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7일 토요일

차베스의 승리와 심상찮은 제3세계 반미운동

차베스의 승리와 심상찮은 제3세계 반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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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계 눈으로본 서구열강](15) 제3세계의 자주화투쟁과 21세기 미국의 세계침략정책
유태영 박사 
기사입력: 2012/10/22 [09:04]  최종편집: ⓒ 자주민보

중남미 반미자주독립국가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 지난 10월 7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4선에 성공하여 2019년까지 6년 더 연임하게 됐다. 베네수엘라의 역사를 생각해 보자. 1500년대에 베네수엘라는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의 침략을 받기 시작하여 400년 동안 농산물과 금광석 등 막대한 자원을 착취당했으며 침략자들은 원주민들을 살해하여 거의 전멸시켰다.

베네수엘라는 400년 동안 제국주의 침략자들과의 투쟁 끝에 식민지통치를 끝장내고 1800년대말과 1900년대초에 들어서서 드디어 베네수엘라는 미제국주의자들을 물리치고 최초로 자주독립을 쟁취했던 것이다. 베네수엘라 민중의 투쟁의 승리로 인하여 키프리아노 카스트로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베네수엘라는 반제반미 자주독립 투쟁을 승리하여 처음으로 자주독립의 역사를 성취했다.

하지만 그 후로부터 베네수엘라는 또 다시 100여 년 동안 외세에 시달림을 받았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령이 1992년에 반미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2년간의 감옥생활을 했다. 차베스는 1997년 ‘제5공화국운동’이라는 정당을 창당하여 대선에 출마하였으며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2006년에 차베스는 75%의 유권자들이 참여한 선거에서 63%의 높은 지지율로 재선됐으며 2012년 10월 7일에는 54.42%의 득표(경쟁후보 44.47%)로 4선에 또 다시 당당히 성공하여 2019년까지 6년간 연임하게 됐다.

베네수엘라의 자주화 과정은 미국이 주장하는 이원론적 이데올로기 체제가 절대로 아니다.  베네수엘라의 자주화 과정과 그 결과는 순전히 베네수엘라의 선조들이 서방의 침략자들에 대항하여 반서방 투쟁을 수백년 동안 어떻게 전개했던가를 토대로 삼고 있으며 선조들이 자기 해방을 위해 투쟁한 역사적 실마리를 찾아서 자주화투쟁을 전개한 순수한 역사적 발자취를 따르는데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주화투쟁의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오늘의 순수한 베네수엘라 민중의 투쟁의 과정에 대하여 미국은 베네수엘라 민중의 자주화투쟁을 ‘좌경’, ‘공산주의’, ‘독재정권’이라고 하는 이데올로기로 규정하여 강대국의 모략적인 패권을 마구 남용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자주화투쟁의 승리가 제3세계에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제3세계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강대국의 침략과 죽음의 논리를 완강히 거부하여 자주와 민족해방의 새로운 역사를 스스로 개척해 나아가야할 것을 분명히 제시해 주고 있다.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은 정치적 독립을 기초로 하여 경제, 사회, 문화적 분야에 있어서 민족해방과 구조적인 평등한 사회를 성취하기 위한 운동이다. 제3세계의 투쟁과정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민중, 민족해방의 과정인 동시에 또한 인간해방의 과정이 되기도 하다.  이러한 인간해방의 논리는 평등주의, 평화주의, 주체의식, 나눔의 공동체를 이룩하여 총체적으로 제국주의를 배격하는 새로운 민중들의 시대를 여는 자주화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제3세계의 자주화 과정은 어디까지나 결사적 투쟁에 의하여 구축되고 성취하는 것이다. 미제국주의자들이 제3세계에게 호의를 베풀어 제공해 줌으로서 자주화가 가능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사실에 있어서 미제국주의자들은 제3세계가 쟁취한 자주화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으로만 관찰하여 공산주의국가를 건설하고 있다고 무조건 단정하고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이 민중의 승리로 어렵게 쟁취한 인간해방의 논리를 악의적으로 이데올로기의 논리로 둔갑시켜 양자대립의 세계적 이념투쟁의 구조를 조성하고 있다. 이와 같은 미제국주의자들의 악의적 흉계는 제3세계의 순수한 민족해방과 자주화 운동을 흑백논리로 규정하고 선과 악의 대립과 공산주의자들의 운동이라고 악선전을 하고 있다.

제3세계의 민족해방 자주화 과정은 절대로 이원론적으로 대립하는 이념투쟁의 문제가 아니다. 제3세계의 자주화투쟁은 역사적으로 수백년 동안 계속한 선조들의 자주화투쟁이 어떻했는가를 인식하고 선조들의 자주화투쟁의 유산을 토대로 삼으면서 21세기의 자주화투쟁을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 제3세계의 모든 자주화 과정과 진로는 선조들이 개척한 민족해방 투쟁의 전통적인 토대와 그 진로를 기본으로 삼고 자주화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 제국주의, 식민주의, 패권주의, 관료주의, 침략적 폭정, 살인적인 과학기술, 정치적 매수, 교조적인 종교의 위선 등 미국의 죄악에 대하여 제3세계의 선조들이 어떻게 싸우고 극복하여 해방과 평화로운 세계를 구축하였던가 하는 것을 모색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21세기 제3세계 자주화 운동의 중요한 과제이다.

1. 제3세계에 대한 1950년대 이후 미국 침략정책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모든 나라들이 제국주의 식민지통치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할 것을 세계 인민들에게 호소하는 국제적 연대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50년대의 국제적 연대는 아시아지역 관계회의(1948년 3월)를 선두로 하여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서 해방운동의 토대를 세계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했다. 제3세계 해방운동에 대한 미국의 기본적인 침략정책은 미국의 이익과 미국의 세계지배와 패권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주화운동을 미국의 적으로 규정하면서 반식민투쟁을 저지하고 제3세계를 미국의 이념체제 아래 묶어두려는 정책을 강화하고 있었다.

미국은 미국과 동일한 이념체제의 서방국가들인 서독, 프랑스, 영국, 캐나다와 일본 등 여러 서방 나라들과 동맹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제3세계에 대하여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세 가지 정책을 활용했다. 첫째는 제3세계 국가들을 선별적으로 미국의 종속국가로 유인하는 방법이다. 둘째는 민주화의 명목으로 반정부 쿠데타를 일으켜 친미정권을 수립한다.  셋째는 봉쇄정책과 무조건적인 착취와 탈취를 강행하는 억압 정책이다.

미국의 제3세계에 대한 기본적 전략은 그 나라의 권위주의 정권을 고무하고 원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만일 그 나라에서 민중세력이 등장할 경우 보수대연합을 지원하고 강화하여 민중세력을 약화시키고 재편성하도록 하여 흡수시킨다.

미국이 쿠데타로 세운 친미군사정권을 끝까지 유지하려 하다가 민중세력의 반대로 인하여 위험하게 보이면 그 때 미국은 재빠르게 문민정부를 명목으로 하여 친미적인 민간정부를 세운다. 이와 같은 미국의 침략정책은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 그리고 동남아시아에서 전매특허식으로 1950년대 이후 줄곧 진행했다.

미국의 침략정책은 제3세계에 대하여 경제협력, 군부원조, 정보교환 공작 등을 포함하여 총체적 대중전략 (Total Grassroots Strategy)으로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제3세계에서 민중의 반미세력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친미적 성격의 정치, 사회, 문화를 구축하려는 저강도 전략(Low Intensity Strategy)을 장기적인 안목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주장하는 제3세계의 평화운동은 ‘제3세계 죽임의 무기’를 무진장 구축해 놓고 온갖 전략적 계획을 확대시키는 것을 뜻한다. 1980년대의 미국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연간 5,500억 달러가 군사비로 소모됐다. 하루에 20억 달러, 한 시간에 6,000만 달러, 1분에 100만 달러가 미국의 침략 군사비로 소모됐다.

미국의 군사비는 제3세계를 살리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제3세계에 대한 살해의 길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제3세계를 위협하기 위하여 핵무기를 소유할 뿐만 아니라 핵무기 전략기지를 확보하고 있으며 그 기지를 지킬 수 있는 미국의 대리정부인 군사독재정권을 세워 놓고 있다. 핵무기로 무장한 미국은 제3세계에게 흑백논리를 강요하여 친미우방은 선한 나라이며 반대로 민중이 지배하는 나라들은 악한 나라라는 선악의 이원론을 가르침으로써 동서냉전 시대를 조성하고 있었다.

1950년대 이후 미국의 제3세계 정책은 불안정한 민주정권보다는 안전한 독재정권을 더욱 선호하는 국제적 체제를 주로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저개발국가에게 적응시킴으로써 급진적인 혁명운동을 사전에 방지하고 있었다.

미국은 제3세계에서 급진적인 혁명운동을 사전에 방지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 예로 1960년대 이래로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에서 18개국 이상의 민중이 세운 민주정권들을 미국이 지원하는 군사쿠데타를 일으켜서 전복시켰다. 이러한 미국의 제3세계에 대한 개입정책은 라틴아메리카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나 미국의 안전을 위하여 전개되고 있었다. 1950년대 이후 제3세계에 대한 미국의 개입정책을 수행하는 방법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ㄱ. CIA 공작은 막대한 달러를 투자하여 정권의 고하를 막론하고 지방행정기구에 이르기 까지 매수작전을 하여 친미적 독재정권을 지원해 준다.
ㄴ. 미국의 대기업체들이 그 나라의 경제적 구조를 완전히 장악하여 정권의 정책과 민중의 삶을 지배하고 노동조합의 활동을 제한하고 봉쇄한다.
ㄴ. 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봉쇄한다. 라틴아메리카 브라질의 예를 들어 말하면 전국에 80개의 방송프로그램을 독점하여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미리 제작하여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신문 보도와 선전 팜플렛을 통하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민심을 조정한다.
ㄷ. 라틴아메리카에서 종교를 이용한 CIA 공작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특히 카톨릭 신부들과 수녀들까지 이용하여 풀뿌리 민심을 친미와 군사정부를 지지하도록 반공주의를 주입시키고 있었다.

1950- 2000년에 이르는 미국의 3세계에 대한 침략정책에 대한 세부적 기록은 지면상 제약으로 이것으로 마친다. 다만 결론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미국의 정치, 군사, 경제의 안보를 위하여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하여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오직 미국의 주도권 하에서 이념적인 정치적 안정을 유지한다. 둘째 제3세계에서 미국이 구축한 친미적 국가에 공산주의적 반미정권의 등장을 원천 봉쇄하여 반정부 게릴라 세력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낸다. 셋째 미국의 전세계적인 시장의 확대와 원자재 공급의 안전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어느 때나 군사적 개입을 추진한다.

2. 제3세계 자주화투쟁과 21세기 미국의 침략정책

21세기에 있어서 제3세계를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는 하부조직으로만 생각하는 미국의 침략정책은 옛날에나 21세기에 있어서나 조금도 변함이 없다. 21세기 미국의 세계전략은 미국에 대한 일체의 경쟁과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 정책이며, 그 추진 방식은 핵무장을 강화하는 정책이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으로 인하여 핵억제력을 갖추지 못한 제3세계 군소국가들은 국가의 주권과 생존이 중대한 위협에 봉착해 있다. 그리고 미국의 침략정책에 순순히 복종하지 않는 국가에 대해서는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하고, 고립 압박, 봉쇄 포위, 공격과 점령, 정권 교체 등으로 21세기형 식민지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9.11사태 이후에 이른바 ‘국가안보전략’을 제정했다. 2002년 9월에 미국이 공개한 이 ‘국가안보전략’에 의거하여 미국은 선제공격 정책을 주장하고 있다. 2003년 3월 미국이 이라크를 선제공격한 것은 바로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에 의거하여 21세기형 식민지 침략정책을 실현한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미국의 이라크침공은 침략정책이라고 하는 미국의 국가정책의 핵심이라고 하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났다.

미국의 21세기 국가안보전략의 근원적인 뿌리는 미국독립역사에서부터 찾아야 마땅하다. 미국의 독립전쟁을 자유의 쟁취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에 있어서 미국이 영국의 제국주의 통치체제에서부터 이탈하여 미국의 독자적인 경로를 통하여 또 하나의 새로운 제국주의적 국가를 1760년대에 아메리카 대륙에 건설한 역사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은 역사적 인식이다.

미국의 독립을 설계한 토머스 제퍼슨은 건국 초창기부터 ‘자유의 제국(Empire of Liberty)’이라고 하는 침략적 정책이 내포되어 있는 선언문을 작성했다. 이것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건이 바로 미국의 백인들이 아메리카 토착민에 대한 대량 학살행위였다. 그런데 말이 대량이지 사실은 거의 전멸학살이었다. 그러므로 미국의 국가 창건의 기원은 문자 그대로 피로 물든 역사이다.

그리고 미국은 백인우월주의(white supremacy)와 근본주의 기독교 논리에 따라서 선택받은 나라라고 주장을 하면서 끝을 모르는 침략의 야욕으로 경계선을 확정하여 팽창주의적 미국이라는 나라를 창건했던 것이다. 그 후의 미국의 침략에 대한 기록은 지면상 제약으로 여기서 마친다.

21세기에 들어서서 미국의 지배체제에 대항하는 제3세계로부터 도전이 이어지고 있다. 그 한 예가 미국의 이라크침공의 논리가 거짓인 것이 드러남으로써 미국의 국가안보 전략의 정당성이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라크전쟁의 과정에서 미국이 저지른 거짓과 악행에 대하여 중동의 아랍권을 비롯하여 전세계적으로 제3세계의 반격과 저항이 거세게 이어지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퇴진한 이유는 미국의 대외정책이 베트남전쟁 증후군과 동시에 또한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침략전쟁에 대하여 미국 내부에서 대중의 신뢰를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동맹국들 사이에서도 미국의 여전한 침략정책에 대한 반감이보다 깊어지고 있다.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지배점령정책에 대한 저항이 이란을 비롯하여 널리 확산되고 있다. 제3세계를 미국의 통치기준에 맞추어 지배하려고 하는 미국의 오만한 전략은 오히려 전세계적으로 거꾸로 반미 투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미국의 침략정책에 대한 제3세계의 저항의 힘이 아직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미국은 오판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3세계의 반제반미 저항세력의 무한함은 제3세계의 잠재력의 문을 세계적으로 보다 크게 활짝 열어 놓고 있다.

3. 미국이 돌이키지 않으면 제3세계 심상치않다

제3세계의 국제기구인 상하이협력기구(SCO)는 2001년 7월 14일에 창설되었는데 러시아, 중국,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즈스탄 그리고 타지키스탄 등 6개국을 정회원국들로 두고 있다. 그리고 준회원국으로 인도, 이란, 몽골, 파키스탄 등 4개국들이 있다. 그 다음에 SCO의 협력 파트너국으로 벨라루스, 스리랑카,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이 있으며 그외에도 독립국가연합과 동남아시아연합도 초청국가들로서 연합된 국제적 기구이다.

SCO는 도대체 무엇하는 국제적 기구인가? SCO 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서방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맞서는 위상을 갖는 또 하나의 국제기구이다. 이 SCO 정상회의에 이란의 아마디네자드 대통령과 아프카니스탄의 대통령 등이 반드시 참석한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세계적으로 중요한 뉴스거리가 된다. 이란과 미국은 서로 사활을 걸고 대립과 대치를 하고 있는 나라이며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패배를 인정하고 2014년까지 물러날 것을 선언하고 있다.

SCO는 미국의 아시아 침략의 야욕을 약화시키고 있는 구체적인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중국의 후진타오가 SCO에게 100억 달러를 지원해 주고 있다는 사실과 그리고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에 G8정상회의에는 불참하고 중국방문을 선택했다고 하는 사실은 SCO의 중요성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명확하고 강력한 대미공세인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미국이 아시아의 나라들에게 정치적으로 정직하지 않으면 이제는 국제적 관계에서 절대로 설 자리가 없다. 미국의 악마적인 CIA의 국제적인 공작과 공화당 네오콘의 제국주의적인 술수가 제3세계를 앵무새와 원숭이로 길들여놓고 마음대로 지배해 왔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서 미국은 제3세계를 더 이상 속일 수 없다. 이제는 제3세계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19-20세기에 있어서 지구촌에 살고 있는 제3세계를 미국이 서구문명과 기독교의 전통으로 뒤덮는 산업화의 이름으로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를 식민지로 만들어 놓고 마음대로 지배했다. 미국은 지구촌을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붙이는데 있어서 선봉에 달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미국은 과학적인 기술을 통하여 인류의 평화와 지구촌의 생태문제를 해결하는데 대하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1969년에 미국은 인간 역사상 최초로 인간을 태운 우주선 아폴로 11호를 발사하여 달에 착륙시키는데 성공했다. 1969년은 인간 역사에 있어서 미국은 최대와 최고의 과학 문명의 절정에 도달하는 것을 전세계에 과시하는 1969년 이었다.

하지만 1969년은 미국에게 또 어떠한 해였을까? 1969년에 미국 뉴욕주의 한 작은 시골마을에서 ‘우드스탁 페스티벌 1969’를 8월 15일 부터 3일간 개최했는데 50만명이 모여서 세계적인 반전시위를 전개한 유명한 해이기도 했다. 우드스탁이라고 하는 이 작은 마을에서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큰 평원을 꽉 메운 50만명이 미국 전역에서 운집하여 ‘우드스탁 페스티벌 1969’을 개최했는데 이 모임의 주된 목적은 월남전 반대와 혼탁해진 자본주의 체제의 부패 그리고 미국의 인종주의적 불공정한 사회제도에 대한 시대적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미국의 새시대를 향한 역사적 청년문화 창건을 위함이었으며 이에 대한 커다란 이정표를 세우는 행사였다. ‘우드스탁 페스티벌 1969’의 뜻과 교훈은 미국 사회의 저변에 존재하고 있는 대량 소비문화, 물질주의, 종교적 위선의 도덕주의, 약소국가들에 대한 침략정책으로 인하여 미국이 오만에 빠진데 대하여 젊은 지성인들이 항의하는 대표적인 반전평화운동이었다.

미국은 제3세계의 혼란을 이유삼아 혼란에 빠진 제3세계의 정권을 도와준다는 명목 하에서 미국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그 나라의 내정간섭을 정정당당하게 착수 하면서 친미정권으로 전환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미국 CIA의 공작 정략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과 동남아시아 제3세계에 속하는 100여개의 나라들에서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제3세계 나라들에 침투하여 공작하고 있는 CIA 비밀 요원들의 수는 대략 2000명 정도라고 추산한다.

하지만 미국의 제3세계에 대한 침투 공작은 절대적 만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만일에 미국이 옛 로마가 멸망한 것처럼 패망하는 운명을 자초하지 않으려면 이미 무력으로 과시하고 있는 강대국의 오만을 하루 속히 버리고 평화를 추구하는 선량한 나라로 변신해야 한다. 한국 속담에 끝이 좋아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역사란 시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에 의미가 있는 것이며 과거와 현재와의 연결과 대화가 정당 해야만 역사는 값있는 인류의 소산이 될 수 있다.              

21세기에 들어서서 미국의 제3세계에 대한 CIA 침투공작과 침략정책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미국의 변함없는 침략정책에 대하여 제3세계의 대응은 단호하고 결정적이며 심상치 않다. 미국의 공작 침략행위에 대한 제3세계의 대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ㄱ. “아랍의 봄”이라고 하는 전 세계로부터 이목의 집중을 받고 있는 반미 시위가 2010년 이래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산불처럼 일어났다. 알제리, 바레인, 이집트, 이란, 요르단, 리비아, 모로코, 튀니지, 예맨 등 중동지역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반제반미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아랍의 봄”이라는 명칭 외에도 중동과 북아프리의 반미운동에 대하여 “중동의 겨울” 또는 “아랍의 자각” “아랍인들의 반란” 등 여러 명칭으로 아랍세계의 반제반미 운동을 부르고 있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하여 서방의 언론들은 혁명적인 아랍의 봄에 대한 봄소식을 제대로 전하지 않고 위선적으로 축소와 왜곡보도만을 일삼고 있다. 이와 같은 미국과 서방 언론의 병든 왜곡보도에 대하여 미국의 유명한 석학 노암 촘스키는 논평하여 말하기를 봄이 오면 꽃이 피는 것을 언론이 막을 수 없다라고 논평했다.

특히 튀니지와 리비아 그리고 이집트에서 발생한 대중적 반미 반독재 투쟁은 분명히 장기적인 미국의 패권에 대하여 파열구를 낸 민중의 승리를 보여 주었다. 미국의 오래된 침략에 대항하여 아랍국가들이 미국에 덤벼드는 항쟁이었다. 

ㄴ. 인도에 대한 미국의 전략이 실패하고 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인도를 미국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인도를 21세기의 강국이 되도록 돕는 것이 미국의 아시아 정책이라고 주장하면서 “인도 키우기”를 선언했다. 미국은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인도를 이용하려는 포섭정책이었다.

오바마 대통령도 취임 후 제일 첫 번째 미국의 국빈으로 인도의 만모한 싱 총리를 백악관에 초청하여 인도와 차원 높은 협력을 다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과 인도와의 관계는 21세기에 가장 결정적인 파트너십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부시 대통령이 “인도 키우기”를 주장했다면 오바마 대통령은 “인도 달래기”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미국이 그 후에 중국과 정상회담에서 발표하기를 완전히 이율배반적인 성명을 발표했는데, “미국과 중국은 남아시아의 평화를 위하여 함께 노력하는데 있어서 중국은 미국의 유일한 파트너이다”라고 했다. 미국은 남아시아에서 인도를 완전히 제외시킨 성명을 발표했던 것이다. 

미국에 대하여 인도는 즉각 반발하는 성명을 냈다. 인도는 미국의 들러리 노릇을 하지 않는다고 밝혔으며 또 “전략적 동반자”라는 말장난도 허구인 것을 절실히 느끼면서 인도는 미국과 동반자 관계를 폐기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2014년에 실시되는 인도의 총선에서 친미정권이 집권하도록 하기 위하여 인도 내부에 침투하여 인도의 중앙정부와 주정부 사이를 이간시키는 공작을 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 CIA는 인도의 선거에 틀림없이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와 중국은 2007년과 2008년에 두 번 합동군사훈련을 했는데 미국의 반대로 중단됐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2012년 9월 4일 중국의 량광례가 인도를 방문하여 인도와 중국의 합동군사훈련을 또 다시 재개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ㄷ. 미국에 맞서는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이 심상치 않다. 미국의 뒷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중남미와 라틴아메라카의 여러 국가들이 이제는 미국에 대항하여 제각기 서슴없이 반제반미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19-20세기까지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다.

그동안 미국이 뒷마당 국가들에게 저지른 죄악적 침략과 착취 행위는 드디어 역사적 심판에 직면하고 있다. 어쨌든 남미는 미국의 달러 횡포에 너무 시달려서 이제는 중남미 “공동통화”를 도입하겠다는 말이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미국의 자유무역지대(FTAA)에 맞서 라틴아메리카에 볼리바르동맹(ALBA)이 창설되어 23개 국가들이 가입하고 있는 것이 오늘 라틴아메리카의 실정이다.

민족주권과 민중주권을 분리시키지 않고 동일시하는 자유해방운동이 남미의 여러 나라에서 정치적 화두가 되고 있다. 미국이 남미에 자유무역지대(FTAA)를 창설하여 남미를 미국이 신탁통치하려 하고 있다. 이것을  분명히 인식한 오늘의 남미의 민중들은 미국에 결사적으로 반제반미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ㄹ. “아프리카의 눈물”이라는 시사교양용 다큐멘터리영화가 있다. 지구의 눈물시리즈 세 번째 작품으로써 아프리카의 빈곤과 기근 그리고 문화의 후진성으로 인한 비참한 원시적인 삶의 모습을 흥미로운 흥행거리로 보여주고 있는 영화가 바로 “아프리카의 눈물”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프리카의 눈물”이라는 영화는 백인들의 관점에서 흥미로운 오락영화일 뿐이다. 이 ”아프리카의 눈물”이라는 영화는 진정으로 아프리카 검은 대륙의 흑인들의 역사적인 눈물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영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모욕이 되는 작품이 되고 있다. 백인들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노예무역을 419년 동안 했는데 956만 6,100명이 넘는 많은 흑인들을 노루 사냥하듯 붙잡아 미국 등으로 팔아 넘겼다.

현재 아프리카 대륙에 54개국이 명목상 독립국으로 UN의 회원국이 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 54개 국가들의 연간 GDP를 모두 다 합한 총액이 6천억 달러에 불과하다. 이 6천억 달러는 코리아반도 남녘 한국의 연간 GDP 6천억 달러와 거의 같은 수준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아프리카 대륙에 “아프리카연합(AU)”이 창설되어 반제반미투쟁을 반세기 동안 줄기차게 계속하고 있다. 오늘 북아프리카에서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반미항쟁으로 인하여 미국은 아프리카 정책에 있어서 큰 문제에 봉착하고 있다. 미국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홍수처럼 또 산불처럼 꺼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반미항쟁에 대하여 매우 뼈아프게 느끼고 있다. 지금 아프리카 전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반미항쟁에 대하여 미국은 제대로 대처하는 곳이 하나도 없으므로 대아프리카 정책에 있어서 총체적 파국에 봉착해 있다.

미국이 그래도 버티고 있는 유일한 곳은 UN이다. 아프리카 지역에 54개 국가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주하는 아프리카 대표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래서 남아공의 제이콥 주마 대통령이 안전보장이사회에 아프리카 대표로 한 명의 자리를 요청했다. 하지만 미국은 아프리카 나라들의 수없이 많은 요청들을 UN의 테이블 아래로 묵살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미국의 아프리카 위기관리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으며 아프리카연합(AU)은 어두운 땅에서 “화려한 대륙의 미래”를 꿈꿨던 마틴 루터 킹 목사처럼 단지 갈망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아프리카를 백인의 눈으로 보지 말아야 하며 또 아프리카에 대하여 말을 할 때  백인들의 입으로 말하지 말고 아프리카인들이 스스로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ㅁ. 끝으로 미국의 침략주의에 대하여 제3세계의 대응이 심상치 않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이것은 제3세계 반미국가들이 장거리미사일을 속속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러시아는 미국에게 미사일 협정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은 오만방자하게 러시아의 요청을 무시하고 유럽에 미국의 미사일방어망을 단독 구축했다. 러시아도 미국에 맞대항하여 서유럽을 향해 미사일 전진배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어찌하여 강대국들만 미사일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러시아는 미국과 맞대응을 하기위하여 미사일을 소유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또 그 외에 제3세계의 군사강국이 미사일과 핵무기를 소유하는데 대하여 손을 잡고 미국에 대항하면서 제3세계를 위한 평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는 미국과 정면으로 미사일과 핵무기 대결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히 여기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중국과 인도 그리고 북조선(북한)과 손을 잡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인도와 함께 합동군사훈련을 논한다는 최근의 뉴스도 있다. 러시아는 제3세계와 손잡는 넓은 정책을 명백히 과시하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인도의 3자 연대는 아시아와 세계평화의 핵심이 된다.

미국은 제3세계 국가들이 이란을 비롯하여 속속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데 대하여 공포증에 걸린 환자가 되고 있다. 게다가 북조선이 2010년 5월에 핵융합반응에 성공했다고 발표함으로써 미국은 대북조선 정책에 있어서 진퇴양난의 곤경에 빠져있다. 북조선이 핵무기를 소유하고 있으며 또 장거리 미사일발사를 한다고 해도 미국은 북조선에 대하여 저지른 과거의 죄과로 인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미국의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외교안보정책의 원리와 세계전략의 핵심은 부시의 외교정책의 실패로 인하여 폐기될 수밖에 없게 됐다. 오바마 정권은 중국과 북조선의 핵무기의 부상으로 인하여 변화된 아시아의 상황에 대처하여 지금까지의 부시의 일방주의적 형태를 버리고 제3세계와 균형자로서의 역할을 강화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글을 맺으며

2012년 10월 19일 국제 뉴스에 의하면 미국의 CIA가 지원하는 시라아의 반군이 시리아 정부군과 전투를 계속하고 있으며 이웃 나라 터키도 역시 미국에 동조하여 시리아 국경에서 시리아 정권을 압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반기문 UN 사무총장도 시리아 정부에 대하여 공격적인 발언을 마구 퍼붓고 있으면서 시리아가 미국에 항복할 것을 강요했다. 또 UN은 코리아반도의 남녘 한국을 유엔안보리에 진출시켰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오늘의 모든 국제 뉴스들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뼛속까지 친미”라고 하는 이명박의 임기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미국의 안보정책이 MB의 안전을 끝까지 보장해 줄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미국 CIA의 역할이 박근혜의 대통령 출마에 대하여 미국의 지원을 위하여 어떤 모양으로 가능할 것인가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 오바마 대통령 재선의 당락을 좌우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영원한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어떤 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손이 분명히 한국의 대통령선거에 대하여도 어떤 형태를 통하여 작용할 것이다. 미국의 비밀의 손이 한국의 3인의 후보에 대하여 결정적인 관계와 감시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고 확실하다.

김상일 전 한신대 교수가 지적한 바대로 5.16, 유신, 인혁당사건 등으로 중범죄자인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한국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하는 사실 자체가 미국의 관여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또 정기열 박사가 통일뉴스에 기고하여 밝힌 바대로 MB의 연속인 “이명박근혜”로 이어지는데 대한 논의에 대하여 필자는 두 말하면 잔소리로 미국 CIA의 결정사항에 속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세상의 비밀은 반드시 역사적 오해도 낳을 수 있는 것이 비밀의 법칙인 것이다. 그러므로 비밀은 때로는 진리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비밀이 불의한 악마와 저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것을 인류의 역사는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 CIA의 비밀공작에 이용당하지 말고 오직 한국의 고질적인 망국병인 지방색을 배격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오히려 지방색을 아름다운 민족적인 민속으로 승화시켜서 아름다운 역사를 창출하는 선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2012년 10월 19일)
 

2012년 10월 25일 목요일

이정희 대통령 후보 쌍용자동차 문제 해결 1,000배 기원제 발원문


이정희 대통령 후보 쌍용자동차 문제 해결 1,000배 기원제 발원문
쌍용차 일천 배에 들어가며, 하늘을 날고 싶었습니다. 
 



하늘을 날고 싶었습니다.

2009년 여름, 쌍용차 도장 공장 옥상에 날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이분들도 저와 똑같이 가족이 있고 김치찌개 끓는 밥상이 그리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세상에 말하고 싶었습니다.

 
정작, 하늘을 나는 사람을 보던 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86일의 굴뚝농성을 마친 날, 좁은 굴뚝에 스스로를 가두고 지내야했던 노동자는 자신의 다리로는 내려올 수 없어 헬리콥터에 매달려 하늘을 날아야 했습니다.



부끄럽고 죄스러운 기억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때 도장 공장에 들어갔더라면, 조현오 경찰청장이 억지로 밀어붙였다는 경찰 진압만큼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사회적 보증이라며 정당과 국회의원들 나서서 노사 간 합의서 확인해놓고도, 복직 약속된 시간이 와도 지켜만 본 것 아닌가, 왜 물러서 있었던가.

총선만 잘 되면 다 해결하겠노라 큰 소리 쳤던 것 아닌가, 왜 미뤄두었던가.

 
회사가 비정규직 고용 늘리면서도 블랙리스트 만들어 조합원은 안 받는다는 말 듣고도, 근로기준법의 재고용의무조차 완전히 무시되는 상황이라 판단하고서도, 해봐야 되겠나 지레 주저앉은 것 아닌가, 왜 더 크게 말하지 못했나.

저도 아파요, 때마다 말 보태는 것, 장례식마다 얼굴 비치고 조사 몇 마디 하는 것으로 제 할 바 했다고 여긴 것인가, 왜 정리해고의 진실을 정면으로 파고 들어가지 못하고 에돌았던가.


진보정당 키워주었으니 뭔가 해내겠지 기대했던 분들을 오랜 기다림으로 실망 더하게 해드렸습니다. 제가 책임져야 할 일, 제가 사죄드려야 할 시간입니다.

 
아프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고통 끊어내지 못해 죄송합니다.

무엇을 하겠다 말하기 전에, 희생되신 분들과 아픔 겪는 분들 앞에 죄스러운 기억 다 드러내려 합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부끄러움 다 털어놓고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2012년 10월 25일
쌍용차 분향소에서, 일천 배를 시작하며
통합진보당 대통령 후보 이정희



[기자회견] 김인성 교수 의견과 법적대응 방침


제목
[기자회견] 김인성 교수 의견과 법적대응 방침
글쓴이
청풍명일
등록일
2012-10-25 19:43:36 (**.**.216.10)
[기자회견] 김인성 교수 "제주도 불법 콜센터 부정사례, 화약고 될 것" 등 발언록

- 14:10 / 정론관
- 당 비례선거 관련 진실특위 <진실보고서> 발간 기념 기자회견 


■ 김인성 교수 (한양대 교수 /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

"제주도 불법 콜센터 부정 사례, 화약고 될 것"
"컴퓨터에 기록된 로그에 부정선거 확증가능한데, 검찰에서는 입 다물고 있어"
"부정선거를 했던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 가있는지 잘 지켜봐야"
"불법적인 대량투표, 입을 닫고 있는 진보인사들 분명 대가 치를 것"


진실이 뭐 필요하겠냐고 하는데, 화약고가 될 것 같다.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온라인 선거가 기존의 선거시스템에 대한 개선이라든지 더 나은 시스템이라서 시행한게 아니다. 대선이나 총선같은 경우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선관위에서 주관한 선거인데, 당의 선거는 비용도 들일 수 없고, 현장투표소도 만들기도 어렵고 궁여지책으로 만든 그런 제도다.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선거다. 

그런 선거 속에서, 검찰이 조사하고 있는 개인적인 대리투표들은 시스템으로는 결코 확인할 수 없다. 부부가 집안에서 투표했는데 한 컴퓨터로 한게 부부가 같이했는지, 부인 몰래 남편이 했는지 등은 전혀 확인할 수 없다. 선거 주관하는 쪽에서 아무리 노력하려 해도 부정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는 그런 상황 속에서 개개인의 부정, 이것을 막지 못했다고 하고 있는 것이고. 

'서울에 컴퓨터가 있는데, 핸드폰 인증은 지방에서 받았다'? 이런 것도 그 당시의 컴퓨터 핸드폰 위치를 통신사의 협조 받아서 확인해야 하는데 그것도 불가능하다.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이다. 압수수색한다고 하던지 법적 절차에 따르지 않으면 당내 선거에서는 확인이 불가능한, 그런 상황인데 그것을 못했다고 통합진보당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투표인 수가 4만명이 넘는데, 검찰이 3-4개월간 조사해서 겨우 10명도 안되는 정도의 위임에 의한 대리투표행위가 일어났다고 하는거다. 그런데 더 한심한 것은 컴퓨터에 기록된 로그에 보면 거의 300여표 가까운 부정투표, 불법콜센터를 운영됐었다고 하는 확증을 잡을 수 있는데, 검찰에서는 이것에 대해서 전혀 얘기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화약고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소위 진보쪽 언론에서도 눈을 감고 있고, 진보인사들, 야권에서도 당에 대해서 부정을 저지른 불순한 집단으로 얘기하고 있는데, 부정선거를 했던 사람들이 어디에 가있느냐, 그것을 정말 지켜봐야한다고 생각한다. 

로그에 의해서 범죄 확증을 잡았는데도 불구하고, 애국단체라는 분들이 고발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검찰은 조사를 안하고 있다. 검찰이 통합진보당의 서버를 가져가서 디지털 포렌식의 기술적 방법으로 똑같은 증거를 잡을 수 있음에도 개인들끼리 부부간, 친척간에 해서 위임한 대리투표만 얘기하고 있는데, 저는 이게 조금만 시기가 지나면 불법적인 대량투표가 문제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 입을 닫고 있는 진보쪽 인사들은 분명히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 여기까지 말씀드리겠다.



■ 김승교 (비대위원 / 변호사)

오늘 통합진보당의 지난 경선 관련한 진실보고서가 발간되었다. 새로운 진실보고서에 근거해서 향후 법적조치를 크게 네가지 진행하려한다. 


1. 조준호, 유시민, 심상정 전 공동대표에 대한 법적조치 

1차 진상조사와 관련해서는 공당에서 사상 유례없는 초유의 범죄행위가 일어났다. 당시 4만명 이상이 투표했다. 이에 대한 투표값을 열었다. 누가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확인했다. 이것은 명백한 범죄행위다. 당시 이정희 공동대표를 제외한 조준호, 유시민, 심상정 공동대표가 투표값을 열었다. 명백한 범죄행위라고 생각하고, 법적 조치를 진행할 것이다. 부정이 있었는지를 최종확인하기 위해서 열었던 것인데, 부정이 없음을 확인했다. 확인해놓고도 입을 닫은 것이다. 그런 은폐 또한 있을 수 없는 부정이자, 불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세명의 공동대표에 대한 법적 조치.


2. 1차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 및 핵심 관계자에 대한 법적조치

두번째, 당시 1차 진상조사위원장(조준호 공동대표), 위원 한명이 진상조사에 대해 허위 왜곡에 기초해 언론 플레이를 했다. 추이와 관련해서도 부정이 있었다고 보여지는 순간부터 수직상승했다고 하는 내용을 진상조사 위원장이라는 자가, 공당의 대표라는 자가 그렇게 얘기했다. 언론이 1면에 대서특필했다. 하루 이틀 지나지 않아서 거꾸로 된 것이라고 밝혀졌다. 어느 언론도 정정보도 하지 않았다. 진상조사 위원장이자 공당의 대표라는 자도 정정하지 않았다. 1차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핵심 관계자들에 대해서 법적조치를 밟을 예정이다. 


3. 제주도 불법 콜센터 : 대규모 조직적 부정 사례에 대한 고발 및 손해배상 청구

세번째는 좀전에 김인성 교수께서도 말씀 있으셨지만, 조직적인 대규모의 온라인 선거와 관련해서 발견된 것은 제주도 불법 콜센터였다. 검찰은 여전히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제대로 잡기 위해서 운영자, 관련자들에 대한 고발, 손해배상 등 법적 조치를 밟을 예정이다. 


4. 언론의 왜곡보도에 대한 정정보도 요청 및 손해배상 청구

마지막으로 5월 2일 부터 여기 계신 여러 언론, 방송할 것 없이 통합진보당에 대해서 많은 보도를 쏟아냈다. 대부분이 잘못된 허위 왜곡 보고서에 기초한 오보였다. 그 이후에 상당한 부분이 진실로 밝혀졌지만 정정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진실보고서를 오늘 이렇게 내놓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도 제대로 보도해주실 것을 요청드리면서, 과거의 5월부터의 허위 왜곡의 오보에 대해서 이제라도 정정보도를 해주실것을 이자리를 빌어 요청드린다. 일부 기자분들은 당이 정정요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정하지 않았다고 하는 분들도 계신다. 정중하게 요청드린다. 정정보도 해주시길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당과 당원들의 하소연, 억울함 분노 이런 것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늦어도 다음주 부터는 한겨례, 경향을 비롯한 언론사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집단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할 수 밖에 없음을 알린다. 

이렇게 크게 네가지 법적 조치를 밟아나갈 것이다. 이정도 말씀드린다. 



■ 유선희 대변인
 
당과 당원들은 비례경선과 관련한 거짓보고서에 대한 왜곡 보도에 의해서 많은 피해와 고틍을 받아왔다. 정의와 진실을 밝히는 차원에서 또, 무리한 검찰 수사의 중단을 촉구하면서,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그간 보도됐더 내용들 대부분이 사실이 아니라는 말씀을 꼭 드린다. 진실에 기초해서 언론보도 해주실것을 부탁드리고, 참고자료가 첨부돼서 두껍지만 기자분들 읽어보시고, 그에 기초해서 보도 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이상으로 진실보고서 관련 기자회견을 마치겠다. 


2012년 10월 25일
통합진보당 대변인실

2012년 10월 23일 화요일

쿠바의 무상의료, 다른 나라는 성공 못한 이유


쿠바의 무상의료, 다른 나라는 성공 못한 이유    - 2012/08/06 06:28 白泉

2012년 선거혁명/복지국가 2012/08/06 06:28 白泉

쿠바의 무상의료, 다른 나라는 성공 못한 이유

쿠바가 전 세계에 자랑하는 예방의학·무상의료·가족주치의 제도는 절체절명의 무로부터 쌓아간 것이다. 쿠바의 의료 체계를 부러워하면서도 아직 성공한 나라가 없는 것은 지금 있는 것을 버리지 못하는 탓이다.

장정일 (소설가)

바캉스 삼아 제목에 ‘쿠바’가 들어가는 책을 모두 모았다. 나는 음악과 책만 있으면 더위 따위 아무렇지도 않은데다가,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신념에 찬 사람이다. 맨 먼저 20대에 읽었던 C. 라이트 밀스의 <들어라 양키들아(Listen, Yankee)>(아침, 1985년)를 집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한껏 팽배했던 1980년대의 ‘반미’ 정서 속에서였지만, 문학청년들에게는 또 다른 통로가 있었다.

1961년 5월1일. 김수영은 그해 봄, 정향사에서 펴낸 <들어라 양키들아>를 읽고 이런 일기를 썼다. “<들어라 양키들아> 독료. 뜨거운 마음으로, 무수한 박수를 보내면서 읽었다. <사상계>사에 북 리뷰를 썼다. 아아, 들어라 양키들아.” 김수영은 당대의 진보 매체였던 <사상계>의 청탁을 받고, 막 번역된 그 책을 읽었다. 그러나 원고를 보내고 보름 뒤에 터진 5·16 쿠데타 탓에 ‘반미적 내용’으로 가득한 그의 서평은 빛을 볼 수 없었다.

<김수영 전집 2-산문>(민음사, 1981년)에는 그때 사장된 서평이 전재되어 있다. 김수영은 미국 자본가(제국주의)와 결속한 쿠바 토착 지배계급(봉건주의)에 대한 전복이 쿠바혁명이라는 C. 라이트 밀스의 관점에 동의한다. 쿠바혁명의 표층이라고 해야 할 이 관점의 학술적 명명은 반제·반봉건혁명이다. 성격은 다르지만 우리나라의 4·19혁명(1960년)은 쿠바혁명(1959년)과 한 해 터울로 태어난 연년생이다. 그래서 김수영은 한동안 쿠바혁명을 늘 의식할 정도였다. 그는 3년차인 쿠바혁명과 2년차인 4·19혁명을 비교하면서, 혁명은 ‘무(無)’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혁명이 성공하려면 쿠바에서처럼 무의 자리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4·19혁명은 원통하게도 그 처지를 포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혁명은 왜 무의 처지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일까? 시인의 상상은 뜬구름 같다.


쿠바혁명의 심층은 독립전쟁

300년 넘게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는 1868년부터 산발적인 독립전쟁을 벌인 끝에, 1898년 승리를 목전에 두었다. 그러자 전황을 관찰하던 미국 국무부는 크게 당황했다. 미국이 쿠바를 미연방에 합병하고자 골몰한 것은 1801년부터였는데, 쿠바가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면 미국은 쿠바를 잃어버리게 된다. 미국이 그 고민을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유재현의 <담배와 설탕 그리고 혁명>(강, 2006년)에 소상히 나온다. “1898년 미국은 아바나 항구에서 전함 메인호의 침몰을 빌미로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 침몰로 266명이 몰살당해야 했는데 후일 메인호의 침몰은 미국이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제국주의적 탐욕을 전쟁으로 채우기 위해 제 나라 군인들의 목숨을 바다 밑으로 수장해버렸다.”

미국은 스페인 함정이 어뢰 공격을 했다면서 선전포고를 했고 스페인은 석 달도 견디지 못하고 쿠바와 함께 푸에르토리코·필리핀·괌을 덤으로 미국에 양도해야 했다. 미국은 때늦게 뛰어들어, 쿠바인에게 가야 할 승리를 가로챘다. 천샤오추에의 <쿠바, 잔혹의 역사 매혹의 문화>(북돋움, 2007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899년 1월1일 스페인은 정식으로 미국에 쿠바를 이양했다. 쿠바인들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30년간 치열한 투쟁을 벌인 끝에 스페인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났지만 다시 미국의 신패권주의하에 50여 년을 보내야 했다.”


카스트로의 결정적 순간

쿠바를 차지한 미국은 군정을 실시하면서, 미국 재계와 쿠바의 엘리트 계층을 하나로 묶는 ‘재계-국가 통치동맹’을 만들었다. 알짜(경제)는 미국이 먹고, 허울(통치)은 토착 엘리트에게 맡긴 것이다. 1902년 군정을 마치고 쿠바를 독립시켜 주었다지만, 이 체계는 아무런 손상 없이 1959년 쿠바혁명 때까지 유지됐다. 미국은 군대를 철수하면서 쿠바 헌법에 ①미국은 언제라도 쿠바 내정에 간섭할 수 있으며, ②미국 해

<의료천국, 쿠바를 가다>요시다 다로 지음파피에 펴냄

군이 필요한 장소라면 어떤 특정한 곳이라도 매도 및 임대해 주어야 하고(현재의 관타나모 기지는 이 헌법의 잔재다), ③미국 이외의 나라와 조약을 체결하거나 영토를 할양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넣게 했다. 이 헌법은 1934년에 폐기되었으나, 쿠바는 여전히 미국의 보호국이었다.

본문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미국 학자인 C. 라이트 밀스는 쿠바혁명의 심층이 독립전쟁이었다는 것을 용케 알았다. 쿠바혁명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 제목이 ‘들어라 쿠바인들아’가 아닌 것은 그런 까닭이다. 쿠바혁명이 미국과 벌인 제2의 독립전쟁이었다는 것은, 이후에 미국이 한 줌의 토착 엘리트를 앞세워 벌인 군사 작전과 50년 넘게 이어지는 경제 봉쇄로 증명된다. 온갖 공산국가나 독재국가와 수교했던 미국이 유독 쿠바와 국교를 맺지 않은 것은, 쿠바를 자기 나라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것이다. 페터 벤데가 엮은 <혁명의 역사>(시아출판사, 2004년)나 로버트 서비스의 <코뮤니스트>(교양인, 2012년)에 실린 쿠바혁명 편에는 아쉽게도 그런 성찰이 없다.

피델 카스트로는 마르크스·레닌을 배우지 못했고,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혁명 직후 미국 중앙정보국이 상원에 제출한 보고서가 보증한다. 로버트 서비스의 관찰처럼 혁명에 성공한 카스트로는 미국에 잘 보이고자 ‘반제국주의 담론’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고, 여느 친미 국가의 신임 지도자가 그렇듯이 득달같이 미국으로 달려가 링컨 동상 앞에서 자신의 자랑인 군모를 벗었다. 하지만 미국은 쿠바와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지 않았다. 이제 쿠바는 모든 것을 무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요받았다. 그때 미국이 환대했다면, 카스트로는 미국이 후원하는 또 한 명의 라틴아메리카 독재자가 되었을 것이다.

지구상의 빈국 쿠바가 전 세계에 자랑하는 예방의학·무상의료·가족주치의 제도는 자본·기술·인력의 풍요가 아니라, 절체절명의 무로부터 더듬더듬 쌓아간 것이다. 린다 화이트포드·로렌스 브랜치의 <또 하나의 혁명, 쿠바 일차의료>(메이데이, 2010년)와 요시다 다로의 <의료천국, 쿠바를 가다>(파피에, 2011년)에 나와 있듯이 쿠바의 의료 체계를 부러워하고 흉내 내고자 하면서도 아직 성공한 나라가 없는 것은, 작금의 것을 하나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어느 글에서 “복지사회란 경제적인 조건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탐구가 상식이 되는 사회에서나 가능하다”라고 했다. 요모조모 경제만 따지는 자리에서는 영혼(인간)이 보일 리 없다. 그래서 혁명은 무에서 출발해야 성공한다고 했나보다.

2012년 10월 21일 일요일

자본주의 4부- 세상을 바꾼 위대한 철학들


자본주의 4- 세상을 바꾼 위대한 철학들

아담스미스 국부론
아담스미스가 부자들의 편이라고 하는 건 말도 안됩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지지했어요.
그가 시장개방을 신봉하는 이유는 『빈곤층』 때문이에요.
(에이먼 버틀러(Eamon Butler) 영국 아담스미스 연구소 소장)

마르크스가 최고의 사상가인 것은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모두 동의 할 겁니다.

(벤 파인(Ben Fine) 영국 런던대 경제학 교수, 저서 : 마르크스 자본론,소비의 세계:물질과 문명)

케인즈도 시장을 믿었어요.
케인즈는 자본주의는 인간의 열망을 위한 최고의 시스템이라고 믿었어요.
(로버스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 영국 상원의원, 워릭대 명예교수/ 케인즈관련 세계 최고의 건위자 /케인즈 평전)

사실 하이에크는 우리가 자유주의 시장 질서에 살고 있다는 것을 부인 할 거에요.
(스티브 데이비드(Steve David) 영국 경제연구소 교육담당이사)

자 그렇다면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구할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야기 할 수 있을 까요?

케인즈는 두가지 문제를 해결하면 자본주의는 생존할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로버스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 영국 상원의원, 워릭대 명예교수)

어떤 저항이 필요할 때 사람들은 영감을 필요로 합니다.
그럴 때 마르크스를 찾죠.
(조나단 울프(Jonathan Wolff)영국 런던대 철학교수 /마르크스 전문가 저서 : 정치철학 입문
로버트 노직:소유와 정의,그리고 최소국가)

경제위가가 닥칠 때 급진적 사상가가 다시 주목받는다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죠.
(벤 파인(Ben Fine) 영국 런던대 경제학 교수)

아담 스미스는 경전 같은 존재에요. 다양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어요.
모두에게 해답을 주죠.
(에이먼 버틀러(Eamon Butler) 영국 아담스미스 연구소 소장)


경제학의 창시자,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담 스미스


아담스미스 (Adam Smith(1723~1790)
글래스고대학 철학교수, 경제학의 아버지 『도덕 감정론』『국부론』저자

비교적 수줍은 사람이었어요. 독신으로 평생 어머니와 함께 살았죠.
글래스고 대학에서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아주 인가가 많았어요.

그시기 스미스는 사람들의 본성과 행동을 꾸준히 연구 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을 모아서 『도덕 감정론,1759 Theory of Moral Sentiments』이라는 책을 내었다.

이기적인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도덕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이기심을 누르고 도덕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까?이기적인
기본적으로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도덕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는 거죠.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것은 마음 속에 우리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는 공명정대한 관찰자 (the real and impartial spectator)가 있기 때문이죠. 그 관찰자가 이기심을 잘 조절해서 도덕적으로 행복하게 해준다는 거죠.

찰스 타운젠드 (영국정치가, 공작)의 양아들의 대륙여행의 가정교수 수락
3년동안의 여행동안 벤자민 프랭클린, 튀르고, 프랑수와 케네등을 만남

공작 아들과 유럽을 여행하면서 견문록을 쓰는데 그게 국부론으 시작인 셈이죠.
(에이먼 버틀러(Eamon Butler) 영국 아담스미스 연구소 소장)

18세기는 변화의 시대였다.
봉건주의가 무너지고 현대자본주의가 막 시작되는 시대였다.



또한 영국에서는 산업 혁명을 시작으로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시대였다.
그러자 물건을 팔수 있는 더 넢은 시장이 필요했고 자유무역이 활발해짐
그시대는 국가의 부를 금과은의 축적으로 보는 중상주의사상이 지배



아담 스미스를 가장 화나게 했던 건 중상주의였어요. 당시 한 나라의 부란 국가의 금고에 얼마나 많은 금과 은이 쌓여 있는지가 결정했어요. 그게 그 나라의 부의 기준이었어요. (에이먼 버틀러(Eamon Butler) 영국 아담스미스 연구소 소장)
프랑스의 여행에서 만난 케네로부터 아주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얻는다.
프랑수아 케네(Francois Quesnay, 1694~1774, 프랑스 경제학자, 중농주의자, 루이 15세의 주치의이자 케네경제표를 만들어낸 학자)
*케네 혈액론*
그는 의사였던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를 하나의 육체로 보고 사회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는 깨달았다. 사람이 식량을 먹어야 살수 있듯이 사회도 마찬가지라는 가죠. 인간이 노동을 해서 식량과 원료를 얻고,상품을 유통해야 사회가 성장한다는 것
그리고 사회는 3계급으로 구성되어 있고, 화폐는 3계급을 돌면서 생산물을 공급하다는 것이죠.
마치 혈액처럼. 또는 그는 토지만이 부의 원천이라는 중농주의를 주장했다.

이러한 케네의 사상은 아담스미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국부 즉 국가의 부는 중상주의에서 주장하는 금과 은의 축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3년간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옴
글래스고가 경제적으로 아주 풍요해지기 시작 할 때였어요.
담배 수출입의 중심지 였어요. 항구가 있는 글래스고는 경기가 좋았죠
경제적인 부흥이 시작되는 시기였어요.
(크리스토퍼 베리 ,글래스고 대학 정치학 교수)

크고 작은 공장에서 부가 매일 생산되는 것을 보면서 자유시장의 위력을 느낀 아담스미스.
시장경제는 사고,파는 사람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으며 사화의 자원을 적절하게 배분할 수 있다.

어떤 학자와 철학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가 빵과 버터를 찻주전자에 넣은 일도 있어요.
국부론 원고에 대해 고민하며 걷다가 교회 종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려보니 16km나 지나쳐 걷기도 했었죠.
(에이먼 버틀러(Eamon Butler) 영국 아담스미스 연구소 소장)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의 경제를 이끄는 것

데이비스 흄 (영국의 철학자, 인성론의 저자)을 자주 만났다.
흄의 가장 큰 공헌은 그의 실증적인 철학이었어요
머릿속의 구상이 아니라 실제 사물을 보고 현상을 이해해야 한다고 했지요.
흄의 실증철학이 아담스미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에이먼 버틀러(Eamon Butler) 영국 아담스미스 연구소 소장)

조지프 블랙 (1728~1797, 영국의 화학자, 이산화탄소 발견 잠열에 대한 연구)
제임스 허턴(1726~1797, 영국의 지질학자, 동일 과정설)

국부론(1776,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h of Nations) 탄생
아담스미스가 국부론을 통해서 밝혀내고자 했던 것은 국부를 증진 시킬 수 있는 방법
그는 어디서는 노동이 이루어 지면 부가 생산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음.
그래서 국부를 모든 국민이 연간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의 양이라고 새롭게 정의함.
그렇다면 무엇이 국부를 만들어 낼까요. 아담스미스는 부는 노동이 만든다라고 하였다.
모든 가치는 노동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이죠.
또한 모든 가치는 노동에 의해 생기므로 상품의 가치는 생산하는데 들어간 노동량이 좌우한다고 정의를 내림



그렇다면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은 무슨 뜻일까요?
스미스는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돈을 벌고 싶은 이기심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결국 가격을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서 시장경제가 활발해 진다고 하였다. 즉 자유로운 시장만이 개인과 국가를 부자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함.
보이지 않는 손은 국부론에서 딱 한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스미스는 이 한문장으로 그가 꿈꾸는 완전한 자유 시장 체제 (System of Perfect Liberty)라는 이상적인 세상을 설명했습니다.





국부론 1장 분업

국부론은 다위의 <종의 기원>이나 뉴턴의 이론만큼 정말 중요한 책이죠.
근대경제의 기본원리를 설명했어요.
분업과 국민총생산, 무역과 개방의 중요성, 보호무역의 문제점들. 지난 수십 년간 경제학 교과서가 됐지요.
 (에이먼 버틀러(Eamon Butler) 영국 아담스미스 연구소 소장)


그러므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의 최초로 자유시장체제 형성한 기본적인 틀이다.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기본원리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명저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담 스미스를 잘못 이해하고 있어요. 자유무역을 신봉하고, 거대정부를 반대하고, 자유시장 경제를 지지 했지요. 그러니 아담스미스는 돈 많은 부자들의 편이라고 오해 했죠.
(에이먼 버틀러(Eamon Butler) 영국 아담스미스 연구소 소장)

자유로운 개인의 이익추구 스미스에 대한 가장 오해를 많이 낳는 부분이다.
하지만 아담 스미스는 개인의 이기심은 사회의 도덕적 한계 내에서만 허용된다고 함.
즉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끊임없는 이기심을 결코 허용한 적이 없다.
이는 그가 그전에 쓴 도덕감정론에 쓰여진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이고 경제도 그 도덕체계의 한 부분 이다.

국부론은 인간 행동 규범 안에서 생긴 것입니다.

둘중에 한권만 읽어서는 알 수 없어요.
도덕감정론의 이론이 국부론에 다시 등장합니다. 빈민에 대해 연민을 느끼죠
개빈케네디 (에든버러대 경영학 교수)

아담 스미스는 대중을 돕는 최선의 길은 자유시장 경제라고 주장했어요
 (에이먼 버틀러(Eamon Butler) 영국 아담스미스 연구소 소장)

인간은 이기적입니다. 하지만 아담 스미스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있다고 그래서 이기적인 행동도 공공의 이익으로 전환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우리는 아담 스미스를 자본주의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는 자본주의란 말을 단 한번도 쓰지 않았다.
그 대신 인간의 도덕적 범위 내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체제라는 인상을 떠올렸다.
만약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지금의 불평등과 위기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을 까요?

아주 놀랄 거에요.
미국과 영국 등에 대해서는 좀 실망을 할 것 같아요. 부유한 사람들에 비해 가난한 사람들이 훨씬 많거든요. 아담 스미스의 유명한 문구가 있어요.
국민이 대부분 가난하고 비참하게 사는데 그 나라가 부유하다고 말할 수 없다.’
(에이먼 버틀러(Eamon Butler) 영국 아담스미스 연구소 소장)

칼 마르크스 (Karl Marx 1818~1883, 독일의 경제학자, 철학자)



최초로
왜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가난 할까?
자본주의는 정말 이상적인 체제일까라는 새로운 의문을 던진 철학자
그리고 산업혁명을 통해 기계 부품처럼 되버린 노동자들을 보고
자본주의가 어떻게 그들의 삶을 파괴하는지 밝혀내고 싶어함.




젊은 시절의 마르크스는 헤결의 변증법에 푹 빠져 있었다.


세상에 모든 것 인간/자연/사회도 그 어떤 것도 고정불변이 아니라 정반합의 법칙으로 끊임 없이 변화 한다는 철학
하지만 마르크스는 세상을 변화 발전시키는 주체가 세상의 밖에 존재하는 절대정신이라는 주장에는 동의 하지 않음



오히려
포이에르바하가 주장한 물질이 세계를 구성하며 지배하며 이끌어간다는 유물론을 받아들임





헤겔의 변증법에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을 더해서 유물론적 변증법을 만듬



과연 그는 자신이 던진 의문을 어떻게 풀어나갔을까?

1843년 급진적 반정부신문의 라인신문 편집장 시절

마르크스는 대학교수가 되려고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무신론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죠. 그래서 생계를 꾸리려고 언론계로 눈을 돌렸죠
그때가 마르크스가 정치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어요.
기자로서 진짜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충격을 받았죠.
조나단 울프 (영국 런던대 철학과 교수)

라인신문 폐간è 파리로 감.



공산주의와 엥겔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Friedrich Engels, 1820~1895 독일의 경제학자, 저널 리스트)
엥겔스는 한마디로 사회주의의 후원자, 공산주의의 후원자였다.

그는 마르크스가 계속 글을 쓸 수 있기를 원했고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을 마칠 때까지 계속 돈을 보냈죠.

맨체스터 방직공장에서는 심지어 이만한 어린애들도 매일 12시간 이상을 공장에서 힘들게  일해



엥겔스보다 마르크스는 최고의 사상가입니다.
하지만 둘중 한명과 저녁 식사를 해야한다면 마르크스보다는 엥겔스가 더 좋을 것 같아요.
마르크스는 자기중심적이고,자기 생각에 갇혀 비판하는 것 외에는 다른 사람의 얘기에 흥미를 두지 않았어요. 반면 엥겔스는 문화적이고 관용적이며 즐거운 사람이었어요.

공산주의자와의 만남으로 혁명을 준비한다.

1845년 벨기에 브뤼셀
프로이센 국적 포기

1848년 공산당 선언
만국이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함께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어요.
노동자들의 현실을 보고 그 개선방향을 찾고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변화 가능성을 연구했어요.
위기도 있었고 탄압을 겪기도 했습니다.

1848년 유럽은 브뤠셀,프랑스 혁명에 동참



붉은 박사와는 악명과 새로운 사상을 밝혔다는 사상가라는 것을 동시에 얻음.

1848년 독일 퀠른 신라인 신문 발행  à 폐간
1849년 영국 망명
마르크스의 문제 중 한 가지는 돈이었습니다. 정기적인 수입이 없었으니까요.
얼마간의 원고료를 받기도 했지만 항상 돈 문제에 시달렸습니다.

위산과 엥겘스의 도움으로 연립주택을 구함. 생활의 안정으로 자본론 집필 시작

낮엔 대영도서관에서 글을 쓰고 주말엔 소품을 가거나 독일 이민자들과 교류했어요.
사교적인 사람이었죠

자본론을 쓴 이유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철저히 분석하고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가장 많이 읽은 책이 국부론이고 자본론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것도 국부론이었다.

1867년 자본론 1권 출간 자본의 생산 과정
자본론에서 제일 먼저 다룬 것 상품 : 인간이 생산 하고 사용하는 모든 물건
사용가치 + 교환 가치 = 상품
이러한 상품은 노동을 통해 생산해내는 것
상품의 가치 = 상품 생산에 들어간 평균 노동시간 으로 결정된다고 정의
6시간 동안 6켤레를 만든다면 신발의 가치는 1 노동시간
화폐는 상품의 가치를 표시하는 수단으로 봄.
화폐 물신성 경고




아담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드로의 노동의 가치 이론을 이어 받아서 노동이 최고의 가치라고 정의함. 하지만 아담스미스의 분업은 사람을 오히려 노동자를 기계의 부품처럼 만들어버린다고 비판함.



그러나 그가 자본론을 쓴 주요 목적은
왜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는 항상 가난 할까 반대로 놀고 먹는 자본가는 왜 부자가 될까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서였음

이윤은 어디서 오는가?




자본론 1권은 어떻게 자본이 이윤을 남기는가에 대한 것이에요.
마르크스는 노동시간이나 노동일수를 늘이는 절대적 잉여가치의 원리에 대해 설명합니다.
(벤 파인(Ben Fine) 영국 런던대 경제학 교수, 저서 : 마르크스 자본론,소비의 세계:물질과 문명)

여기는 빵공장입니다.  빵한개를 만드는데 얼마의 시간의 드는지 계산해보겠습니다.



밀가루 1kg 1노동시간이라고 하겠다.




기계는 빵 만개를 만들면 수명이 다됩니다.
1개를 만드는 데 1 노동시간이 들죠.




만약 1노동시간을 화폐로 환산해서 1천원이라고 하면 빵 한개는 3천원이 되는 것입니다.

노동자가 평균 1 8시간을 일하면 24노동시간
그동안 만든 빵 8개의 가치는 2 4천원이다.

8개의 가치는 2 4천원이다.



기계와 원료는 그 가치가 그대로 인정되었는데 왜 노동자는 8시간을 일했는데 자본가는 일당으로를 3000원만 인정해줍니다. 그러면 나머지 5노동시간 즉 5000원은 어디로 갔을까요?



바로 자본가의 주머니에 들어갑니다. 마르크스는 그 남은가치를 잉여가치라고함.






노동자는 왜 노동자는 싫다고 못할 까요? 그건 바로 자본가가 그만 둬라고 하면 그만 둬야 하기때문이죠. 그걸 아는 자본가는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노동자에게 더 오래 일하게 합니다.




물론 일당은 절대 더주지 않죠




노동자를 착취함으로써 자본가는 더 많은 부를 얻게 됩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노동시간의 연장으로 생기는 잉여가치를 절대적 잉여가치라고 함.



하지만 자본가는 만족하지 못하고 더많은 이윤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것.



이는 결국 필요노동시간은 줄어들고 잉여노동시간이 늘어나는 것
노동자의 임금을 날로 싸지고 자본가는 그만큼 이윤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특별 잉여가치 또는 상대적 잉여가치라고 표현함.



칼 마르크스는 최초로 착취하는 자본주으의 본질을 이해했어요. 착취현상이 일어날 거로 생각했어요. 로버트 스키델리 (영국상원의원, 워릭대 명예교수)

기계가 노동을 대신하면서 실업이 증가
실업자의 증가로 임금 하락
이렇게 되면 상품은 쏟아져 나오지만 팔리지 않으니
시장붕괴가 된다. 기업도 자본가도 망하게 될거다. 주장함. 결국 공황이 시작되고 참다못한 노동자가 혁명을 시작할 것이라고 주장함. 자본주의 붕괴후 사회주의 사회의 등장을 예견함.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역사의 한과정으로 바왔습니다.
봉건제 이후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할 것이라고 주장했죠.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자본주의 가 사라지고 공산주의가 도래 할것이라는 구조를 설명해냈습니다.
조나단 울프

1883
나의 벗 엥겔스. 우리가 파리에서 꿈꾸었던 세계는 결국 오지 못할 것 같네
삶의 마지막 까지 통찰을 멈추지 않고 있네만 세상이 더는 날 원하지 않더군
독불장군 같은 나를 변함없이 지지 해줘서 고맙네
이제 나에게 남은 열정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싶네

1885년 자본론 2권 출간 (엥겔스가 정리)

1894년 자본론 3권 출간

사회주의 성서로 불리며 성서보다 더 많이 팔림.



마르크스가 철학으로 세상을 변하려고 하였다.


  
자본주의 경기가 좋지 않으면 신문사설에 종종 결국은 마르크스가 옳았다라는 말이 실립니다.
-       조나단 울프 (영국런던대 철학과 교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주장합니다. 생산이 쉬워진 신용화폐로 미래에 투자합니다.
이게 자본주의 에요. 동시에 빚을 양산하고 디폴트를 일으키고 위기를 가져옵니다.
-       제프리 잉햄 (영국캠프리지대 교수)
-        

아담스미스가 국부론을 통해서 꿈꾸고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통해서 펼폈던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은 그들의 사상적인 시작점이 인간에 대한 사랑 이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이 잘살 수 있을까를 고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