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16일 화요일

베네수엘라 혁명의 수도 카라카스 방문기 (2) - 임승수


베네수엘라 혁명의 수도 카라카스 방문기 (2) - 임승수

남미 국가 베네수엘라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소아암 센터를 방문했는데, 베네수엘라는 차베스 정부가 집권한 후 ‘미션 바리오 아덴트로’라는 이름의 무상의료 정책이 실시되고 있기 때문에 무려 MRI 촬영이 무료였다.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무상이어서, 어떤 병실에는 타국인 볼리비아 출신의 어린 아이가 소아암 치료를 받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 얘기를 듣고 베네수엘라는 세계 4위의 산유국이니까 돈이 많아서 무상의료가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목에 핏대를 올릴지 모르겠다. 베네수엘라의 1인당 GDP는 1만 달러 정도 수준이다. 우리나라가 2만 달러 수준인 것에 비하면 딱 절반 수준. GDP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절반밖에 못사는 국가가 무상의료를 실시하고 있다. 감동이다.

_<국가의 거짓말> 머리말 중에서


위 머리말을 쓰게 된 동기를 준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방문기, 그 두 번째 이야기(2008년 8월자)를 올린다.


---------------------------------------------------------------------------------------------------------------------------



1월 28일 일요일에는 짜여진 일정은 없었다. 하지만, 어렵게 방문한 베네수엘라에서 일요일이라고 그냥 놀수만은 없는 일.
마침, 일요일 새벽에 뒤늦게 합류하게 된 황세영 진보정치 기자, 임은경 민중의소리 기자, 송정순 당원과 함께 까라까스 시내로 나섰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19세기 초에 라틴아메리카를 스페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킨 시몬 볼리바르를 기념하는 박물관이었다.
시몬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 사람들에게 항상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었지만, 차베스 정권이 들어서면서 혁명의 핵심적 내용을 형성하는 인물로 내세워졌다. 차베스와 베네수엘라 민중들이 만들어가는 혁명이 "볼리바리안 혁명(시몬 볼리바르를 따르는 혁명)"이라 불리는 것만 봐도 그 중요성을 새삼 알수 있다. 시몬 볼리바르는 미제국주의에 맞서서 라틴아메리카를 민중적으로 통합하려는 차베스 대통령의 아이콘인 것이다.





▲ 시몬 볼리바르 박물관 앞에서 기념사진. 맨 오른쪽에서 기념품을 한무데기 들고 있는 사람이 필자
 
 
 



▲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시몬 볼리바르의 초상화
 
 
 



▲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시몬 볼리바르가 입던 의복들
 
 
 



▲ 베네수엘라 국가를 큰 돌판에 새겨놓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시몬 볼리바르의 친필 서류
 
 
 
박물관 내부는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시몬 볼리바르에 관한 것은 작은 것이라도 빠뜨리지 않고 모아놨다는 인상을 받았다.
시몬 볼리바르의 전투를 그당시의 신문기사, 작전도와 함께 배치해 놓은 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박물관 바로 옆에는 시몬 볼리바르의 생가가 붙어있었다. 그곳도 당연히 빠뜨리지 않고 방문했다.
 
 



▲ 시몬 볼리바르의 생가 앞에서 기념사진 한장. 여전히 맨 오른쪽에서 기념품을 들고 있는 사람이 필자.
 
 
 



 
▲ 시몬 볼리바르의 생가 내부의 모습. 귀족 출신이라 집이 꽤 으리으리했다.
 
 
 



▲ 시몬 볼리바르가 자던 침대의 모습
 
 
 



▲ 집의 내부에는 이와같은 혁명 벽화들이 가득했다. 후대의 사람들이 볼리바르를 기리기 위해 그려넣은 것이다.
 
 
 
박물관과 생가를 방문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박물관의 벽에 크게 쓰여진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자연이 우리를 거역한다면, 우리는 맞서 싸워 복종시킬 것이다."
 
1812년 3월에 볼리바르가 한창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전쟁을 벌이고 있던 상황에서 엄청난 지진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스페인 편이었던 카톨릭 사제들은 신도들에게 볼리바르의 해방전쟁에 대한 신의 분노로 지진이 일어났다고 소문을 냈다.
이에 대해 시몬 볼리바르가 단호하게 "자연이 우리를 거역한다면, 우리는 맞서 싸워 복종시킬 것이다." 라는 말로 대응했다.
혁명가의 기풍을 느낄수 있는 매우 인상적인 얘기이다.
 
 



▲ 위에 언급한, 시몬 볼리바르가 했던 유명한 말을 새겨넣은 벽의 모습. 위쪽의 국가문장들(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볼리비아, 페루, 파나마)은 볼리바르가 해방시킨 나라들이다.
 
 
 
바로 근처에는 시몬 볼리바르 광장이 있었다. 광장의 가운데에는 시몬 볼리바르의 동상이 당당하게 서있었다.
마침 미션 꿀뚜라의 일환으로 베네수엘라의 민중 노래패가 공연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운좋게도 이 노래패의 뮤직비디오가 담긴 DVD와 노래가 담긴 CD를 얻을 수 있었다.
근처에는 까라까스 시청도 있었다. 그 곳에 방문하니 마침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자는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었다. 국경을 뛰어넘은 연대가 까라까스 시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 광장 가운데에 우뚝 솟아있는 시몬 볼리바르의 동상
 
 
 



▲ 광장 가운데서 공연을 하고 있는 민중 노래패. 매우 유명한 노래패인 듯 보였다.
 
 




▲ 까라까스 시청의 모습.
 
 
 



▲ 까라까스 시청 내부의 모습.
 
 
 



▲ 시청 내부에 전시된 볼리비아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 관련 포스터들
 
 
시몬 볼리바르 광장을 떠나 차를 타고 이동을 해서 방문한 곳은 시몬 볼리바르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었다.
군인들이 정문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고, 매우 엄숙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안에 들어서니 정면으로 시몬 볼리바르의 동상과 함께 유해를 모신 관이 있었다.
좌우로는 볼리바르의 혁명동지였던 수크레 장군과 미란다 장군의 동상이 서 있었다.
 
 



▲ 시몬 볼리바르의 유해가 모셔진 장소. 매우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느꼈다.
 
 
 



▲ 시몬 볼리바르의 유해가 모셔진 관의 모습.
 
 
 
까라까스 시내 전체가 시몬 볼리바르를 기념하는 공간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민중들이 200년이 지나도 기릴 수 있는 훌륭한 지도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서 이동을 했다.
케이블카를 타는 곳은 지상이었다. 도로 위를 지나서 산으로 올라가는데 직접 보기에는 그다지 길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되었다. 케이블카에 몸을 싣고 올라가는 과정에서 내가 도착지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단지 한개의 작은 봉우리를 넘어가는 초반단계에 불과했다. 올라가는데에만 20분이 넘게 걸린 것 같다.
올라가는 과정에서 까라까스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산에 둘러싸인 분지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 선을 따라 올라가고 있는 케이블카의 모습.
 
 
 



▲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본 까라까스 시내의 모습. 지상부터 도대체 얼마나 올라온 것인지.... 정말 길다.
 
 
 
케이블카의 도착지는 산봉우리의 정상이었다. 그곳에 놀이시설과 호텔을 지어놓았다. 휴일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산봉우리에서 내려다 본 풍경은 정말 입을 다물수 없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처음에 우리 돈으로 2만원 정도나 하는 케이블카의 가격에 불평을 했지만 케이블카를 타고난 후에는 오히려 가격대비 만족도가 최고라고 얘기하게 되었다.
 
 



▲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선 산봉오리에서 내려다본 모습. 그 감동을 이 사진은 100분의 1만큼도 전하지 못하고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다시 20여분에 걸쳐 내려온 후에 우리는 빈민가 지역을 방문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방문한 빈민가는 체류기간 내내 우리가 타고다닌 차의 운전을 맡은 분이 사는 곳이었다.
동네에서 만난 사람들은 차베스에 대한 애정이 넘쳐흘렀다.
총기사고로 턱부분을 크게 다친 아들을 둔 아저씨는 차베스 덕분에 아들이 병원에서 공짜로 치료를 받았다고 얘기했다.
나는 일부러 차베스 지지문구가 쓰여진 빨간 T셔츠를 입고 다녔다.
외국인임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동양인 외모의 사람이 차베스 지지 T셔츠를 입고 다니는 것이 신기했는지 사람들은 간혹 나에게 말을 걸기도 하였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MVR(차베스가 소속된 집권당)의 당원임을 밝히면서 매우 친절하게 대했다.
 
 



▲ 빈민가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사진한방. 왼쪽에서 두번째에 위치한 필자는 항상 빨간티를 입고 다녔다. 아이들 한손에 안고 있는 아저씨가 바로 아들이 턱에 총상을 입은 사람이다. 이 분이 우리의 지역병원 방문을 도와주었다.
 
 
 
우리가 방문한 빈민가에 위치한 병원을 지역주민의 도움으로 방문할 수 있었다. 
지역병원은 꽤 규모가 있는 곳이었으며, 무상의료 프로그램인 바리오 아덴트로에 소속되지는 않았지만 역시 무상의료가 실시되고 있는 공공병원이었다.
그 곳에서 우리는 두 명의 의사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둘 중에 한명은 외국에서 온 의사였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마 아르헨티나였던 것 같다.
이 의사는 한달에 400달러를 받고 일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활동에 매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국가에서 의사로서 편하게 돈벌수도 있는데 이렇게 베네수엘라까지 와서 의료봉사를 하는 모습에서 라틴아메리카의 미래가 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같은 스페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빈민가의 병원에서 만난 의사들. 오른쪽이 외국(아마도 아르헨티나?)에서 온 의사. 혁명과 의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얘기하고 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