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27일 일요일

펌-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EL PUEBLO UNIDO JAMAS SERA VENCIDO (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2

영어로 하면 "PEOPLE, UNITED, WILL NEVER BE DEFEATED! WE WILL TRIUMPH."(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끝끝내 승리하리라. 이 구호는 칠레에서 정치행진하는 동안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EL PUEBLO UNIDO JAMAS SERA VENCIDO는 여러 가지 버전을 가지고 있다. 잔잔한 피아노곡에서부터 격한 감정을 토로하는 합창곡에 이르기까지... 
이 노래는 칠레의 피노체트 쿠테타가 일어나기 석달 전 1973년인 6월 Sergio Ortega(세르히오 오르테가)에 의해 작곡된 이후 전세계로 퍼져나가 칠레민중의 힘을 보여주는 예로 언급되곤 한다. 이 노래를 부른 대표적인 가수로는 칠레의 민중가수그룹인 Quilapayun(낄라빠윤)을 들 수 있는데, 그들은 1965년 세 명의 젊은 학생 훌리오 까라스꼬, 에두아르도 까라스꼬, 훌리오 눔와세르, 빠뜨리시오 가스띠요 등이 새로운 노래(nueva cancion)를 표방하면서 결성하여, 칠레의 민속축제 비냐 델 마르에 참가하여 우승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그룹으로, '세 마리의 새' 혹은 '검은 수염을 기른 세 남자'라는 뜻의 그룹명을 상징하듯 검은 수염과 검은 판초를 걸친 스타일이 당시 유행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여러 아류 그룹들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 
(Quilapayún - Sergio Ortega) 

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 
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 

De pie, cantar 
que vamos a triunfar. 
Avanzan ya 
banderas de unidad. 
Y tú vendrás 
marchando junto a mí 
y así verás 
tu canto y tu bandera florecer. 
La luz 
de un rojo amanecer 
anuncia ya 
la vida que vendrá. 

De pie, luchar 
el pueblo va a triunfar. 
Será mejor 
la vida que vendrá 
a conquistar 
nuestra felicidad 
y en un clamor 
mil voces de combate se alzarán, 
dirán 
canción de libertad, 
con decisión 
la patria vencerá. 

Y ahora el pueblo 
que se alza en la lucha 
con voz de gigante 
gritando: ¡adelante! 

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 
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 

La patria está 
forjando la unidad. 
De norte a sur 
se movilizará 
desde el salar 
ardiente y mineral 
al bosque austral 
unidos en la lucha y el trabajo 
irán, 
la patria cubrirán. 
Su paso ya 
anuncia el porvenir. 

De pie, cantar 
el pueblo va a triunfar. 
Millones ya, 
imponen la verdad, 
de acero son 
ardiente batallón, 
sus manos van 
llevando la justicia y la razón. 
Mujer, 
con fuego y con valor, 
ya estás aquí 
junto al trabajador. 

Y ahora el pueblo 
que se alza en la lucha 
con voz de gigante 
gritando: ¡adelante! 

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 
el pueblo unido jamás será vencido... 

1. 
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으리. 
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으리. 

당당히 일어서서 노래하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연대의 깃발은 이미 전진한다. 
그대 또한 나와 함께 행진하리라. 
그리고 그대는 곧 그대의 노래와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리라. 
새벽의 붉은 기운이 이미 새 세상을 예고하고 있다. 

굳세게 일어서서 싸우라, 민중은 승리하리라.
우리의 행복을 쟁취함으로써 얻은 세상은 더 나으리라. 
투쟁에서 드높여지는 수많은 목소리로 우리는 해방을 노래하리라. 
우리의 결의로 조국은 승리하리라. 

(후렴) 
지금은 민중들이 투쟁 속에서 일어설 때 
거대한 함성으로 외치리라. "전진!" 
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으리. 
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으리. 

2. 
조국은 북에서 남까지 단결을 이루어간다. 
투쟁과 노동 속에서 결집하여 
불타는 소금광산에서 남쪽의 숲까지 열어젖히리라. 
조국을 지키기 위해 
그 발걸음은 이미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일어서서 노래하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수백만의 민중들은 이미 진실을 완성하고 있다. 
그들은 강철로부터 나온 불타는 대대이다. 
그들의 손은 정의와 이치를 나른다. 
열정과 용기가 가득한 여인 
당신은 이미 여기 노동자의 곁에 서있다. 

쏘련의 경험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하는가? 한상원의 비판에 답하여 (1)-박노 자


몇주 전에 <레디앙>에서 상당히 재미있는 평론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백림 훔볼드트대에 계시는 한상원 선생님 (이하 존칭 생략)은 저에 대해서 두 가지 점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여러 이유를 밝히신 것입니다. 하나의 문제는 "포스트"에 대한 비판이었으며, 또 하나는 "국가자본주의적, 전체주의적 지배체제였"던 쏘련을 제가 "다시 좌파의 담론에 복귀시키려"고 시도하는 데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매우 체계성이 있는 한상원의 평론에 대해 계속해서 답변을 드리고 싶었는데, 시간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제서야, 미국에서 잠깐 체류하면서 드디어 여유를 얻어 몇 문장을 적어볼까 합니다. 일단 "쏘련의 명예 복원 문제"부터 다루어보고, 차후 다음의 글에서 "포스트"에 대한 태도의 문제를 다시 다루어볼까 합니다.

세계 체제의 주변부에서 사는 것은, 솔직히 불편하고 힘든 일입니다. 아마도 한상원은 한국의 70년대를 목도하시지 않았을 터인데, 오늘날과 달리 한국은 명실상부한 주변부이었던 그 시절의 한국 지식인들은 보통 괴로운 노릇도 아니었습니다. 그 때는 예컨대 철학계에서 비교적 깨이신 분들에게 관심사가 된 것은 프롬과 마르쿠제 등의 산업사회 인간의 "1차원성", 창조성 상실, 내면의 고갈과 소외 등등이었습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같은 명작들은 그 때 처음 국역됐습니다. 그런데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는 프롬과 마르쿠제를 논하기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왜냐? 미국의 한심한 신식민지, 최악의 착취와 억압이 자행되는 곳에서는 채홍사를 보내 여성들을 강제 징발하여 성추행하는 괴물 같은 "한국적 민주주의" 화신과 여성 노동자들에게 오물을 던지게 하는 수준의 자본가들부터 문제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는 산업사회에서의 인간의 소외를 논하기 전에 한국적 상황에서는 예컨대 남북문제부터 의제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답답하죠? 그런데, 이런 주변부적 답답함, 이 야만과 폭력 속에서는 김남주와 같은 유기적 지식인들이 형성될 수 있었으며, 결국 1980년대말에는 산업화된 세계에서 가장 전투성이 높은 노조들이 출현됐습니다. 그 전투성이 식을대로 식은 지금이라 해도 한 번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시죠. 이미 주변부도 아닌 한국이지만, 여러 모로 사회의 저항능력은 훨씬 더 강합니다. 핵심부 고정 멤버 일본보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변부적 삶이란 어려움과 답답함 등과 동시에 어떤 가능성도 의미합니다. 변혁은 늘 (준)주변부에서 시작되니까요.

쏘련을 한상원이 논급하는 구주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정면 비교할 수도 없는 주된 이유는, 러시아/쏘련, 나아가서 둥구 전체는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의 핵심부에 속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정러시아는 경제적으로 봤을 때에는 서구의 식민지에 가까웠습니다. 1914년에 러시아 전체의 산업자본의 약 47%는 외자 (주로 프랑스, 벨기에, 영국 등지로부터의 투자)이었으며, 특히 가장 선진적 산업부문은 거의 외국자본에 완전하게 종속돼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전기기계업 및 전기 관련 여타 부문에서는 약 90%를 독일자본 (주로 "시멘스" 재벌)이 콘트롤했으며, 금광업의 70%를 영국 자본이 콘트롤했습니다. 제정러시아의 정부는 특히 프랑스로부터의 차관없이는 그 어떤 대외적 행동 (전쟁 등)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는 서구 열강과 일본 간섭군이 탄압하려 했다가 실패한 10월혁명과 그 후의 내전은 일면에서는 "제3세계 민족해방 운동"으로서의 성격도 강했습니다. 물론 개인 차원의 "전적 해방"을 꿈꾸시는 핵심부의 지식인 분 차원에서야 가난과 종속에 찌들린 오지에서의 그런 발버둥들은 다소 재미없게 느껴질 수도 있겠죠. 주변부의 해방운동들은 개개인의 전적 해방을 가져다주기에는 하도 거칠고 일차원적이잖아요? 대대로 폭력과 억압에 익숙해지고, 세상에 문제가 있으면 이건 다 "유대놈" 등 외부자 때문인 줄 알고, "선하신 우리 황제님"을 신의 대표자로 인식해온 사람들에게 아주 일차적, 근원적 계몽부터 필요할 것인데, 특히 "포스트"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은 아마도 또 하나의 억압으로밖에 안보일 것입니다. "포스트"하시는 분들은 그런 일차적 계몽이 아직도 들어오지 않는 지역에서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상상이라도 하실 수 있는가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10월혁명 자체도 "반제, 반식민 투쟁"의 일면이 있었기에 쏘련은 예컨대 중국 혁명 등의 자연스러운 우방이 될 수 있었습니다 (조선 혁명도 물론 그랬습니다). 결국 그렇게 해서 쏘련과 중국 등이 핵심부의 직접적 통제에서 벗어나서 잠시나마 대다수의 이해관계를 고려한 발전의 길로 갈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발전의 방식이 자본/노동 시장을 배제하고 노동의 상품화를 억제한 방식이었다는 것, 이것부터 좀 평가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굳이 싼 값에 노동력을 팔아야 할 필요성도 없는 핵심부의 "지식인"이 아니고 인류 구성원 대더수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입니다.

혁명을 했다고 해서 대다수의 사고가 하루아침에 완전히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러시아 농민들의 근왕의식, "선한 황제" 갈망 따위가 결국 스딸린 개인 숭배에 대한 대다수의 적극적 수용 등 추악한 현상으로 이어진 것도 사실이고, 이런 현상들이 사회주의의 본래의 목적과 무관할뿐만 아니라 정면 배치돼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는 세계체제의 구조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공업화에 성공했다 해도 쏘련은 많은 면에서 주변부적 사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기에 쏘독전쟁 (반파쇼 전쟁)에서 엄청난 희생 (2천7백만 명)을 치르지 않고서는 승리를 거둘 수 없었으며, 그러기에 대미 무장경쟁에서 대개는 미국을 따라잡느라고 거의 국부의 대부분을 낭비해야 할 노릇이었습니다. 독일, 그리고 무엇보다는 미국에 비해 약자이었으니까요. 약자가 강자와 부득불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약자 집단 안에서의 사정이란 어떤 건지 굳이 자세히 설명드리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총동원 분위기, "적의 스파이"에 대한 광적인 공포, 물자 부족, 긴장, 그리고 그 긴장의 분위기를 이용하는 권력자들의 각종 월권 행사...굳이 보지 않아도 뻔합니다. 그런데에서 살기가 편하냐 하면, 전혀 그렇지도 않습니다. 물자부족과 매일매일의 상점에서의 "줄서서 기다리기"도 그렇지만, 예컨대 저의 스승 격이 되신 분들에게는 대외접촉에 대한 관련기관의 통제는 가장 불편했습니다. 자본주의 국가 거주의 외국 동료가 레닌그라드에 오면, 그가 공산당원 등 검증된 "진보인사"가 아닌 이상 그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 간단한 대화요약을 "제1부서" (각 직장단위에서의 보안기관 출장소)에 제출하라, 외국 학술지에 논문게재하려면 먼저 그 논문을 국역하여 "제1부서"에 제출하고 국가기밀 누설이 없는지 확인 받으라...귀찮아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솔직히요.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패권세력인 미 제국과 "담론"의 장이 아닌 실력의 장에서 붙으려면, 그리고 그 제국의 모든 파괴,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살아남으려면, 이런 내부규율없이는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인지 한 번 스스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미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미국 학술지에서 실리는 논문에서, "혼종성"이나 "이질적 공간", "탈주" 등을 이야기하면서 벌인다면 아무런 규율은 당연 필요없죠. 그러나 그런 "투쟁"으로는 세상이 약간이라도 바뀐 적은 있었을까요?

세계체제 패권세력과의 실력 투쟁에서 쏘련인민들이 그 자유와 권리를 아주 필요이상으로 희생해온 거야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권침해와 관료주의적 개인 자유 유린이 많이 자행됐다는 것을 다 인정하더라도, 저는 그런 투쟁이 "좌파적 의미"에서 무의미했다고 전혀 보지 않습니다. 일단 노동의 상품화를 매우 억제하고, 이윤추구가 아닌 다수의 이해관계를 고려한 계획으로 산업사회를 운영해도 그런 사회가 충분히 잘 발전될 수 있다는 사실부터 입증됐습니다. 물로 그렇다고 해서 쏘련은 이상사회야 절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군수공업의 전기수요 등이 있고 해서 탈핵에 거의 노력하지 않고 원전의존률이 높았다는 것은 지금으로 봐서는 엄청난 미비점이죠. 그런데 예를 들어 체르노블 재앙 이후의 쏘련 당국의 피폭인민 소개 작전과 후쿠시마 이후의 일본 당국의 대책을 한번 비교해보시죠. 일본에서는 과연 피폭지역으로부터 소개된 주민들에게 새 고장에서의 주택공급과 직장 공급 등은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요? 일본은 구쏘련보다 몇배 부유한 사회고 관료체제가 매우 발달된 사회인데, 빈민이 대부분인 후쿠시마 지역 주민들을 사실상 방기하고 거의 무대책으로 일관한 것은 자본주의의 기본적 속성과 연관돼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는 쏘련사회는 질적으로 많이 달랐습니다. 그것뿐인가요? 주변부에서의 동원사회라는 악조건하에서 고투하면서 월남, 쿠바, 나아가서 남아공 등지에서의 혁명들과 연대해서 지원한 것은 자본주의적 세계체제 전체의 역사를 상당히 바꾼 건 아니었을까요? 월남에서의 참패가 아니었다면 70년대 이후 미 패권의 상대저 약화는 가능했을까요? 쿠바혁명없이는 오늘날 베네수엘라의 변혁은 가능했을까요? 베네수엘라의 빈민들에게 물어본다면 과연 그들은 그들의 관점에서 쏘련을 "전체주의적 국가자본주의"로만 평가할까요?

미치간의 밤이 깊어집니다. 아무래도 한꺼번에 20세기의 역사를 바꾼 실험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위한 모든 이야기를 다 적을 수 없기에 일단 지금 여기까지 쓰고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해 계속 상론토록 해보겠습니다. 결론을 대신해서 말씀드리자면...역사는 교과서나 시험문제는 아닙니다. 역사에는 정답이 없어요.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본다면 늘 진보에의 시도들에 각종의 부작용들이 생기게 마련이고, 또 그런 시도들이 초기동력의 소진에 따라 퇴보로 이어지기가 마련이기도 합니다. 쏘련의 실험도 그랬습니다. 가난과 억압에 시달려온 지역에서의 과감한 반체제적 반란은 시간이 갈수록 보수화, 제도화돼 그 한계를 노출시키고, 또 그 반란에 따르는 세계지배세력과의 무자비한 대결은 엄청난 희생을 요구해 그 반란의 초기 목적을 대단히 왜곡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그런 류의 반란들을 일으켜서 이윤체계를 흔드는 것만은 우리가 "담론"이 아닌 현실의 차원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입니다. 현실로서의 쏘련에서는 추악한 면들은 많았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쏘비에트"의 꿈은 계속해서 러시아나 네팔, 인도, 콜럼비아 등지의 배제 당하고 짓밟힌 자들의 발버둥을 자극할 것입니다. 역사가 진보한다면 바로 그런 발버둥, 세계적 착취 체제애 대한 그런 대듦으로 진보합니다

2014년 4월 25일 금요일

THE REDS 영화를 본 소감. 간단히

밤을 새워 본 영화는 대학시절 이후 동아리방과 학생회실에서 이후 처음이다.
먹먹한 가슴에 잠이 오질 않아 몇일전 도착한 영화 REDS를 꺼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빨갱이들 정도가 되겠다.
영화는 러시아 혁명의 현장에 서게된 한 미국인이 페티스부르크에서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역사적 순간을 르포형식으로 풀어쓴 <세계를 뒤흔든 열흘>의 작가 존리드와 그의 연인을 중심으로 그린 일종의 전기형식의 영화다.

미국인이자 사회주의지이며 저널리스트이자 혁명가인 존 리드
(존리드는 크레믈린에 묻힌 유일한 미국인이다.)
와 남편 존리드를 만나 변변치 못한 작가와 자유주의자에서 분명한 신념과 관점을 가진 여성활동가로 변해가는 루이스 브라이언

둘사이의 좌충우돌 여러차례의 헤어짐과 만남을 표현한 로맨틱한 관계도 영화를 보는 재미였지만 (사실 막판에 핀란드 감옥에 갖친 존리드를 찾아 미국에서 밀항을 하고 핀란드설원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장면에서 솔직히 존경스럽기 까지했고 매우 부러웠다. 존리드가....)
철강노조를 조직하기 위한 활동도,
미국내 좌파정당의 열린토론장도 매우 인상깊었고
한편으로는 국가의 전쟁개입을 반대하지 못하고 찬성을 하는 진보정당의 목적을 망각하고 길을 잃어버린 당의장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당원들을 끌어내기 위하여 요청한 경찰의 개입의 장면과 끌려가는 존리드는 나의 머릿속에 박혔다.
그 이후 3개의 진영의 정당 분열과정도 매우 인상 깊었다. 그리고 러시아 볼세비키의 인준을 받기위해서 서로 경쟁하는 모습은 씁슬하게 다가온 부분이다. 물론 당시 대다수가 그러했으니 ....뭐..
반전을 약속한 민주당 대통령 윌슨의 변절도 ,당시 미국사회의 반전운동과 노동운동의 태동의 시기 이를 막기위한 경찰과 법을 들이대며 진행하는 국가의 폭력적 행위도 눈이 들어오더라.

이 영화는 존리드라는 미국인 사회주의자의 언론인에서 혁명의 선전가가 되기 까지를 그리면서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인지 정말 불꽃처럼 살다간 20대~30대 초까지의 그 열정과 무게가 나에게는 너무나도 무겁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의 상황을 잘 이해 할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시가지를 노동자들이 대오를 이루어 크렘를린궁을 향해 적기를 들고 행진을 하는 장면에서 울려퍼지는 인터내셔널가가 새벽에 불꺼진 방에서 영화를 보던 나에게
너무나도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려왔다. 그리고 레닌과 볼세비키 그리고 뜨거운 용광로란 단어로만 요약하겠다.

영화는 막연한 환상만을 갖고 영화를 보기시작한 나에게 생각보다....
너무나 표현을 못할 정도로 묵직하게 매우 많은 것을 생각하게끔 만든
영화다. 새벽에 늘 달게만 느껴지던 담배가 쓰디게 느껴질 만큼...

(그리고 영화를 내내 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과 장면이 있다면 ....)
루이스가 존리드를 보낼때 마다 나온 단어
"가봐 택시가 기다리고 있어..."
치열하게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고된 일상을 대변하기도 하고
연인과의 헤어짐을 암시하고 외롭게 남는 그녀를 이야기하던 단어이다.
그가 연인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묵묵히 택시를 타러 가방을 들고 가는 장면에서 조직과 교육을 위해 먼곳을 가던 많은 선배들의 뒷모습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