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3일 일요일

[노동자 정치신문 89호] 기본소득제 비판(2) -이른바 ‘좌파’ 기본소득제의 반동성

제목 : [89호] 기본소득제 비판(2) -이른바 ‘좌파’ 기본소득제의 반동성
노정협  2012-10-31 23:39:58, 조회:811, 추천:35
기본소득제 요구에 대해 “전술이 없는 전략주의이자 초현실주의적 급진주의”(임승철)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현실성이 없다는 점에서 현실을 초월해 있는 잠꼬대 같은 요구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기본소득제는 현실성이 없을뿐더러 반동적이기 조차 하다.

현재 한국사회의 좌파들이 공유하는 기반은 현실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모두를 비판하는 것이다.(권문석 [기본소득위원회(준), 정책위 ], 기본소득 이야기① 기본소득 운동을 하는 개인적 이유, 진보신당 사랑과 혁명의 정치신문, 2012/08/17)

기본소득론자들은 현실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모두를 비판하면서 ‘제3의 길’ 노선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영국 노동당 블레어 정권 하에서 안소니 기든스가 주창한 ‘제3의 길’이 결국 새로운 길이 아니라 개량주의 노선이듯, 기본소득론자들의 제3의 길 역시 자본주의 내에서 개혁을 외치는 사민주의 노선에 불과하다. 기본소득론자들이 주로 ‘신좌파’진영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자본주의에 깊이 포섭돼 있는 반면에 쏘련 사회주의와 현실 사회주의에 대해 극도로 혐오감을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 강제적 일자리 늘리기를 했으나,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강제노동이라 오래갈 수 없었다.(진보신당기본소득위원회, 기본소득노트)

물신 숭배의 대상은 화폐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였으며, 역사적으로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공산’당(黨)이 그런 지위를 가졌다.(권문석, 기본소득 이야기 ② 좌파는 마르크스와 노동을 물신숭배하는가, 진보신당 사랑과 혁명의 정치신문, 2012/08/23)

마르크스와 노동이 물신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의미를 담았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마르크스와 노동에 대한 새로운 의미 규정은 기본소득 이야기의 출발이다.(같은 글)

노동을 함으로써 인간의 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세계관은 뿌리깊은 토대를 가지고 있다....헤겔은 소위‘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노동의 긍정성을 이야기했다....이런 논리가 헤겔좌파들에 의해 노동만이 인류를 촉진하여 해방시킨다는 선언으로 이어지고 맑스주의는 이것을 계승했다. 레닌도 그런 철학하에 게으름을 쁘띠부루조아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철의 노동규율과 테일러주의에 열광하여 적극 도입을 서두른다. 이것은 스탈린에 의해 완성되는 데 결국 노동은 생산력이고 자본주의의 모순은 생상(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며 자본주의적 소유관계가 나쁜 것은 생산력자체를 질곡으로 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주의란 생산관계의 소유구조를 바꾸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현실사회주의는 따라서 노동 그 자체에 대한 분석과 대안까지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기존 사회주의가 추구했던 해방전략은 진정한 노동해방, 인간해방으로까지 나가지 못하고 단지 노동에 주인이 자본가에서 국가로 변하게 한 것에 불과했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어쨌던(든) 적어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외형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공유했던 가치관이 있다면 그것은 거칠게 말해서 긍정적 노동관이라 할 수 있다.(민주노총 정책연구위원장 이수봉,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위하여, 2009년 2월) 


수정주의가 판치고 시장사회주의 조치가 극에 달하여 실업, 인플레이션 등 자본주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80년대 중반 이후 상황을 예외로 한다면 그전까지 착취가 사라지고 실업을 일소했던 쏘련 사회주의에서 국가가 강제적 일자리 늘리기를 하고 강제노동을 했다는 주장은 그 동안 반공주의자들이 쏘련 사회주의 역사를 왜곡하면서 주구장창 했던 이야기다. 심지어 이들은 맑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화폐물신성을 주장한 것을 가지고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공산당도 그러한 물신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공산당이 노동자 민중들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혁명 이후에 노동자를 지배하고 군림하는 지배계급 정당으로 타락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인류에게 거대한 진보를 가져다주었던 쏘련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진지하고 과학적인 평가 대신에 제국주의자들이 심어 놓은 왜곡된 관점과 진실 왜곡을 바탕으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변혁적 전망을 상실했다.

이른바 ‘신좌파’라 일컬어지는 개량주의자들의 이념 전개 방식은 동일하다. 그것은 바로 스탈린 시대의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해서 레닌과 볼셰비키의 전위정당이 독재정권의 씨앗을 뿌렸다고 비판하고 결국은 맑스주의 자체를 공격하여 맑스레닌주의의 변혁적, 과학적 사상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고 나서 바로 자신들의 개량주의 사상을 펼치는 것이다.


화폐물신주의와의 결전을 회피하는 ‘노동물신화’ 주장

맑스는 자본주의를 물신주의라고 비판했다. 마치 인간이 만들어낸 신과 종교가 인간을 지배하는 물신주의로 나타나는 것처럼,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으로 만들어낸 자본이 노동자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힘이 되는 것이 바로 화폐물신성, 자본 물신성이다. 쉽게 말해 돈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라는 말이다. 기본소득론자들은 맑스의 이러한 자본주의의 물신주의 비판으로부터 ‘노동 물신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은 잔업, 특근에 매달리고 장시간 노동을 자청하는 일중독에 걸렸다. 심지어 유럽에서는 정년연장 반대를 내걸고 싸우고 있는 반면에 한국사회에서는 정년연장이 노동자의 사활이 걸린 요구가 될 정도로 지독한 일중독에 걸렸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일중독에 걸린 것은 기본소득론자들이 사용하는 ‘노동 물신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물론 조합주의에 빠진 노동운동이 기본급 대신에 수당에 매달리고 성과금에 집착하고 물량이 넘쳐날 때 특근을 허용해왔기 때문에 그런 측면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일중독은 자본주의 이윤체제가 강요하는 저임금과 고용불안정, 장시간 노동의 산물이다.

일중독은 바로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자에게 강요하는 물신성의 산물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자본주의 물신주의를 극복하고 노동자가 진정으로 해방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착취체제를 박살내고 노동자가 생산수단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 생산수단의 주인이 된 노동자계급이 사회의 중심이 되어 생산력 발전을 이룩하고 전체 산업의 합리적인 계획체제를 통해 노동자 민중 전체의 물질적, 문화적 발전을 달성해야 한다. 자본주의 이윤체제가 사라진 사회주의 생산관계에서 생산력 발전은 자본주의처럼 적대적 모순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해방과 인류의 진보적 발전을 위해 복무한다.

이 과정에서 레닌이 주장한 테일러주의는 착취가 사라진 사회주의 생산관계에서는 착취의 수단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생산을 조직하는 생산조직 방식이 된다. 사회주의 생산관계에서 신기계, 신기술 도입과 합리적 생산방식은 노동시간 실질적 단축으로 노동자의 인간다운 노동과 풍요로운 삶을 일구는 해방의 무기가 된다.(물론 현실 사회주의에서 이윤과 화폐시장 관계를 강화하는 수정주의가 득세함에 따라 사회주의 생산관계와 생산력은 점점 더 자본주의처럼 적대적 모순으로 변해 갔고 이것이 결국 현실 사회주의를 내부로부터 붕괴시켰다.)

노동해방은 기본소득론자들의 주장처럼 노동으로부터 해방이 아니라 자본가계급의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노동자계급의 해방이다. 노동자들은 노동 일반의 거부가 아니라 착취 없는 노동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노동은 인류가 원숭이로부터 진화하는 결정적 일보의 계기가 됐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연법칙을 인식하고 개조해 들어가는 핵심 수단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노동이 없이는 생존 자체를 하지 못했을 것이고 한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해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은 노동 자체가 안정적인 생존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삶의 욕구가 되고 즐거움이 되는 착취 없는 해방된 노동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기본소득론자들은 화폐와 자본물신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에게 장시간 노동과 일중독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본주의 체제와 결전을 회피하기 위해 도리어 ‘마르크스와 노동에 대한 새로운 의미 규정’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마르크스와 노동에 대한 새로운 의미 규정’은 쏘련 사회주의와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맑스주의의 변혁적, 과학적 사상에 대한 부정이기도 한 것이다.


이행을 거부하는 자본주의 포섭노선

기본소득제는 사회주의 전망을 상실하고 맑스주의의 원칙을 부정하기 때문에 결국은 자본주의를 인정하고 자본주의에 포섭되는 개혁 노선으로 귀결되는 반동적인 노선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보신당 정책위의장인 장석준은 기본소득제가 ‘과도전략’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기본소득제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어떤 과도 전략들을 통해 실현시킬 것인가”라며 “전 국민에게 비교적 낮은 수준의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데서 출발할지, 아니면 상당한 수준의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데서 출발할지가 쟁점이 된다”(한겨레 21, 전 국민이 넉넉한 월급 받는 세상!, 2010.02.05., 제797호) 

장석준의 과도전략은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철폐하고 이 생산관계를 보호하는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타파할 이행전략이 아니다. 장석준의 과도전략은 새로운 생산양식으로 나아가는 과도전략이라는 의미에서의 과도전략이 아니라 전 국민에게 낮은 수준의 기본소득을 먼저 제공하고 나중에 상당한 수준의 기본소득을 제공할지를 가늠하는 의미에 불과하다. 이처럼 기본소득론자들은 역사적으로 개량주의자들이 항상 그랬듯, 자본주의 착취체제와 국가권력과의 일전을 회피하는 자본주의 개혁노선에 불과하다.  

기본소득론자들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금융자본에 대한 역수탈을 강조한다.

금융자본 역(逆)수탈로 재원 조성
재원은 신자유주의 금융수탈체제 종식이란 목표 실현을 위해, 0.15% 세율의 금융거래세와 30% 세율의 자본이득세를 신설해 마련한다.(진보신당기본소득위원회(준), 기본소득 노트)


기본소득제는 투기자본을 통제하고 금융자본 수탈이라는 급진적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금융자본에 대한 수탈은 그 실현가능성도 문제지만 수사의 급진성에 불과하고 자본주의 생산체제를 정면에서 거부하는 주장이 아니다. 원래 금융자본이라는 개념은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은행자본)과 결합으로 금융과두제를 형성하는 독점자본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재벌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이러한 금융자본 체제는 그대로 두고 투기자본을 통제하고 이들 자본에 세금을 때려서 기본소득 재원으로 마련하겠다는 주장에 불과하다. 기본소득론자들은 일관되게 자본주의 생산 자체에 대한 공격은 회피하고 화폐자본의 투기성, ‘기형성’을 바로 잡으려 하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도 기본소득론자들은 자본주의 생산은 그래도 둔 채 자본주의 분배관계의 왜곡만을 바로잡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모순으로부터 자본주의 분배관계의 왜곡이 나타난다.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앞에서 말한 자본물신성처럼 노동자가 착취를 당하고 자신이 만들어낸 노동의 결과로부터 소외된다. 게다가 생산수단을 장악한 자본은 그 힘으로 전체 사회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한다. 여기에는 행정부, 사법부의 고위관료, 입법부의 국회의원도 포함되어 있고 국가기구 자체도 자본의 손아귀에 장악된다. 자본은 노동자에 대한 착취도 모자라서 법인세 감면, 부동산과 주식거래에 대해 세금감면을 하도록 하고, 부가가치세는 올려서 분배관계에서도 자신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와 대결하지 않고서는 분배관계도 개선하지 못할 뿐이다. 복지체제라고 하는 수정 자본주의는 노동자 민중의 격렬한 투쟁의 산물이다. 이러한 복지체제의 역사성을 망각하고 노동자 민중의 투쟁의식을 흐리고 일확천금 식의 한탕주의로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사기치는 기본소득론자의 주장은 그 자체로 유해하고 반동적이다.

노동시간 단축은 상한제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노동시간을 혁명적으로 단축하고 야근, 잔업, 밤샘 등의 초과노동 자체를 금지하는 법을 동시에 만들어야 한다. 최저임금의 획기적 인상과 새로운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 모든 임금 산정의 기초가 되는 최저임금의 기준을 도시 노동자 평균임금이 아닌 상대적 빈곤선 이상으로 정하고, 물가인상률과 자동 연동하는 방식으로 최저임금이 현실화되어야 한다....일자리를 의무적으로 만들어, 단축된 노동시간을 보존해일자리를 나눈다. 일자리 나누기를 위해 감소한 노동시간만큼 의무적 일자리 만들기를 법제화하는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이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고, 충분히 쉬면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노동시간 단축은 강제적일 수밖에 없다.(진보신당, 같은 글)

이들은 노동자에게 유리한 각종 법률 제정으로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최저임금을 획기적으로 인상하고 일자리를 의무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처럼 노동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법률을 제정하기 위해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는다. 

기본소득론자들은 국가의 중립성을 유포하여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흐리고 마비시키려 하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는 누구의 국가인가? 국가는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착취체제의 안정과 재생산에 복무한다. 국가는 독점자본의 국가다. 그것을 우리는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라고 한다. 기본소득론자는 국가권력의 문제를 회피하고 의회를 장악해서 이른바 ‘좌파’ 정치세력들이 기본소득제를 입법화하면 된다는 자본주의 법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고 의회주의를 설파하기 때문에 반동적인 것이다.

이들은 ‘좌파 정권’이 집권하여 기본소득제를 입법화 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에서 노동당, 사회당, 사민당이라는 이름으로 집권했던 ‘좌파정당’들이 결국은 반노동자적이고 반민중적으로 타락해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이들은 그리스에서 시리자(급진좌파연합)를 염두에 두고 좌파정당이 들어서면 기본소득제를 실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대결하지 않고 집권으로 자본주의를 개혁하겠다는 그리스나 스페인 양국에서 이미 집권했던 사회당이 반동적인 정권이 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과 근본원인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공황이라는 자본주의 경제위기가 재정적자를 불러오고 이 재정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좌파’정권들 역시 노동자 민중에 대한 복지를 공격하고 정리해고와 임금, 연금을 공격하는 반동적인 공세를 취했던 것이다.

기본소득론자들은 브라질 룰라 정권 하에서 기본소득제가 추진되었고 지금 부분적으로 시행되고 있고 2014년부터 전면적으로 실시될 것이라면서 충분하게 실현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기본소득제가 브라질 자본주의의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액수인지, 아니면 지금 자본주의에서 계급저항을 막기 위한 조치로 시행하고 있는 기초생활보장비 수준에 그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전면 시행된다고 하더라도 실제 브라질에서 빈곤문제를 척결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더군다나 공황으로 인해 브라질에서 악화되고 있는 노동자 민중에 대한 공세에 대해서도 침묵한다.

기본소득제를 통한 분배구조의 개선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실현가능성에 있어서도 망상에 그칠 수밖에 없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공황과 제국주의 전쟁, 제국주의 전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약소국에 대한 파괴와 대량학살, 부패와 타락으로 얼룩진 자본주의, 인류를 재앙으로 몰아가는 환경재앙, 소외와 범죄의 만연 같이 자본주의의 고유한 모순을 전혀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결국 기본소득제는 자본주의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이해를 가로막고 혼란스럽게 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을 가로막는 반동적 요구다. 기본소득제는 ‘좌파’라는 이름으로 은폐하고 있는 개량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소부르주아 잡사상에 불과하다. 기본소득제라는 요구 위에 기초한 개량주의 세력들은 노동자 계급의 변혁적, 과학적 사상으로 일소해야 한다. <노/정/협>  

한심이
2012-11-22 | 23:41:45 댓글 지우기
- "레닌이 주장한 테일러주의는 착취가 사라진 사회주의 생산관계에서는 착취의 수단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생산을 조직하는 생산조직 방식이 된다. 사회주의 생산관계에서 신기계, 신기술 도입과 합리적 생산방식은 노동시간 실질적 단축으로 노동자의 인간다운 노동과 풍요로운 삶을 일구는 해방의 무기가 된다"구요?

- 노동의 구상과 실행의 분리와 노동에 대한 세세한 통제를 의미하는 테일러주의에서 도대체 무슨 해방을 맛봅니까?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일지라도, 테일러주의는 일부 특정세력(관료, 감독관)이 노동에 대한 통제를 하도록 만드는데, 거기서 무슨 해방이 일어납니까? 사회주의 덕분으로 잉여노동을 빼앗기지 않더라도, 테일러주의에서 노동과정 자체는 억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노동 안에서 무슨 즐거움을 찾습니까? (테일러주의는 사실 자본주의와 본질적으로 연결된 생산주의의 도구입니다. 따라서 사회주의에서 테일러주의를 도입한다는 것은 자본주의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 "합리적 생산방식은 노동시간 실질적 단축으로 노동자의 인간다운 노동과 풍요로운 삶을 일구는 해방의 무기"라구요? 이 말은 테일러주의로 통제되고 힘든 노동을 할지라도, 생산성이 증가되니, 노동시간이 단축되고, 해방은 노동 밖, 여가에서 찾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노정협의 주장은 자신들이 비판했던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주장과 동일하게 됩니다. 즉 해방은 노동 밖에 있다는 주장이 됩니다. 이런 모순적 주장이 어디 있습니까?

- 사회주의에서는 노동과정 속에서도 노동자 자신의 통제가 이뤄지며, 즐거운 노동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테일러주의를 수용하겠다구요? (물론 기술적으로 어쩔 수 없는 극히 제한적 부분에서는 테일러주의를 관료의 결정이 아니라 해당노동자의 합의 하에 수용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 아이디어는 정말 끔찍하군요. 예를 들어 현대차 공장에서 착취만이 문제입니까? 자본에 의한 노동과정 통제도 문제가 아닙니까? 자본이 관료로 바뀌어 노동과정을 통제한다면 문제가 없는 것입니까? 10시간씩 단순 반복으로 나사 쪼여 봤습니까? 먹물이 이 글 썼습니까? 미국식의 반공주의적 소련 비판도 문제지만, 이런 식의 소련 옹호는 긍정적 대안을 구성하는데 방해만 될 뿐입니다. 정신 좀 차리세요.
/한심이
2012-12-01 | 13:57:32 댓글 지우기
맞습니다. 사회주의 세상에서도 노동이 힘든 것 똑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 글에서 "노동자들이 테일러주의를 도입하여 노동에서 해방을 찾고, 즐거움을 찾는다"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착취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관료주의 문제,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경우 관료주의 문제(부분적인 오류)를 해결하려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노동과정을 통제하게 되면 결국 본 글에 나왔듯이 "이윤과 화폐시장 관계를 강화하는 수정주의가 득세"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뼈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이게 되는 어리석음을 범하면 안됩니다.

생산수단을 몰수, 사회화하면 동지가 말한 것처럼 "노동 밖, 여가"시간이 획기적으로 늘고, 실업이 사라집니다. 그만큼 인간이 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지는 특정 어구 몇 개에 얽매여 글을 잘못 해석하신 듯합니다.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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