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30일 일요일

CIA와 피노체트의 쿠데타 암호명 ▶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1973.9.11.국민과 함께 최후 항전한 대통령 ‘아옌데’

1973.9.11.국민과 함께 최후 항전한 대통령 ‘아옌데’
CIA와 피노체트의 쿠데타 암호명 ▶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


20년을 기다린 영화는 사뭇 비장감까지 감돌게 했습니다. 세밑이었던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 씨가 노태우 씨와의 정치적 타협 끝에 여의도 국회에서 대국민 사과 연설을 했었지요. 그때 전씨를 향해 명패를 집어 던진 한 정치인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바로 그 날. 당시 KBS 명화극장에서는 KBS 노조가 기습적으로 편성해 상영한 영화가 있었으니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입니다. 영화는 낭만적인 냄새가 흠씬 묻어 나는 제목 덕분에 적잖게 멜로물이나 신파영화로 치부되기도 했습니다. 
그놈의 전두환 씨 연설 뒷끝 덕분에 턱걸이 해 본 영화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전통’은 영화조차도 제대로 못 보게 하는구나, 이른바 영화 찾아 삼만리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20년 만에 영화를 봤으니, 어찌 감개가 무량해 눈물이 날 지경이 아니었겠습니까?
국토가 남북으로 길어 애잔한 나라 칠레. 한국과 FTA를 최초로 맺어 칠레산 포도가 우리네 식탁에까지 오르는 나라. 체 게바라로 상징되는 남미 현대사는 미국 CIA의 쿠데타 지원과 군사정권의 독재와 그에 맞선 혁명의 핏자국으로 점철된 고난과 희망의 역사입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비극적인 나라가 국민이 직접 선출한 살바도르 아옌데 민주정부를 군부 쿠데타로 전복시킨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의 칠레입니다. 영화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 Il Pleut Sur Santiago>는 칠레의 도살자 피노체트 군사정권의 쿠데타로 무너진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정면에서 다룬 한 편의 ‘역사 교과서’입니다.
“산티아고와 이스터섬에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1973년 9월 11일 아침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국영 라디오는 반복해서 “산티아고에 비가 내립니다”는 방송을 내보냅니다. 화창한 날씨 임에도 아나운서의 잘못된 기상예보는 계속됩니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말은 바로 피노체트 쿠데타 군의 행동 개시 신호였습니다.
그리고 화면은 1970년 9월 4일 대통령 선거일로 되돌아갑니다. 당시 칠레 대통령이었던 기독교민주당의 프레이는 상원의원이자 인민연합의 대통령 후보인 아옌데의 당선이 기정사실화되자 참모들과 대책회의를 하는 가운데 미국 대사의 비공식 제안(군부 쿠데타)를 설명합니다.
TV는 아옌데 후보의 당선을 보도하며,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를 요구하고 아옌데 후보 지지그룹인 유니다드 파퓰러는 아옌데의 당선을 공표합니다. 같은 시각, 대학들과 노동자 지지단체인 공동체센터에서는 아옌데 후보의 당선을 자축하며 승리의 깃발을 흔듭니다.
다시 1973년 9월 11일. 쿠데타 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대통령 궁을 포위한 상태에서 유니다드 파퓰러와 대학과 공동체센터 등에서는 쿠데타에 맞서 방어전선을 구축하고 노동자와 민중의 힘을 조직화해 결사 항전할 것을 결의하며 총을 듭니다.
오전 9시 53분. ‘빨갱이 몰살’과 ‘파시스트 쿠데타 저지’라는 팽팽한 대치 속에 쿠데타 군의 첫 발을 신호로 대통령 궁을 사수하는 아옌데 대통령의 민주세력과 피노체트 쿠데타 군 간에 치열한 총격전이 시작됩니다.
아옌데 대통령은 쿠데타 군 전투기가 폭탄을 투하하기 직전 집무실 책상에서 피델 카스트로가 선사한 AK-47 소총을 곁에 놓고 라디오를 통해 칠레 국민에게 마지막 연설을 합니다. 같은 시간 대통령 궁 맞은 편 최고급 호텔에 묵은 파시스트들은 샴페인을 터트리며 “빨갱이 새끼들은 끝났다”며 축배를 들고….
영화는 1970년 9월과 73년 9월을 오가는 교차편집 속에 아옌데 민주정부의 마지막과 뒤이은 피노체트 군사정권의 대학살을 사실적으로 그립니다. 그리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대문호 파블로 네루다의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민중들의 함성 “파블로 동지여~ 아옌데여 영원하라~”로 엔딩 크레딧을 끌어 올립니다.
영화 <산티아고>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쿠데타 전후의 칠레 역사를 톺아봐야 합니다. 칠레의 최고 수입원은 노천 구리 광산입니다. 청년 시절 체 게바라를 담은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 언급했던 구리광산은 그러나 미국계 다국적 기업이 채굴권을 독점하고 철저하게 수탈해 갔습니다. 아옌데 대통령은 바로 이 구리 광산의 국유화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대통령에 당선되자 착착 국유화를 진행했던 것이지요.
아옌데는 70년 대통령 선거에서 칠레 진보정당들의 연합인 인민연합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습니다. 하지만 국회는 우익정당들에게 장악되어 있었지요. 그런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아옌데 정부는 모든 어린이들에게 분유와 우유를 공급하고 토지개혁과 빈부격차 해소를 위한 경제정책과 구리광산과 같은 주요 산업의 국유화 등 사회주의적 정책을 추진합니다.
이에 맞서 미국은 칠레에 대한 경제 봉쇄에 돌입했습니다. 구리 재고를 풀어 구리의 국제가격을 폭락시켜 칠레 경제에 타격을 가하고, 네슬레 같은 식품회사에 압력을 넣어 분유 수출을 막습니다. 그 결과 아옌데 집권 3년 만에 물가는 500%나 급등하고 칠레 경제는 2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합니다.
이렇게 미국에 의해 기획된 사회적 불안 속에 구리광산의 양대 소유주였던 우익들과 다국적 기업들은 CIA의 지도하에 반정부 파업을 조직합니다. 상점부터 주유소와 병원을 비롯해 우익의 지배하에 있던 산업 전반에 걸쳐 태업과 파업을 벌여 아옌데 정부 흔들기는 연일 계속됩니다. 피노체트는 이를 군부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아 탱크를 앞세웠던 것입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곳 칠레에서도 얼굴을 내밉니다. 우익들의 저항이 본격화되고 군부마저 술렁이자 아옌데는 3군 총사령관을 해임하고 중립적인 인물이라고 믿었던 피노체트를 임명합니다. 그리고 피노체트는 2주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게 됩니다.
영화에서는 살아 움직이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줍니다. 아옌데 대통령이 마지막 연설을 끝마치고 참모들과 함께 소총을 들고 쿠데타 군에 맞서 항전하다 숨지는 장면은, 심장을 바늘 끝으로 찌르는 듯한 전율에 사로 잡히게 합니다. 
또 쿠데타에 이은 대대적인 검거로 실내 운동장을 가득 메운 노동자, 학생, 지식인들이 쿠데타 군의 즉결심판에도 불구하고 ‘벤세레모스(우리 승리하리라)’를 합창하며 저항하는 장면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진리를 절감케 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감동적입니다.
조국의 깊은 시련으로부터 / 민중의 외침이 일어나네 / 이미 새로운 여명이 밝아와  / 모든 칠레가 노래 부르기 시작하네 / 불멸케 하는 모범을 보여준 / 한 용맹한 군인을 기억하며 / 우리는 죽음에 맞서 / 결코 조국을 저버리지 않으리 (후렴)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수많은 사슬은 끊어지고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비극을 이겨내리라
이 장면에서 죽음의 적막을 뚫고 ‘벤세레모스’를 선창하다 군인들에 의해 현장에서 개머리판과 군홧발에 짓이겨져 즉사하는 이는 칠레의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를 상징합니다. 실제 빅토르 하라는 쿠데타 직후 외국 망명을 뿌리치고 투쟁하다 5일 뒤인 16일 에스타디오 체육관에서 손목이 부스러진 채 총살당합니다.    
파블로 네루다가 오른손에 펜을 왼손에 시(詩)를 든 채 제국주의와 파시스트에 저항했다면, 빅토르 하라는 민중들과 어우러진 노래로 혁명과 민주주의를 합창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와 노래는 앞서 얘기한 네루다의 장례행렬에서 ‘함성’으로 하나가 되어 칠레 국민들의 가슴 속에 ‘저항의 아이콘’으로 각인됩니다.    
영화는 시종일관 5월 광주와 전두환을 교차시킵니다. 미국과 군사독재와 저항이라는 핏빛 역사 위에 칠레와 우리네 역사가 나란히 마주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옌데 대통령의 마지막 연설에서처럼 두 나라는 그 핏빛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절감케 합니다.
“이번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곧 마가야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나의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적어도 나에 대한 기억은 이 나라에 온 몸을 바쳤던 사람, 내가 이제 박해받게 될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내가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국민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운명과 그 운명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가로수 길들이 다시 개방되어 시민들이 걸어 다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칠레 만세! 국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나의 희생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국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국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1975년작, 헬비오 소토 감독, 영화파일, 전체관람가).”
TiP 1. 비공식이지만 칠레의 인권단체들은 피노체트 쿠데타 1주일 동안 아옌데 대통령을 포함해 3만 여명의 칠레 국민이 학살된 것으로 집계하고 있습니다. 또한 피노체트의 17년에 이르는 ‘피의 독재’ 기간 동안 사망자는 3,200여명, 실종자 1,200여명, 고문 피해자 10만 여명, 국외추방은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TiP 2. 지난 2006년 집권한 중도좌파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은 취임한 뒤 “과거사 진상 규명을 계속할 것”이라고 선언했었습니다. 그리고 2009년 9월 1일 칠레 법원은 피노체트 정권 시절 야당 정치인과 반정부 인사들을 고문 살해한 독재정권 가담자 129명에게 일괄 체포영장을 발부해 집요하게 역사바로세우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반면 피노체트는 퇴임 뒤에도 합참의장, 종신 상원의원 자리를 차지한 채 98년 영국 방문 중 스페인 정부의 요청으로 체포됐었지요. 하지만 칠레로 송환된 뒤에도 건강 문제를 들어 재판에 응하지 않고 아무런 사죄도, 아무런 처벌도 없이 버티다가 지병인 심장마비로 2006년 12월 11일 90살의 나이로 숨졌습니다.
칠레에서는 9월 11일 쿠데타 36주년을 맞아 산티아고 등 주요 도시에서 반 쿠데타 시위가 벌어져 2명이 사망하고 12명이 부상했으며, 수십 명이 경찰에 체포되는 등 아옌데 대통령이 마지막 연설에서 남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국민의 손으로 열기’ 위한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박호열 기자




※ 아래 영화 칼럼은 인터넷신문 www.grassrooti.net (◀ 클릭)에 게시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