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10일 일요일

[김수행교수-강의자료]제5강 1997년 한국공황의 원인과 결과

51997년 한국공황의 원인과 결과

 
1. 199712월 한국공황의 전개과정
 
1) 1997년 초부터 한보철강, 삼미특수강, 진로, 대농, 한신공영, 기아, 쌍방울, 해태, 뉴코아 등 대기업이 퇴출(매각, 합병, 법정관리, 화의를 포함)하기 시작했다.
 
2) 대기업들의 퇴출은 은행과 제2금융권에게 부실채권을 부적시키고 손실을 확대했기 때문에, 금융기관은 도산 위험성에 직면해 새로운 신용을 제공하지 않고 이미 제공한 대출을 회수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따른 신용경색 또는 자금부족 때문에 기업의 퇴출이 더욱 증가하면서 금융기관의 부실은 더욱 심화했다.
 
3) 이런 상황에서 외국은행들이 대출기한의 연장을 거부하고 대출의 상환을 요구하며, 외국투자자들이 증권시장에서 증권을 팔아 외화를 본국으로 송금한 것은 당연한사건이었다. 외환보유액이 바닥이 나서 기업, 은행, 2금융권이 외채상환일에 외채를 갚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고, 외환부족, 환율폭등, 파산격증이라는 형태로 공황이 폭발했다. 이에 정부는 19971121IMF에 특별 구제금융(500억 달러)을 요청했으며, 123일에 승인받았다. IMF1218일의 대통령선거일 이전에 특별 구제금융의 조건들에 관해 대통령입후보자들 모두(김대중, 이회창 등)의 보증을 받았다.
 
4) IMF는 신탁통치기간에 미국의 재무부와 월스트리트의 의견에 따라 한국경제를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했다.
 
2. 공황의 원인과 한국경제의 개혁방향에 대한 두 가지 견해.
 
1) 한국경제시스템의 특수성(이른바 아시아 모델’)이 공황의 핵심적 원인이다. 따라서 한국경제를 시장에 맡기는 방향으로 개혁해야 한다. () 아시아모델 견해. IMF나 신고전학파의 주장.
 
2) 한국금융시장의 대내외적 자유화가 아시아 모델의 특수성을 해체함으로써 공황을 야기했다. 따라서 아시아모델을 다시 강화해야 한다. 친 아시아모델 견해. 주로 좌파 케인스주의자와 국가개입 찬양론자의 주장.
 
3) 아시아 모델이 가진 세 가지 특성.
 
) 산업부문은 투자자금을 채권(bond)이나 주식의 발행보다는 주로 은행으로부터 차입을 통해 조달한다. 다시 말해 아시아 모델은 증권시장에 의거한 시스템이 아니라 은행에 의거한 시스템이다.
) 정부가 성장의 전략산업을 선정하고 그 부문에 대해 조세나 금융 면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다시 말해 정부가 산업정책’(industrial policy)을 강력하게 추진한다.
) 이 과정에서 정부은행기업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고, 정부는 이 관계를 주도하고 조정한다.
 
3. 반 아시아 모델 견해
 
1) IMF와 주류경제학자들에 따르면, 아시아 모델에 내재하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와 연고자본주(crony capitalism)가 공황 발생의 주된 원인이다.
 
2) 기업의 투자 실패에 대해 정부가 금융지원 등의 수단을 통해 대부분 구제해 주기 때문에, 기업이나 은행은 위험을 고려하지 않고 무모한 투자나 대출을 함으로써 공황을 야기했다(도덕적 해이).
 
3) 또한 정부 기업 은행 사이의 밀접한 관계로 말미암아 대부와 투자가 사업의 경제적 수익성보다는 정실과 뇌물수수에 의거해 결정됨으로써 부실대출, 채무누적 및 금융위기를 낳았다(연고자본주의).
 
4) 이 견해의 문제점: 반 아시아 모델 견해는 경제공황이 도덕적 해이나 연고자본주의 없이도 발생한다는 점에서 이론적으로 타당하지 않고, 한국에서는 공황 이전에 이미 아시아 모델이 크게 무너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실증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4. 친 아시아 모델 견해
 
1) 좌파 케인스주의자와 국가개입 찬양론자에 따르면, 아시아 모델은 한국경제의 안정된 고도성장을 달성하는 데 핵심적 요소였으며, 따라서 한국의 경제공황은 이 모델의 약화 또는 붕괴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IMF, OECD, 미국 정부의 요구와, 서방의 은행과 기업들의 요구 때문에, 한국 정부는 1990년대 중반에 금융부문에 대한 규제를 급진적으로 해제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기업의 해외차입과 해외투자에 대한 통제가 제거되었으며, 기업들의 차입과 투자에 대한 조정이 폐지되었고, 또한 은행에 대한 감독도 소홀해졌기 때문에, 공황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 이 견해의 장점: 금융자유화가 기업의 부채비율을 증가시키고,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증대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점, 그리고 자본자유화는 거액의 단기해외자본의 급속한 유출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외환위기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도 동의할 수 있다.
 
3) 이 견해의 단점: 친 아시아 모델 견해는 정부개입이 한국자본주의의 경기순환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고 과대평가하고 있으며, 또한 아시아 모델의 내재적 약점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 아시아 모델이 한국의 경제기적에 기여했다고 할지라도, 공황 없는 안정적 성장을 항상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과 같은 수출주도형의 소국 개방 경제에서는 경제의 성장과 안정은 해외상황의 변화에 의해 매우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정부의 통제와 조정을 통해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달성하기에는 큰 한계가 있었다. <그림 5-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국경제는 197310월의 제1차 석유파동과 1979-80년의 제2차 석유파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ii) 이들의 아시아 모델 예찬은 아시아 모델이 독재특혜부패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한국 국민의 정서와 크게 모순된다. 나치체제가 독일경제의 위기를 일시적으로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누가 나치체제를 찬양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아시아 모델이 경제적 기적을 이룩한 진정한이유는, 미국의 도움, 세계시장의 호황과 같은 외부요인을 제외한다면, 이 모델이 자본가들로 하여금 직접적 생산자들(노동자와 농민)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는 것, 소수의 대자본으로 하여금 중소자본을 수탈해 모든 잉여가치를 자기에게 집중시키는 것, 그리고 모든 이용가능한 대내외 자원을 특정의 성장산업에 집중시키는 것에 아주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아시아 모델의 핵심은 정부와 독점적 대자본의 결탁이었다. 부실기업정리---1969-72(일본차관 기업의 정리), 1979-81(중화학공업의 중복투자 정리), 1984-88(해운회사와 건설회사 정리)---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정부는 기업의 과잉설비를 해소하고 금융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재벌들에게 특별융자, 채무상환 중단과 같은 특혜를 주어 부실기업의 인수와 합병을 유도했으며, 그 부담은 은행과 정부, 궁극적으로는 국민들이 졌다.
 
iii) 이들은 자본자유화--->해외자본의 급격한 유출이 국내의 금융공황과 외환위기를 유발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대기업들의 파산과 금융기관의 부실여신 증대로 말미암은 국내의 금융공황 때문에 해외자본이 급속하게 유출되었던 것이다. 해외차입의 만기갱신율이 크게 감소한 것은 199711월 이후이며, 자본순유입이 자본순유출로 돌아선 것도 1997년 말에 이르러서 이기 때문이다.
 
5. 새로운 견해
 
1) 1997년 말의 한국 공황은 자본주의 경제 그 자체의 본성인 주기적 순환의 한 과정으로 전개되었으며, 당시의 한국경제가 가지고 있었던 제도적 특성들이 이 공황을 더욱 더 악화시켜 외환위기와 경제적 파국으로까지 몰고 갔던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경제공황은 연고자본주의나 도덕적 해이와 같은 한국자본주의의 특수성에 의해 야기된 것도 아니며, 또 금융자유화에 따른 아시아 모델의 해체에서 온 것도 아니다. 나는 1997년 말의 공황이 자본주의 경제에 내재하는 정상적인 주기적 공황이라고 이해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과잉투자, 과도한 차입과 대출, 이윤율 저하, 금융취약성, 산업공황과 금융공황은 주기적으로 발생한다. 기업의 높은 부채비율, 대내외적 금융자유화, 산업과 금융에 대한 정부 통제력의 약화와 같은 제도적 요소들도 공황 발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들은 주기적 공황을 확대시키고 악화시킨 제2차적 요소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2) 1990년대 전반부에 재벌들은 전자 반도체 자동차 철강 석유화학 등의 산업에 대대적인 투자를 시도했다. 그 당시에 한국경제는 저기술 저단가 품목에서는 중국과 동남아시아에 경쟁력을 잃은 상태였고, 고기술 고단가 품목에서는 일본이나 다른 선진국을 따라 잡을 수 없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세계시장에서 국제경쟁은 더욱 더 격렬해졌고, 세계시장 규모는 점차 작아졌기 때문이다.
 
3) 이 거대한 투자자금은 금융자유화와 자본자유화에 따라 정부의 통제와 조정을 받지 않은 채 국내 금융기관과 해외은행으로부터 조달되었으며, 대기업의 부채비율은 대폭 상승했다. 물론 해외의 투자자나 외국은행들은 한국경제의 발전 전망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한국에 대출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 해외부채는 급속히 증가해, 총외채가 1993년 말의 439억 달러에서 1996년 말에는 1,635억 달러로 무려 세 배 이상이나 증가했다. 여기에 더해 정부는 장기해외자본보다는 단기해외자본의 차입을 더욱 장려했는데, 그 이유는 한국경제가 앞으로 더욱 높은 신용등급을 받을 수 있어 더 낮은 이자율을 지불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단기자본의 비중은 총외채의 55%에 달할 정도였다.
 
4) 반도체 철강 석유화학 등 핵심 수출품이 수출량의 정체나 감소, 또는 수출단가의 하락에 부닥침으로써, 그 동안의 투자가 과잉투자로 판명되었고, 이에 따라 설비가동률이 저하해 수익률이 저하했다. 수익률의 저하로 부채의 원리금을 상환할 수 없게 되어 파산상태에 빠진 것이다.
 
5) 한국의 대기업들이 파산상태에 빠지고, 여러 금융기관들이 대규모의 부실채권을 안고 있을 때, 해외투자자들이 새로운 대부는 물론, 기존의 대부를 연장해 주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고, 이에 따라 한국의 채무자들은 만기일에 해외채무를 상환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외환위기는 총외채 중 단기부채의 비중이 너무 높았다는 사실과, 정부가 환율을 낮은 수준에 유지하기 위해 1997년에 대규모의 외환보유고를 사용했다는 사실(김영삼 정부는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하기 위해 환율 인상을 저지하려고 했다)에 의해 크게 악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6. 공황에 대처하는 방법의 문제점
 
1) 정부는 파산 위기에 처한 은행과 금융기관을 구제하기 위해 공적 자금을 투입했다.

199711월부터 200711월 말까지 투입한 공적 자금의 잔액은 168.4조 원이다. 부실 금융기관에 출자해 현재 주식을 가지고 있는 금액이 63.5조 원이고, 부실 금융기관을 인수한 금융기관의 손실(=자산을 초과한 부채)을 메워준 돈(출연)18.5조 원이며, 파산한 금융기관을 대신해 예금자와 투자자에게 대신 갚아준 돈이 30.3조 원이고,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을 매입한 금액이 38.6조 원이다. 은행과 금융기관이 부실 경영(투기, 방만한 경영, 경영진의 지나치게 큰 봉급, 부정 부패 등)으로 입은 손해를 국민의 혈세로 갚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자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서민이나 실업자나 신용불량자에게는 그렇게도 자기의 책임을 강조하는 정부가 어떻게 은행 행장이나 이사들이나 거대한 예금자와 투자자에게는 그렇게도 관대한가?
예금 중 1인당 5천만 원을 은행이 책임지고 예금자에게 돌려준다는 예금보험제는 이런 일이 있는 뒤 도입된 것이다. 그리고 금융기관의 주식을 정부가 계속 지니고 있으면서 금융기관의 공공성을 확립하지 않고 왜 자꾸 매각하려고 하는가? 은행과 금융기관은 처음부터 공공기관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정부는 법률을 통해 그들에게 사적 이윤의 추구에 일정한 제한을 가해, 서민들에 대한 소액 대출을 풍부하게 제공함으로써 서민들을 고리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며, 서민들에게 주택담보대출(모기지)을 유리한 조건으로 제공하고, 총대출 중 일정한 비율을 중소기업에게 대출해야 할 것이다.
 
2) 1997년 말의 외환(외채)위기는 국제금융자본가들의 책임도 컸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국경제가 앞으로도 고도성장을 계속하리라고 기대해, 한국의 기업과 금융기관에 너무나 큰 대부와 투자를 행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의 잘못된 판단에 대해 책임을 져야했다.
1983년 멕시코 정부는 외채상환이 어려워지자 IMF와 미국 정부에게 외채 지불불능(default)을 선언할 수밖에 없다고 통보했다. 미국의 거대한 채권은행들은 놀라서 여러 가지 타협안을 제시했다. 원금과 이자의 일정 부분을 탕감할 것이며, 이자율을 낮추고 원리금의 상환기간을 연장하며 추가적인 자금을 지원하겠으니 제발 지불불능을 선언하지 말라고 애원한 것이다. 만약 멕시코가 지불불능을 선언하면 미국의 채권은행의 손익계산서에 그만큼 손실이 당장 증가할 것이며, 고객들은 그 은행이 위험하다고 믿어 모든 거래를 중단함으로써 그 은행을 파산시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왜 한국 정부는 이렇게 하지 못했을까?
 
3) IMF와 미국 정부는 한국의 외환위기를 올바르게 처리할 의도가 처음부터 없었다. 
올바른 방법은 마치 국내의 은행들이 부실 대기업을 퇴출시키지 않은 채 채권과 채무를 일단 동결하고 워크아웃(work-out. 기업개선작업)을 시도하는 것처럼, IMF와 미국 정부는 비밀리에 달러를 지원하거나 채권과 채무를 일단 동결한 뒤 외채상환작업을 천천히 진행시켰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IMF와 미국 정부는 한국에 외환위기가 일어나고 있다.”고 소문을 냄으로써 다른 은행들이 한국에 대출하는 것까지 막은 것이다. 이리하여 외환부족으로 한국의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지불불능에 빠지게 되자. IMF와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에게 원리금 상환의 모든 책임을 떠맡을 것을 요구한 것이다. 1997123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IMF의 신탁통치를 받게 되었고, 그 뒤 외국 채권은행들의 단기차관을 장기로 전환시키는 교섭과정에서 정부가 원리금 상환을 보증하고 국제금리보다 훨씬 높은 금리를 지불하기로 한 것이다. 미국 정부와 IMF 및 월가가 한 통속(IMF-Treasury-Wall Street Complex)이 되어 한국을 수탈한 것이다.
 
 * 출처 및 링크 : 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 http://www.democrac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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