 했다. 요모조모 경제만 따지는 자리에서는 영혼(인간)이 보일 리 없다. 그래서 혁명은 무에서 출발해야 성공한다고 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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