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2일 토요일

협동조합, 물류 혁신의 실마리



협동조합, 물류 혁신의 실마리 (7)
BY admin   |  201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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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주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99%의 경제
HERI의 시선

우리의 물류산업은 신규진입 증가, 영세사업자 양산, 다단계거래 만연 등으로 업체 간 양극화와 시장의 불안정성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 화물차주의 집단운송 거부로 야기된 2003년의 첫 물류대란 이후 정책당국은 다양한 시장개선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 하지만 정책효과는 기대에 미치고 못하고 있다. 시장 내부의 자발성보다는 정책당국의 의지에 지나치게 의존한 탓이 크다.

이런 때에 다음달 1일부터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된다. 5인 이상의 조합원만 확보되면 자유롭게 협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기본법 시행은 물류시장에 자발적 혁신의 단초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근거를 보자.

첫째, 협동조합이 물류시장에 성공적으로 도입되면 ‘영세사업자 중심의 개별경영’에서 ‘조합 중심의 협동경영’으로 시장기조가 바뀌게 된다. 협동경영은 시장 내 갈등을 완화시키고, 규모 및 범위의 경영이 발휘되도록 작용할 것이다. 둘째, 생협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협동조합은 생산자와 소비자 간 직거래로 중간거래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경영구조를 보유하고 있다. 협동조합이 활성화하면 고질적인 다단계거래와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가 완화되어 거래의 신뢰성이 크게 제고될 수 있다. 셋째, 영세 물류사업자가 협동조합에 편입되면 고용과 경영안정의 도모가 가능해져, 결과적으로 물류시장의 양극화 완화로 이어진다.

다만, 물류시장에서 협동조합이 안착하기까지 넘어야 할 과제도 많다. 먼저 시장주체들의 협동조합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떨어진다. 제조업과 달리 물류산업이 동적 서비스산업이라는 점도 걸림돌이다. 매일 전국을 돌아다니는 화물차주가 경영에 참여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생계형 자영업자나 특수고용직 종사자가 많아 협동조합의 설립 자금 확보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 도입 초기에는 원청업체나 거래업체의 비협조 문제도 만만치 않다.

결국 물류시장에서의 협동조합 안착 여부는 시장의 속성과 산업 현실에 맞는 체계적인 지원책 마련에 달려 있다. 우선 협동조합에 대한 교육과 홍보체계 구축이 중요하다. 교육과 홍보는 협동조합의 활성화 못지않게 설립에 따른 시장에서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섬세하고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의 뒷받침도 요구된다. 다만 농협 등 기존 협동조합의 육성과정에서 야기된 문제점을 고려해볼 때 보조금 등 직접지원방식은 지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지막으로 협동조합 설립을 막는 제도적 장벽은 없는지, 개별법 및 제도에 대한 체계적 검토와 개선 조처도 필요할 것이다.

물류시장에서의 협동조합 안착은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경제민주화의 실천 내지 지속가능발전과도 연계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정책당국과 이해관계자 모두 중지와 지혜를 모아야 하는 이유이다.

정승주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12년 12월 18일 화요일

[김갑수 소설가님 글]박정희에게 쿠데타 혼(魂)을 심어준 ‘소화정변’의 군인들

박정희에게 쿠데타 혼(魂)을 심어준 ‘소화정변’의 군인들
극우 아베의 재집권과 일본의 ‘수구꼴통’들 - ①

지난 16일 실시된 일본 총선에서 자민당이 압승함으로써 극우주의자 아베가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아베는 태평양전쟁 전범 기니의 손자이기도 하다. 그는 역사왜곡을 주도하는 단체의 든든한 후원자이고 종군위안부를 "꾸며낸 얘기"라고 공언하는 일본 정치인이다. 일본에서 극우파가 다시 집권한다는 것은 한국에 대단히 심장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에서 극우가 권력을 쥐었던 시간에는 어김없이 한국인의 긴장과 불행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는 미국과 중국과 일본 세 나라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특히 일본은 한국을 무력 지배한 나라이며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에 개입했고 오늘날 한미동맹의 가장 큰 변수이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 극우파 아베가 압도적인 표차로 재집권하게 된 것은 일본에 ‘극우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언론과 국민 다수는 눈앞의 대선 때문인지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사실 대선이 아니라고 해도 한국의 언론과 국민은 국제정세에 대한 관심이 매우 낮은 편이다. 나는 일본의 극우를 마음 편하게 ‘수구꼴통’으로 호칭하고, 몇 차례 글을 통해 그들의 본질을 공개함으로써 우리의 타산지석으로 삼고자 한다.

일본 수구꼴통들의 발호는 한국 수구꼴통들의 동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분명히 한국의 수구골통들에게는 일본의 수구꼴통들을 흠모, 효칙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쿠데타의 원조 박정희의 후예가 집권할 것인지가 판가름 나는 기로에 서 있다. 무서운 위기의 시간이다. 박정희의 쿠데타는 일본 수구꼴통의 쿠데타 혼(魂)을 이식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1937년 일본 관동군 육군 수뇌부는 자작극으로 만주 철도를 폭파하고, 그것을 중국 측 소행이라고 뒤집어씌우며 전장을 확대한다. 관동군은 만주와 외몽고 그리고 화북까지 전선을 넓혀간다. 당연히 호전적인 관동군 병력이 소련 군사 주둔지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소련과의 충돌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화북에서 관동군을 철수시키는 대신 만주 지배권을 확실히 못 박는 선에서, 중국과 휴전하려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런데 일본 육군본부는 이에 반대했다. 피 흘리며 화북까지 쳐 올라간 제국군대의 ‘대화혼(大和魂)’에 흠집을 낼 수 없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쿄 시내에 폭설이 내렸다. 시내 전부가 하얀 눈으로 덮여가고 있었다. 미명이 걷혀가는 새벽이었다. 때 아니게 요란한 총성이 겨울의 냉기를 찢었다. 시민들은 시내 다른 지역에 사는 친척이나 친구에게 전화로 이 소식을 알렸다. 그런데 친척이나 친구가 사는 지역에서도 총소리가 울렸다고 했다. 그 날 아침 도쿄 시내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린 지역은 줄잡아 10곳 이상이었다. 시민들은 총성이 울린 곳이 하나같이 정부요인이 사는 동네란 것을 알아차렸다.

첫 총성이 울리고 불과 24 시간 동안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수상은 굴뚝 속으로 몸을 숨겨 목숨을 겨우 건졌지만, 일본제국의 내무대신, 재무대신, 교육총감 등이 살해되었다. 뿐만 아니라 천황의 측근들마저 추가로 살해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천황의 궁정대신까지 죽인 것은 실수였다. 아무튼 경시청과 육군성과 참모본부 등이 1,500명의 육군 병사들에게 장악되었다. 이 쿠데타를 주도한 것은 겁 없는 청년 장교들이었는데. 그들은 호전적인 관동군 수뇌부와 교감하던 (마치 박정희와, 전두환의 하나회처럼)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거사를 '명치유신'에 버금가게끔 '소화유신'이라고 명명했다. 난동 청년 장교들의 서슬에 공포를 느낀 정부와 군 수뇌부는, 그들을 사태 수습의 계엄군에 편성시켜 권력을 쥐게 함으로써 그들의 유혈거사는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반대한 것은 그들이 숭배해마지 않는다는 천황(실감을 위해 일본식으로 호칭함)이었다. 천황은 나름대로 그들의 약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천황은 지체 없이 쿠데타군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철없고 흉악한 것들이 내 오른팔 같은 궁정대신을 죽이더니, 이제는 내 목까지 조이려 드는구나."

천황은 쿠데타군을 즉각 제압하라고 명령 내렸다. 천황의 일갈로 사태는 일순 역전되고 말았다. (아마 일본인들만큼 종교적인 민족도 없을 터이다. 이는 태풍이나 지진, 화산 폭발 같은 자연 조건 때문이라고 보는 학자가 많다.) 당시 천황은 일본 종교의 살아 있는 교주였다.

일이 그르친 것을 깨달은 주동 장교들은, 영예로운 죽음을 택하겠다고 하면서, 천황에게 자결 명령을 내리는 칙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구했다.
천황은 즉각 응답했다.

"죽든지 말든지 너희들 맘대로 해라."

천황은 칙사 파견을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주모자 17명을 체포해 사형에 처해 버렸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그들은 죽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국민들의 성향에는 전에 없던 변화가 나타난다. 기존의 종교기질보다 파시즘이 더 우세하게 된 것이었다. 수많은 수구꼴통들이 생겨나면서 청년 군인들이 외쳤던 이른바 '대화혼'에 공감을 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불과 1년 후 파시즘의 광기가 일본 열도를 휩싸게 된다. 결과로 일본은 350만의 병력 중 200만이 넘는 병력을 대중국 전에 투입해야 했고, 이는 태평양전쟁의 도발과 패망 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한일 역사가들은 2,27 쿠데타의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한다. 쿠데타란 국가에 대한 강간과 같은 것이어서 국민의 심리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다. 소화정변이 그렇다. 오늘날 고이즈미나 아베 등의 일본 현대 수구파들은 이 쿠데타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정말 의미심장한 것은 2·27 코데타의 잔여자들이 모두 박정희의 선임자들이라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박정희는 일본 소화정변 주모자들을 흠모하는 군인이었다. 친일과 독재는 뿌리를 공유한다. 요컨대 일본군 소화정변의 ‘대화혼’이 이식되어 5·16 쿠데타가 되었다는 것이다.

2012년 12월 8일 토요일

[김갑수소설가] 왜 이정희는 죽이고 박정희는 살리려 하는 거니?

왜 이정희는 죽이고 박정희는 살리려 하는 거니?
<한겨레신문>과 <오마이뉴스>의 기회주의적인 이중잣대              - 김갑수 소설가 페이스북 퍼옴 -

“충성 혈서를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 누군지 아실 거다. 한국이름 박정희.” 
- 이정희 후보

이정희의 대선후보 토론회 발언이 엄청난 파급력을 보이자 <한겨레>와 <오마이>에 약간 수상쩍은 기사가 동시에 실렸다. 두 기사는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약화, 희석시킴으로써 이정희 발언을 견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먼저 <한겨레>는 현직 기자들이 공동집필한 ‘박정희, 일왕에 혈서쓰고 일본군 장교됐나?’ 제하의 기사를 통해 <만주신문>에 근거한 민족문화연구소의 ‘혈서론’을 전한 후 이에 반대하는 우익단체의 주장을 대등하게 소개했다. 

- 이 후보 주장처럼 일왕에게 혈서로 충성을 맹세했다는 부분은 우익단체를 중심으로 조작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런데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일본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혈서를 보낸 사실이 1939년 3월 <만주신문>에 실린 사실과 신문 원본을 찾아내 이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면서 국내에 알려졌다. 일본 국회도서관에도 보관돼 있는 <만주신문> 1939년 3월31일치에는 “경상북도 문경 공립소학교 훈도(교사) 박정희(23)군의 피로 쓴 편지가 송부돼 관계자를 감격시켰다”는 기사가 당시 박 전 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박 전 대통령이 당시 연령 초과로 군관학교 시험에 탈락하자, ‘혈서’와 함께 입학허가를 호소하는 편지를 지원서류에 동봉해 제출했다는 소문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우익단체에서도 <만주신문>의 보도 사실 자체는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만주신문>이 보도한 편지 내용에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박 전 대통령이 편지를 보낸 1939년에는 만주계만 모집(1940년부터 일본계로 확대)했기 때문에 해당 기사의 신뢰가 떨어진다는 반론도 있다.
- <한겨레> 기사 중에서

<한겨레>가 언제부터 이토록 극우단체의 날주장을 존중해주었는지 모를 일이다. 박정희의 ‘진충보국멸사봉공(盡忠報國滅私奉公)’ 충성혈서는 사료적 문헌과 증언이 멀쩡히 존재한다. 이런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다루면서 양측 주장을 기계적으로 형평화하는 기사 생산법은 조중동이 익히 써오던 수법 아닌가? 게다가 이 기사가 말하는 ‘우익단체’는 대관절 뭐 하는 단체인지 고유명사로 된 이름조차 명기하지 못했다.

다음으로 <오마이뉴스>는 ‘오카모토 미노루', 박정희 창씨명 아니다’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를 쓴 정운현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은 친일문제의 전문가이자 <실록, 군인박정희>의 저자이기도 하다.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에 비하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 實)'는 훨씬 더 친일성향이 노골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가 군관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혈서'를 써서 보낸 바 있는데 이는 당시 그의 나이가 많아 입교가 어렵게 되자 입교를 목적으로 일종의 '충성맹세'를 보여준 것이다....그러나 군관학교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해 일본 육사 유학 특전까지 얻은 그가 일본 냄새가 짙은 이름으로 다시 창씨개명을 해야 할 필요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오카모토 미노루'가 박정희의 두 번째 창씨개명이라는 주장은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본다.
- <오마이뉴스> 기사 중에서

이 기사가 지적하고 있듯이 ‘오카모토 미노루’는 ‘다카키 마사오’보다 한 층 친일적인 이름이다. 다카키 마사오에는 ‘고령박씨, 정희’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오카모토 미노루’는 완벽한 일본인 이름이다.

(* 이 기회에 나는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에 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보아 좀 길더라도 자세한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자 하니 읽어주셨으면 한다.

창씨(創氏)란, 씨를 바꾸는 게 아니고, 말 그대로 ‘씨를 새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개명(改名)이란 당연히 이름을 고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일제는 조선인에게 창씨만 강요했을 뿐 개명까지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다카키 마사오처럼 창씨와 개명을 둘 다 한 사람은 일단 친일파일 가능성이 있다.

일제는 성을 목숨처럼 여겼던 조선인에게 창씨개명이 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을 바꾸지 말고 하나 더 만들라고 했던 것이다. 일제는 조선인이 창씨를 안 할 경우, 각종 인·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여행을 불허했다. 무엇보다도 교육열이 높은 조선인에게 자녀의 학교 재학을 불가능하게 만든 점이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일제는 창씨가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누가 보아도 창씨를 할 만한 사람 중에 일부를 골라 창씨를 하지 않도록 관리하거나 방임했다. 예컨대 비행기를 헌납한 박흥식, 중추원 고문 한상룡, 일본 대의사를 지낸 박춘금 같은 이도 창씨를 하지 않은 골수적인 친일파였다. 그러므로 창씨 여부를 가지고 친일의 잣대를 삼을 수는 없다.

물론 창씨개명에 날카롭게 저항한 조선인도 있었다. 전남 곡성의 58세 유건영은 창씨제에 대해 엄중한 항의서를 미나미 총독에게 보낸 후 자살했다. 전북 고창의 의병 출신 설진영은 창씨 통보를 받자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창씨를 시킨 후, 자신은 조상 볼 낯이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돌을 가슴에 안고 우물로 뛰어들었다.

한편 조선인들이 혈통의 족보를 지키려한 노력은 눈물겨웠다. 김씨의 경우 ‘원래 김씨’였다는 의미로 김원(金原) 또는 김본(金本)으로, 안동 권씨는 안권(安權)으로, 하동 정씨는 하동(河東)으로, 전주 이씨는 조선의 본가라고 하여 조본(朝本), 노(盧)씨는 시조가 용강 쌍제촌에서 우거했다고 하여 강촌(岡村) 그리고 박정희의 본관 고령박씨는 고목(高木)으로 표기했다.

물론 개중에는 친일의지와 출세욕 때문에 적극적으로 창씨개명을 한 이도 있었다. 친일 승려이자 조계종의 실권자 이종욱은 일본 외무대신 히로다의 성을 본떠 히로다 쇼이쿠로 창씨했고, 중추원 참의 최지환은 일본의 후지산과 정한론자인 다카모리의 이름을 따서 후지야마 다카모리로 창씨에 개명까지, 주요한도 일제의 황도 정신인‘팔굉일우’를 따서‘마쓰무라 고이치’라고 창씨에 개명까지, 이광수도 일본의 시조 천황 진무가 즉위한 산의 이름 향구산에서 ‘향산’을 따고 일본의 남자 이름에서 많이 사용하는 ‘랑’ 자를 써서 향산광랑(香山光朗)이라고 씨와 이름을 모두 완전 왜색으로 만들었다.)

이와 같은 이치로 오카모토 미노루는 완전 일본식 성명으로서 박정희가 적극적인 친일파라는 방증이 된다. 그런데 <오마이뉴스>는 ‘오카모토 미노루', 박정희 창씨명 아니다’라고 단정하는 제하의 기사를 내보낸 것이다. 박정희의 2차 일본명 오카모토 미노루는 일본 『육해군총합사전』에 등재되어 있으며 박정희 시절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회고록 『혁명과 우상』, 재미 기자 문명자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역사학자 최상천의 『알몸 박정희』등에 기록되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일본 『육해군총합사전』이 일본 정부의 공식기록이 아니라 도쿄대학 출판물인 데다 개인 저작이라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식민지시대의 기록을 가해국인 일본의 공식기록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또한 도쿄대학 출판부에서 발간한 이 사전이 개인물판물이어서 안 된다는 주장도 가당치 않다. 이 세상 저작물의 99% 이상은 개인 출판물 아닌가?

또한 오카모토 미노루는 북한 <노동신문>에도 보도된 바 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북한의 주장이기 때문에 날조된 것이라고 한다면 발생학적 오류가 된다. 빗대어 말하자면 ‘분석철학은 제국주의국가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철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식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오마이뉴스>의 주장은 식민사관을 만든 친일사학자 이병도 류의 기만적 실중주의 또는 과도한 문헌주의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정희의 발언이 큰 파급력을 행사하자마자 나왔다는 점에서 그 의도가 더욱 석연치 않다.

무엇보다도 <한겨레>와 <오마이>는 지난 5월 이래 생판 날조된 진상보고서 하나를 근거로 이정희와 통합진보당을 죽이는 데 앞장섰다. 당시 그들은 일말의 사실보도는커녕 이정희의 주장을 외면하면서 유심노조 등 협잡 정치인들 편만 일방적으로 들지 않았던가? 그랬던 그들이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또 이정희 파급력을 잠재우기 위한 기사를 남발하고 있으니 그들이야말로 ‘친노어용언론’이라는 말을 백 번 들어도 싸다 할 수밖에 없다.

[김갑수 선생님 글] 세상에 이런 역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인가?

“세상에 이런 역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인가?”
-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들... 당선되더라도 박근혜를 인정하지 않으련다 -               김갑수 소설가 페이스북퍼옴

세상에 이런 역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점령국의 군인이 피점령국의 대통령이 되어 18년, 그의 양자 전두환이 7년, 전두환의 동생 노태우가 또 5년, 그리고 한 세대가 엄연히 흘렀음에도 또 다시 그 점령국 군인의 따님이 민선 대통령에 오를 수가 있다는 것인가? 게다가 그들은 하나 같이 같은 지역의 수구 패거리들... 나는 설사 박근혜가 당선된다 해도, 아니 압승을 거둔다고 해도, 그를 결코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인가? 이름 없이 죽어간 무장항쟁 독립군들은 도대체 누구였던가? 상해에, 노령에, 북간도 서간도에 누워 있는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들..
.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 따님을 인정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추위에 떨고 배고픔에 주렸던 그들, 의복 하나 제대로 걸치지 못했던 그들, 모래알 같은 조밥에 날된장 저린무를 먹고 살았던 그들, 그마저 떨어지면 좁쌀가루에 소금을 섞어서 먹으며 견뎠다는 그들,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들...

백 근이 넘는 무장을 하고 하루에 백오십리 길을 행군하기도 했다는 그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는 보통이라고 말했던 그들, 솜 군복이 지급되면 환호작약했던 그들, 소독약이 없어서 상처 구멍을 째서 숯가루를 우겨 넣어 화농을 막았던 그들, 큰 부상을 입으면 동지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자살로 해결하기도 했던 그들,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들...

어떤 때는 조국을 증오하기도 했다는 그들, 바이칼의 빙설을 물들이며 수백 개 꽃잎 모양으로 도살된 그들, 계곡의 하얀 빙설에 동지들의 피가 얼룩지고, 그 피 향기를 시베리아의 바람이 휩쓸어 갈 때 조국을 증오해 보았다는 그들,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들...

이 모든 것들을 떠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가장 큰 형벌이었다는 그들, 행군 중에 조국의 풀포기와 닮은 것을 보게 되면 포개서 호주머니에 넣었고, 조국의 산천을 닮은 산자락이 나타나면 울컥 눈자위가 벌개졌다는 그들. 그리하여 조국을 그리는 향수가 금수와 다를 바 없는 본능이 되어 달밤에 개 짓는 소리 하나에도 흥분했던 그들,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들...

그들의 유골이 아직 눈을 감지도 못한 채 해골을 조국 쪽으로 향해 굴리고 있을 터, 세상에 이런 역사가 또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아버지 할아버지들을 두고서 일본군인의 딸을 또 다시 대통령으로 만드는 나라가 정상일까? 그 나라의 백성들이 제 정신일까? 그 손가락들이 사람의 것일까? 아버지 할아버지를 부정하면서 살아간들 또 뭐 한단 말인가? 다시 천명하노니 나는 죽어도 그 따님을 인정할 수가 없다.

2012년 12월 2일 일요일

우리는 지난여름 너희들이 한 짓을 알고 있다 -김갑수선생님

선거운동의 핵심은 <진보의 진실>을 알리는 것이다
- 우리는 지난여름 너희들이 한 짓을 알고 있다 -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를 비롯한 선대위·당원 분들의 분투는 감동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늘 아침 페북에서 성남 ‘언니당원’들의 율동을 담은 동영상을 보았다. 노래와 율동은 흥겨운 것이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울컥 뜨겁게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저들의 순수한 몸놀림, 온갖 정한이 배인 얼굴얼굴들...그러나 차가운 대기는 응답 대신 그들의 하얀 입김들만 속속 잠적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해야겠다. 한국의 유권자는 총선에서 8~10%, 대선에서 3~5% 정도 진보당에 표를 주어왔다. 아직 여론상 수치가 표면화되지 않는 이유는 여론조사 때 진보당을 지지한다는 점을 노출하지 않는 유권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감안하더라도 노력에 비하여 현실적인 성과가 미약한 것이 사실이다.

왜 그런 것일까? 통합진보당의 정책과 후보가 훌륭하다는 것을 아는 유권자는 많다. 정권교체도 중요하지만 미래에 착목하여 진보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머뭇거리고 있다. 아직도 부정선거 집단이라는 의구심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은 나름대로 알렸고,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여전히 진보문화권력이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현실에서, 정치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는 시민들이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선 전략상 정책 홍보도 중요하지만 지난여름 있었던 ‘진보의 진실’을 더 알리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한다. 복잡한 진실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려면 ‘상세(祥)하면서도 요약(節)’된 정보라야 한다. 아래는 거칠게 만들어 본 ‘진보의 진실’ 이른바 ‘진보상절’이라고나 할 수 있으려나.

1.유시민·심상정·노회찬은 차기 대선에서 민주당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지자 야권연대의 주체가 되려는 욕망을 공유했다. 이미 사태의 수괴 유시민과 심상정은 경기도지사 선거 이래로 밀월관계를 유지해왔다.

2.그래서 그들은 통합진보당과 위장합당한 것이다. 심상정은 일단 진보세력의 대선후보가 된 후 궁극적으로는 차기 정부의 총리직을 목표로 했다고 하는데. 민주당 측에서는 노동장관 직을 제의했다고 한다.

3.그들은 야권연대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통합진보당의 당권과 대선후보직을 거머쥐어야 했다.

4.일단 그들은 자파 국회의원을 최대한 당선시키기 위해 당내 비례대표 선거부정을 감행했다.

5.그러나 총선 결과 의석수를 통해 당권을 장악하려는 1차 목표가 실패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기들의 부정행위가 드러날 위기에 봉착했다.

6.그들은 자기들의 부정행위도 호도하면서 자파의 의석수도 늘리고 나아가 이정희의 대선 출마까지 봉쇄하려는 삼중 노림수를 모색했다.

7.이것이 지난 5월 초 유시민 사주를 받은 조준호의 통합진보당 선거 총체적 부정·부실 자해 폭로로 현실화된 것이다.

8.그들은 당원 투표로 뽑은 비례의원을 당직자 표결로 사퇴시키려는 비민주적인 폭거를 획책했다. 그리고 여기에 교묘하게도 이정희의 백의종군까지 은밀히 덧붙여 놓았다. 이에 당원들, 특히 이정희 지지자들이 반발한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이른바 5·12 ‘폭력사태’인데, 날치기나 불법적인 의사 진행을 실력으로 저지하는 것은 미관상 좋지는 앉지만 불가피한 일이다. 노무현 탄핵 국회나 미디어법 날치기 국회 등을 생각해 보면 된다.

9.‘폭력사태’ 이후 조중동 및 친노언론의 융단폭격과 마녀사냥으로 이정희 세력이 다 죽었다고 지레 판단한 심상정은 머리염색에 얼굴미용을 하고 TV 백지연 프로그램에 나가 ‘당원과 국민이 원한다면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말한다.

10.그러나 이정희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들은 작전을 바꾸어 이석기와 김재연의 사퇴로 압축한다. 이때에도 구당권파의 백의종군을 덧붙였는데 사실은 이것이 진짜 목표였다.

11.이런 일련의 작태는 천인공노할 수준의 정치적 만행이자 교묘, 대담, 무모한 범죄적 기획인데 이는 유시민의 머리가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고 본다. 그들은 차기정권의 실세가 되면 이런 범죄행위들을 너끈히 감출 수가 있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12.하지만 이정희와 당원들의 순수, 완고한 태도는 그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당권 장악에 실패한 데다 차츰 자기들의 부정행위까지 드러날 위기가 가시화되자 그들은 서둘러 진보정의당을 만들어 셀프제명까지 감행하며 뺑소니쳤다.(이 과정에서 유시민은 안고 들어온 국참당 부채 8억을 통합진보당에 떠넘김으로써 ‘돈떼보이’라는 희귀한 별명을 얻게 된다.) 아무튼 이렇게 됨으로써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뺑소니사고’라는 김인성보고서의 분석이 100% 적확했음이 입증되었다.

13.심상정은 기형정당인 진보정의당의 대선후보직을 마치 배우처럼 연기하다가 문재인 품으로 들어갔고 사전 약속이라도 되는 양 문재인은 그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상 내 나름대로 지난여름의 일을 거칠게 요약해 본 것이다. 하지만 내 글보다 40분짜리 동영상 <진보의 진실>을 널리 퍼트릴 수 있다면 그것이 더 효과적이다. 이런 작업은 투표일까지 부단히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가 알았다고 해서 멈춰서는 안 된다. 앞서 말한 대로 <진보의 진실>을 알리는 작업이야말로 가장 능률적인 선거운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12년 12월 1일 토요일

이승만과 다른 대통령에게서 배워야 할 것들- 60년 사기극의 역사, 속는 자에게도 책임은 있다 -

이승만과 다른 대통령에게서 배워야 할 것들
- 60년 사기극의 역사, 속는 자에게도 책임은 있다 -                       김갑수 선생님 (소설가) 의 페이스북 글을 퍼옴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음향과 분노』는 ‘한 번 갈보면 영원히 갈보’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것을 가장 희극적으로 유비, 모방한 집단이 미국과 한국의 해병대가 아닐까 한다. 정말 ‘한 번 해병이면 영원히 해병’일까? 해병 출신이 아니라면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한 번 배신하면 영원히 배신한다’는 말에는 경험칙적인 개연성이 있다. 그렇다면 ‘한 번 속으면 영원히 속는다’는 말은 어떠한가? 최소한 한국 대통령 선거의 역사에는 이 명제가 적용되어 온 것
 같다.

이승만은 학력이 출중했고 이것을 유효 적절히 이용하여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된 인물이다. 그는 조지워싱턴대학 학사와 하버드 석사 그리고 프린스턴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물론 여기에는 100년 전이라는 시점, 식민지 선교 전략과 맞물린 당대 미국 권력 목사들의 편법적 지원을 감안해야 하지만 아무튼 그의 학력이 세속적 관점에서 세계적 수준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학력자 중에 의외로 저지능이거나 경박한 사람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일례로 정운찬 역시 프린스턴 박사학위를 소지자지만 나에게 비치는 그의 언동은 대부분 유치하거나 위선적인 것들 일색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에 가기 전 한국의 과거에 다섯 번 응시하여 다섯 번 낙방했다. 그는 이것을 당시 과거제도의 부정 때문이었다고 변명하지만 비슷한 시기 아무런 재력이나 배경도 없던 매천 황현 같은 이는 과거에 두 번 응시하여 두 번 다 우수하게 합격한 바 있다.

정작 큰 문제는 이승만이 프린스턴대학 박사 학력을 악용하여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과 대단한 친분이나 있는 것처럼 호가호위함으로써 뜻을 이루었다는 점에 있다. 윌슨은 프린스턴대학 총장 출신의 대통령이었다. 이승만은 파리회의 한국 대표를 자임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는 파리 행 비자조차도 얻지 못함으로써 안창호의 불신을 샀다.

다음으로 박정희는 일본 관동군과 대한민국 군사반란군 출신의 대통령이다. 그의 집권 양상이 어떠했는지는 박근혜 빼고는 다 알 터이기에 부연하지는 않겠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한국인의 국민소득은 1.600불 정도였다. 18년 장기독재, 한국인의 우수성, 특히 한국 노동자들의 근면성에 비하면 턱없이 볼품없는 경제성장이었다. 박정희의 특기는 ‘반공과 국가주의’였다.

민선 대통령은 아니지만 전두환은 ‘정의사회구현’을 표방했다. 그는 국풍 행사 등을 기획하는 등 끊임없이 ‘국민대통합’을 제창했다. 하지만 그의 임기 동안 김근태 고문사건, 부천서 성고문사건, 건국대 학생항쟁,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등이 발발하여 사회가 극도로 위태로웠다.

김영삼은 자타가 인정하듯이 지적 능력이 열등한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고 했는데 이 말을 했다는 것부터 그의 머리가 좋지 않다는 점의 방증이 된다. 왜냐하면 이 말속에 이미 자기 머리 나쁜 것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기색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가 별건 아니지만 그가 서울대 출신이라고 하는 점 또한 미스터리에 속한다. 나는 김영삼과 동창 또는 동문이라는 사람을 단 하나도 본 적이 없다. 우리가 알듯이 그는 IMF 환란으로 한국경제를 거덜내버렸다.

이명박은 747로 국민을 부자 만들겠다고 하며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다. 정확히 말해 유권자들이 자진해서 그에게 속은 측면이 크다. 당시 많은 유권자들이 소득과 아파트에 현혹된 것이 사실이다. 나는 한국인을 좋아하지만 최근 들어 한국인이 스포츠와 연예에 열광하고 물질적 풍요에 지나친 환상을 갖는 점을 못내 유감스럽게 본다. 이명박 집권 5년 동안 한국은 정치, 경제, 남북관계, 환경 등 거의 모든 방면에서 퇴행해 버렸다.

박근혜는 신이 내린 대통령 후보이다. 그는 이승만의 ‘학벌 중시’, 박정희의 ‘반공과 국가주의’, 전두환의 ‘국민대통합’, 김영삼의 ‘저지능’, 이명박의 ‘부자 만들기’ 등을 한 몸에 육화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단지 위에 열거된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실패한 인물들이라는 점에 문제가 있어 우려되는 바가 없지는 않다.

나는 현 시점에서 진정한 대통령 후보라면 다음 세 가지 것만 표방하면 된다고 본다. 그것은 ‘인권’과 ‘서민’과 ‘통일’이다. FTA 페기로 서민을 보호하고 국가보안법 폐지로 인권을 신장하며 코리아연방제로 통일을 지향하는 대통령 후보가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행운이 아닐 수가 없다.

2012년 11월 30일 금요일

[펌] 텔레비전 토론에 앞서 이정희 후보에게 드리는 제안


텔레비전 토론에 앞서 이정희 후보에게 드리는 제안                 (소설가 김갑수 선생님 페이스북 글 )

고대하던 대통령 후보 초청 텔레비전 토론회의 일정과 주제가 확정되었다. 토론회는 아래와 같이 3회에 걸쳐 열리며 박근혜, 문재인, 이정희 후보 3인이 출연한다.

1차 토론회 : 4일, 정치·외교·안보·통일 주제, MBC
2차 토론회 : 10일, 경제·복지·노동·환경 주제, KBS
3차 토론회 : 16일, 사회·교육·과학·문화·여성 주제, KBS

돌이켜보건대 더 이상 모질 수 없었던 지난여름... 오늘에야 겨울의 문턱에서 자그만 희망이나마 보듬어 안을 수 있게 되기까지 우리가 체험해야 했던 질곡의 목록은 기구한 것들 일색이었다. 그곳에는 경악, 수치, 야속, 울분, 탄식, 허탈, 비애, 분노 등만이 처참하게 버무려져 있었을 따름이었다.

우리는 지금 강을 다 건넌 것은 아니라 해도 다행히도 마주보이는 피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눈짐작으로나마 부풀리고 있다. 그동안 이정희가 보여준 인고와 역투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10만 당원의 열정과 희생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원들 역시 이정희가 있었기에 그렇게 할 수가 있었다고 본다.

텔레비전 토론회의 중요성은 두 말 없이 막중하다. 한편으로 가슴이 설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걱정의 크기 또한 그에 못지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혹시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 하여 이 후보께 몇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한다.

우선, 지난여름의 통합진보당 사태에 관해서는 단호하게 임해야 한다. 겸손한 자기반성론은 물론 공동책임론이나 도의적 책임론은 의심을 원하는 자들에게는 구실만 제공할 터이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은 분명히 피해자라는 사실을 날카롭게 천명하면서 범죄 후 뺑소니를 친 가해자들에게 이에 상응하는 질책을 가차 없이 퍼부어야 하겠다.

다음으로, 야권연대에 관해서는 의식하는 표시조차 내서는 안 되며 무조건 완주할 것이라는 결기를 보여야 하겠다.

마지막으로 경쟁자인 박근혜와 문재인에 대한 질문은 아프고 날카로울수록 좋다고 생각하여, 질문에 꼭 포함시켰으면 하는 사항을 몇 가지 제안해 본다.

<박근혜에게 던질 질문>

①동생 박근령의 결혼식에도 불참하고 제부 신동욱을 고소하여 옥살이를 시키는 이유가 뭔지를 정중히 묻고, 이런 일을 돌아가신 부모 박정희와 육영수가 안다면 어떻게 여기겠는지 약간 연민 어린 어조로 질문을 던진 후, 후보자의 가족 화합도 안 되는 터에 100% 국민통합이라는 선거구호가 어떻게 해서 나올 수가 있었던 건지?

②박정희 18년, 전두환 7년, 노태우 5년, 이명박 5년 등 이른바 T.K 세력은 벌써 35년 동안이나 집권해 왔는데 박 후보마저 집권한다면 이로 인한 격심한 지역편중과 타지역 소외의 부작용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지?

③박 후보는 한나라당 시절 난데없이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고 왔는데 그 이유가 뭔지를 아무도 모른다. 일각에서는 민족문제를 권력 장악에 이용했다는 의심을 하고 있는데 이 자리에서 북에 간 이유가 뭔지를 속 시원히 밝혀 달라.

④선거운동 기간 내내 NLL을 사수해야 한다고 하면서 10·4선언에 반대하는 투의 발언을 했는데, NLL이 뭐고 북이 제시한 해상분계선이 뭔지를 알고는 있는지? 그리고 10·4 합의 사항인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알고서 반대하는 건지?

⑤과거 한나라당 시절 차떼기 부정으로 인해 천막당사까지 쳐 놓고 반성하는 모습을 연출했는데, 정작 600억 차떼기 원조인 이회창 씨와 손잡은 이유는 뭔지. 그리고 이것이 평소 말해오던 ‘새 정치’, ‘정치쇄신’과는 어떤 관련을 갖는 것인지?

⑥당명을 아무 이유 없이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선거 기간 내내 당직자들이 남녀노소 없이 빨강색 잠바를 입고 근무했는데 이런 획일성과 민주주의는 어떤 관계를 갖는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새누리당과 빨강색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문재인에게 던질 질문>

①10·4선언에서는 NLL과 북한의 해상분계선이 겹치는 수역을 공동어로수역과 평화수역으로 공유·이용한다는 합의가 되어 있는데, 어떻게 문 후보는 10·4선언도 계승하면서 NLL도 고수할 수 있다는 것인지 비책이 있다면 말해 달라.

②<진보의 블랙박스를 열다>를 읽어 보았는지? 김인성 교수가 문 후보에게 통합진보당 부정범죄범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는데, 그들을 선거캠프에 영입한 이유는 뭔지. 특히 유시민은 선거부정범들의 리더고 심상정은 방조 혹은 동조자인데 유시민을 선대위장으로 둔 심상정 후보와 연대하겠다는 것은 사전의 밀약 때문 아닌지,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뭔지?

③안철수 후보가 일방적으로 사퇴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는지? 혹시 언론 앞에서는 안철수 후보에게 단일화 방법을 다 양보하겠다고 말해 놓고 비공개협상에서는 실무진을 시켜 자기 유리한 방법을 고수토록 한 이중성 때문이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지?

④참여정부 시절 대북송금특검을 실시한 이유는 무엇이며, 노무현 대통령도 철폐하고자 했던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⑤문 후보는 얼마 전 자기도 ‘친노’고 유시민도 ‘친노’라고 했는데 과연 문 후보와 유시민의 밀착도는 어느 정도인지, 또 노무현재단에서 초창기부터 임원으로 일해 온 오옥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항간에서는 유시민을 시켜 진보통합을 이룬 후 이정희를 배제하고 심상정을 후보로 세워 야권연대를 이루려 한 일들이 친노세력에 의해 사전에 기획된 것이라는 설이 무성하다. 그렇다면 문 후보는 이런 거대한 기획의 사령탑이 되는 셈인데, 이런 항간의 의심과 오해를 풀어주고 싶은 의향은 없는지?

⑥이것은 정말 문 후보를 위해서 하는 질문인데, 참여정부는 삼성과 밀착관계였으며 실제 상성으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았으며 그것이 지금도 누구나 이름을 대면 알 만한 한 친노인사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는 설이 퍼져 있는데, 이런 불명예스러운 루머를 이 자리에서 적극 해명할 용의는 없는지?
텔레비전 토론에 앞서 이정희 후보에게 드리는 제안

고대하던 대통령 후보 초청 텔레비전 토론회의 일정과 주제가 확정되었다. 토론회는 아래와 같이 3회에 걸쳐 열리며 박근혜, 문재인, 이정희 후보 3인이 출연한다. 

1차 토론회 : 4일, 정치·외교·안보·통일 주제, MBC
2차 토론회 : 10일, 경제·복지·노동·환경 주제, KBS
3차 토론회 : 16일, 사회·교육·과학·문화·여성 주제, KBS

돌이켜보건대 더 이상 모질 수 없었던 지난여름... 오늘에야 겨울의 문턱에서 자그만 희망이나마 보듬어 안을 수 있게 되기까지 우리가 체험해야 했던 질곡의 목록은 기구한 것들 일색이었다. 그곳에는 경악, 수치, 야속, 울분, 탄식, 허탈, 비애, 분노 등만이 처참하게 버무려져 있었을 따름이었다. 

우리는 지금 강을 다 건넌 것은 아니라 해도 다행히도 마주보이는 피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눈짐작으로나마 부풀리고 있다. 그동안 이정희가 보여준 인고와 역투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10만 당원의 열정과 희생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원들 역시 이정희가 있었기에 그렇게 할 수가 있었다고 본다.  

텔레비전 토론회의 중요성은 두 말 없이 막중하다. 한편으로 가슴이 설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걱정의 크기 또한 그에 못지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혹시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 하여 이 후보께 몇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한다.

우선, 지난여름의 통합진보당 사태에 관해서는 단호하게 임해야 한다. 겸손한 자기반성론은 물론 공동책임론이나 도의적 책임론은 의심을 원하는 자들에게는 구실만 제공할 터이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은 분명히 피해자라는 사실을 날카롭게 천명하면서 범죄 후 뺑소니를 친 가해자들에게 이에 상응하는 질책을 가차 없이 퍼부어야 하겠다.

다음으로, 야권연대에 관해서는 의식하는 표시조차 내서는 안 되며 무조건 완주할 것이라는 결기를 보여야 하겠다.

마지막으로 경쟁자인 박근혜와 문재인에 대한 질문은 아프고 날카로울수록 좋다고 생각하여, 질문에 꼭 포함시켰으면 하는 사항을 몇 가지 제안해 본다.

<박근혜에게 던질 질문>

①동생 박근령의 결혼식에도 불참하고 제부 신동욱을 고소하여 옥살이를 시키는 이유가 뭔지를 정중히 묻고, 이런 일을 돌아가신 부모 박정희와 육영수가 안다면 어떻게 여기겠는지 약간 연민 어린 어조로 질문을 던진 후, 후보자의 가족 화합도 안 되는 터에 100% 국민통합이라는 선거구호가 어떻게 해서 나올 수가 있었던 건지?

②박정희 18년, 전두환 7년, 노태우 5년, 이명박 5년 등 이른바 T.K 세력은 벌써 35년 동안이나 집권해 왔는데 박 후보마저 집권한다면 이로 인한 격심한 지역편중과 타지역 소외의 부작용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지?

③박 후보는 한나라당 시절 난데없이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고 왔는데 그 이유가 뭔지를 아무도 모른다. 일각에서는 민족문제를 권력 장악에 이용했다는 의심을 하고 있는데 이 자리에서 북에 간 이유가 뭔지를 속 시원히 밝혀 달라.

④선거운동 기간 내내 NLL을 사수해야 한다고 하면서 10·4선언에 반대하는 투의 발언을 했는데, NLL이 뭐고 북이 제시한 해상분계선이 뭔지를 알고는 있는지? 그리고 10·4 합의 사항인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알고서 반대하는 건지?

⑤과거 한나라당 시절 차떼기 부정으로 인해 천막당사까지 쳐 놓고 반성하는 모습을 연출했는데, 정작 600억 차떼기 원조인 이회창 씨와 손잡은 이유는 뭔지. 그리고 이것이 평소 말해오던 ‘새 정치’, ‘정치쇄신’과는 어떤 관련을 갖는 것인지?

⑥당명을 아무 이유 없이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선거 기간 내내 당직자들이 남녀노소 없이 빨강색 잠바를 입고 근무했는데 이런 획일성과 민주주의는 어떤 관계를 갖는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새누리당과 빨강색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문재인에게 던질 질문>

①10·4선언에서는 NLL과 북한의 해상분계선이 겹치는 수역을 공동어로수역과 평화수역으로 공유·이용한다는 합의가 되어 있는데, 어떻게 문 후보는 10·4선언도 계승하면서 NLL도 고수할 수 있다는 것인지 비책이 있다면 말해 달라.

②<진보의 블랙박스를 열다>를 읽어 보았는지? 김인성 교수가 문 후보에게 통합진보당 부정범죄범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는데, 그들을 선거캠프에 영입한 이유는 뭔지. 특히 유시민은 선거부정범들의 리더고 심상정은 방조 혹은 동조자인데 유시민을 선대위장으로 둔 심상정 후보와 연대하겠다는 것은 사전의 밀약 때문 아닌지,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뭔지?

③안철수 후보가 일방적으로 사퇴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는지? 혹시 언론 앞에서는 안철수 후보에게 단일화 방법을 다 양보하겠다고 말해 놓고 비공개협상에서는 실무진을 시켜 자기 유리한 방법을 고수토록 한 이중성 때문이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지?

④참여정부 시절 대북송금특검을 실시한 이유는 무엇이며, 노무현 대통령도 철폐하고자 했던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⑤문 후보는 얼마 전 자기도 ‘친노’고 유시민도 ‘친노’라고 했는데 과연 문 후보와 유시민의 밀착도는 어느 정도인지, 또 노무현재단에서 초창기부터 임원으로 일해 온 오옥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항간에서는 유시민을 시켜 진보통합을 이룬 후 이정희를 배제하고 심상정을 후보로 세워 야권연대를 이루려 한 일들이 친노세력에 의해 사전에 기획된 것이라는 설이 무성하다. 그렇다면 문 후보는 이런 거대한 기획의 사령탑이 되는 셈인데, 이런 항간의 의심과 오해를 풀어주고 싶은 의향은 없는지?

⑥이것은 정말 문 후보를 위해서 하는 질문인데, 참여정부는 삼성과 밀착관계였으며 실제 상성으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았으며 그것이 지금도 누구나 이름을 대면 알 만한 한 친노인사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는 설이 퍼져 있는데, 이런 불명예스러운 루머를 이 자리에서 적극 해명할 용의는 없는지?

2012년 11월 22일 목요일

[2012.11.21] 김인성 교수 통합진보당 관련해서 시사인 인터뷰 후기

1. 통합진보당 관련해서 시사인 인터뷰 하고 오는 길입니다. 시사인은 그 혼란스러운 시기에 용감하게 반론권을 보장해준 유일한 언론이었습니다.

2. 검찰은 엄청난 물량을 동원하여 이석기, 김재연 측을 털었으나 아무런 혐의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의혹을 제기했던 오옥만 등을 부정의 당사자로 지목하였습니다.

...
3. 사백여명에 이르는 기소자들은 당에 대한 탄압이라고 주장하며 진술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괴씸죄에 걸린 것입니다. 기소된 사람 수도 탈당파들이 더 많습니다.

4. 자백했다고 입건유예로 가볍게 처리해 준 사람들을 합치면 탈당파는 천명에 이릅니다. 이들 대부분은 개인적으로 가족이나 지인의 부탁으로 대리투표한 사람들입니다.

5. 온라인 투표에서 선관위기 아무리 노력해도 이들의 부정행위를 막거나 알아낼 수 없습니다. 검찰 조사도 한계가 있습니다. 온라인 투표는 당원의 의견을 묻는 당내 선거용으로 마련된 제도입니다.

6. 휴일 지정 없이, 투표율 50%를 넘겨야하는 당내 선거를 위한 투표 독려를 부정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투표를 위임한 분이 원하는 후보를 그대로 찍은 행위의 죄를 묻기도 어렵습니다.

7. 비례대표 선거는 당내의 일이라 당의 자율적 권한에 속한 일이고 투표 위임자의 의사가 왜곡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옥만의 사례는 다릅니다.

8. 이들은 후보자가 개입되어 조직적인 부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통진당 선거에서 조직적인 부정은 참여계뿐이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강도 높은 조사가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9. 이들에 대한 조사는 야권연대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이들과 접촉했던 후보 진영은 다시한번 자체적으로 그들의 행적을 조사하고 미리 국민들에게 알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10. 검찰은 아직도 동일 IP 몰표가 부정인 것처럼 몰아가고 있습니다. IT를 모르는 분들은 이 말에 속기 쉽습니다. 한겨레 논설위원조차 이것이 범죄 증거라고 논설을 쓸 정도입니다.

11. IP가 동일하다는 말이 컴퓨터 한 대로 투표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공유기 아래에 있는 모든 컴퓨터는 한 개의 IP로 나타납니다. 가정집의 컴퓨터,스마트폰,태블릿도 한 IP로 보입니다.

12. 공장, 사무실, 병원 컴퓨터 전체, 국회 의사당의 모든 컴퓨터도 한 IP로 보입니다. 이를 거론하는 것은 IT를 모르거나 다른 의도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13. 통진당 사태의 모든 의혹이 밝혀졌습니다. 극히 일부의 개인적 부정뿐이었습니다. 그것도 대부분 위임자의 의사와 일치하는 대리투표였습니다. 괴씸죄로 많은 기소자가 생겼습니다.

14. 후보자까지 가담한 유일한 조직적 부정 사례는 참여계에 의해 저질러졌고 이들이 의혹을 제기했고, 조사위원이 되어 거짓 보고서를 만들어 진보 진영을 괴멸 시켰습니다.

15. 사태가 이지경으로 될 때까지 진보 진영은 무엇을 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특히 진실을 보도해야할 언론은 자신의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상식을 가진 기자라면 누구나 진실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16. 의도를 가진 검찰의 조사 발표문, 이석기를 먼지털이식으로 수사하고도 아무런 혐의를 찾지 못했지만 끝까지 죄인처럼 조작한 발표문을 보고서 안심이 되는 진보인사가 있다면 자신이 정말 진보인지 의심해야 합니다.

17. 무엇보다도 이 긴 조사에도 불구하고 단 한건의 부정사례도 나오지 않은 김재연의원에게 진보인사 전원은 사과해야 합니다. 김재연의원에게 사과하지 않는 한 더 이상 자신을 진보라고 불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18. 특히 아무런 근거도 없이 김재연의원을 마녀로 몰아간 진보언론들은 그분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해야 합니다. 열정 넘치는 젊은 진보 정치인의 미래를 망친 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용서될 수 없습니다.

19. 몇달전 시사인이 저를 인터뷰한 것은 그들이 제 말을 믿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중립을 지키고 반론권을 보장하겠다는 차원이었습니다. 기사화 될 때까지 많은 어려움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20. 진실에 무관심한 언론 지형에서 시사인과 같은 언론이 존재하는 것이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진실을 추구하며 소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준 시사인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끝.


2012년 11월 19일 월요일

검찰의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수사 결과의 의미와 진보언론의 편파보도


< 검찰의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수사 결과의 의미와 진보언론의 편파보도 >    이장수님 201.11.19

지난 5개월 동안 계속 진행되던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태'에 대한 검찰청의 수사결과가 어제(15일) 발표되었습니다.
검찰은 대리투표 혐의로 20명을 구속했고, 400명 넘는 당원을 '진술거부'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그리고 "동일IP를 통한 중복투표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총체적 부정선거'"라고 자신들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제 기소된 것 뿐이고 앞으로 길고 긴 재판을 통해 최종 확정되겠지만, 진보언론과 지식인들의 언행을 보면서 긴 글 올립니다.

먼저 검찰이 정당의 당내 선거에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수사한 것은 정치적 탄입이자 헌법과 정당법이 보장하는 합법적인 정당활동 방해하는 불법행위이기에 부당한 짓이고 불법한 짓입니다. 진보당 대변인은 이번 검찰 수사를 처음부터 거부했으며 인정할 수 없다고 언론에 발표했습니다.

구속된 20명에는 당시 통합진보당에서 비례후보 경선에 나섰던 오옥만(참여계), 이영희(조준호계), 윤갑인재 후보와 조준호 진상조사위원회에 참여하여 5월 2일 '총체적 부정선거'로 언론발표를 주도한 진상조사위원 2인(오옥만 추천 고영삼, 이정훈), 중앙당 당직자 1인(참여계) 등이 포함되어 있고, 나머지 구속자는 노조 간부나 조사 불응자였습니다.
비례후보나 진상조사위원, 당직자는 모두 5월 당시에 비당권파, 혁신파로 불리우던 사람들이고 대부분 현재 유시민, 심상정, 조준호 등과 탈당한 상태입니다.
검찰은 처음 수사의 타깃으로 삼았던 이석기 후보나 김재연 후보에게는 "어떠한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다"라고 스스로 인정했습니다. 검찰이 지난 5월부터 5개월 넘는 기간 동안 전국의 검사들과 국세청까지 동원해 진보당 서버와 프로그램, 데에터를 가지고 1만 명이 넘는 당원들을 '먼지털이'식으로 수사한 결과로는 초라하기 그지 없는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검찰의 수사 결과는 (비록 아직 '혐의'이기는 하지만...) 조준호, 유시민, 심상정씨 등이 지난 5월 '총체적 부정선거'라고 발표했던 주장이, 사실은 자파 후보들의 불법행위를 의도적으로 감추고 당시 '당권파'에게 뒤집어 씌우려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말해주기에 충분합니다.
실제 참여계 간부인 오옥만, 박무 등이 참여했던 1차 진상조사위원회는 5월 당시에 이번에 부정선거로 발표된 오옥만, 이영희 등의 부정의혹은 전혀 조사하지 않은 채 "부정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지 못했으니 부정이다"라는 해괴한 논리로 '총체적 부정선거'라고 발표해 진보당의 추락과 분열을 초래한 것입니다. 그들은 부정선거를 저질렀을 뿐 아니라 역으로 정당의 진상조사 업무를 방해한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번 시건을 베트남 전쟁의 '통킹만 사건'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자신들이 범죄를 저질러 놓고 상대방에게 범죄를 덮어 씌우면서 지지율이 13%가 넘는 정당이 '부정집단'으로 매도되고 지지율이 바닥까지 추락했다는 점에서...

5월 사태 당시 조준호 진상조시위원회와 긴밀하게 협의하며 '부정선거 사태'를 주도했던 유시민씨는 검찰의 발표에 대해 "모든 정파가 똑 같이 부정을 저질렀다"고 반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더군다니 거짓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어제 검찰의 수사 발표는 "부정선거 범죄(혐의)는 참여계와 조준호계"라는 것을 명확하게 밀해주고 있습니다. 이석기, 김재연, 조윤훅, 황선 후보는 어떠한 부정선거에도 연루된 사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정파인 비례후보 오옥만, 진상조사위원인 고영삼과 이정훈, 조직국장이 모두 부정선거의 주범이었으나, 유시민씨는 5월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그들의 이름을 거론한 적이 없으며(이는 조준호, 심상정, 강기갑, 이정미도 동일) 오히려 그들은 진상조사위원과 당직자로 일하면서 진상조사를 방해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정선거 진상조사의 사실과 진실을 요구하는 이정희 전대표와 이석기 의원에게 꾸준하게 '애국가' 논란 같은 이념적 낙인을 찍으려고 시도했습니다.

IT업계나 인터넷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검찰이 발표한 '동일IP에 의한 중복투표 부정'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혐의라는 것을 금방 눈치챌 것입니다. 같은 사무실, 같은 커피숍, 같은 공장, 같은 공공장소, 같은 집에서 핸드폰이나 노트북, PC를 사용하여 온라인 투표를 하게 되면 십중팔구 '동일IP'로 집계되기 때문입니다.(이런 사례는 법원에서 재판을 하나마나 무죄일 가능성이 대단히 큽니다.)
따라서 '동일IP에 의한 중복투표'는 범죄나 부정의 증거로 제시할 수 없습니다. 전화투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런 것들을 부정의 증거로 삼는다면 그동안 한나라당이나 민주통합당, 기타 다른 정당이 진행해 온 모든 온라인 투표가 부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진보당 부정선거 사태에서 유일하게 처음부터 지금까지 '진실'의 관점에서 사태를 분석한 언론은 인터넷신문인 '민중의소리'였습니다. 그동안 소위 '잔보언론'으로 자임해 오던 한겨레, 경행,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은 오로지 범죄를 저질렀던 조준호계와 참여계의 일방적 주장만 기사로 베꼇습니다. 이념이나 정파를 떠나 언론의 사명과 기능에서 가장 중요한 '공정'은 그들에게서 칮을 수 없었습니다. 나꼼수도 다 알면서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진보당을 '부정집단'으로 매도하고, 진보당의 지지율을 13%에서 3~5%대로 떨어뜨린 주범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태의 진실이 조금씩 드러나고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음에도 여전히 '총체적 부정선거'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또한 수 많은 소위 '진보 지식인'들 역시 진보언론과 동일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조국, 진중권, 공지영, 김세균, 허재연 등은 진보언론의 이야기를 SNS에그대로 퍼트리면서 진보당의 당권파를 부정집단으로 매도한 후, 사실이 드러난 이후에도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시사평론가 유창선씨나 김갑수씨를 떠나 연예인 김여진씨만도 못한 것입니다. 김여진씨는 양측의 주장이 팽팽할 때 입을 다물었고 최근 드러난 사실애 대해 상식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블로그를 통해 "가장 대표적인, 증거가 드러난 부정사례가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게 상식적이지 않나 하는 것이다." "'총체적 부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라는 건 범죄당사자들에게 너무 멋진 그림이지 않은가?"라고 밀했습니다.

5.12 중앙위원회 폭력사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잘못된 일입니다.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5.12 사태는 5.12 사태 단일 건이고 부정선거 범죄는 별개입니다.(그 폭력사태 역시 5월 2일 조준호의 거짓 진상조사 결과 발표애서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그러나 부정선거의 실제 범죄자, 그것을 은폐한자, 진상조사를 방해한자, 거짓을 발표한자, 그것을 이용한자, 방조한자들의 폭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진보당에 투표한 220만 명의 유권자를 속인 것이고, 10만 명의 당원을 조직적, 집단적으로 '왕따'시킨 폭력입니다. '왕따'는 사회적, 문화적 폭력입니다. '왕따'는 학교에만 벌어지난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한 두 대 주먹으로 쥐어박는 게 서로 화해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길입니다.

진보 이전에, 민주주의 이전에, 이념 이전에, 정책 이전에, 권력 이전에 싱식과 양심이 먼저입니다.

그들이 "정권교체를 위해 입을 다문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감추고 진실을 말하지 않고 범죄를 두둔하고 양비론으로 물타기하는 정권교체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소위 진보지식인들이 대학 강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요? "정치권력을 위해서는 잠깐 눈을 감고 입을 닫아도 괜찮다"라고 말한 것인가요? 그런 태도라면 그들이 정치권력을 잡은 후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시 진실에 눈은 감고 누군가를, 특히 정치적 사회적 약자를 매도하고 '왕따'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나요?
페친 권경애씨는 이런 진보언론과 진보지식인들의 태도에 대해 "양심불량, 지성불량, 이성불량"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진보당이 모든 분야에서 '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당원들과의 소통, 당원 민주주의에서 여전히 부족합니다. 참여, 개방, 공유, 협력이 약합니다. 조직 일반에서 늘 문제인 관료주의가 존재합니다. 당원들의 참여와 교육도 태부족입니다. 딱딱합니다. 피해의식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그들 스스로, 주변과 협력하여 고치고 변화하여 유권자에게 심판받으면 됩니다. 그것이 외부에서 진보당에 대한 집단 따돌림이나 마녀사냥의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진보당은 한국 정당사상 유일하게 당원 전체 투표로 당 대표와 최고위원, 지역위원장을 선출합니다. 지역구 후보와 비례후보와 지자체장 후보를 선출합니다. 정당 민주주의의 기본이자 근간입니다. 그것을 일부 범죄자가 악용한 것입니다. 범죄자를 처벌하고 사스템을 개선하면 됩니다.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이번 새정치개혁선언에 들어가기 쉽지 않은 내용입니다.

아무튼 이번 사건이 한국사회에 던진 교훈은 엄청나게 큽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많은 고민과 숙제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집단적으로 입을 맞추게 했고 입을 다물게 하는가? 정권교체를 위해서? 정치권력을 위해서? MB와 한나라당에게 빼앗긴 밥벌이를 되찾기 위해서? 평소에 친했던 유시민-심상정-노회찬을 구하기 위해서?
무엇이 그들을 두렵게 하는가? 진보당의 상승세가? 2013년 진보당과 공동정부 구성하기 싫어서? '대중적 진보성'을 가진 이정희의 위력이? 반공이데올로기가? '종북좌파'라는 낙인이? '남북분단'이?




2012년 11월 13일 화요일

[페이스북 친구] 한성우 선생의 글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증언보다 폭발력이 넘치는 새로운 증언이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증언보다 폭발력이 넘치는 새로운 증언이 나왔습니다. 국내 최정상 <디지탈 포렌스식> 전문가 김인성 교수가 나꼼수 김어준 총수의 중재로 유시민과 만나 사태의 진상을 알리려 했으나 <유시민이 거부>했다는 증언입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아래 링크된 기사본문은 길지만 정신을 집중해서 꼭 <정독>을 해주십시요.

기사 내용중 가장 충격적인 부분이며 최근 유시민계 오옥만, 고영삼의 구속사태를 겪고서도 <정당분쇄기 유시민>은 이미 <진상보고서에 있던 내용이다>라며 전혀 사실과 다른 얘기(진상보고서에 오옥만의 'ㅇ'도 없음)로 책임회피하며 도마뱀꼬리자르기에 이은 <물귀신작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유시민의 범죄적 행각은 끝끝내 단죄받아야 합니다. 당에서 유시민, 조준호 등 일당 5명에 대한 법적 고발을 취한다고 하니 끝까지 관심을 기울여 주십시요. 아래 기사는 현재시각 <페이스북 좋아요 1967회, 트윗전송 931회>로 엄청난 폭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한공유>와 <RT>하면 당파괴범들을 단죄하면서 억울하게 매도당한 당원들과 지지자들 그리고 돌아가신 박영재 당원의 <한恨>을 풀 수 있습니다. 이하 기사 인용(본문 필독, 공유, RT필수)//

“김어준 중재 노력도 유시민 거부...구속된 참여계 인사들이 진상조사 왜곡” [인터뷰]‘가해자의 뺑소니’ 밝혀낸 김인성 교수, “진상조사 했으면, 민주당처럼 쉽게 수습됐을 것” http://www.vop.co.kr/A00000561400.html

-오옥만, 고영삼 씨가 구속이 됐는데, 유시민 전 대표는 ‘이미 조준호 보고서에 있던 내용이다’라고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해명이다. 통합진보당 사태가 한창일 때, 소위 ‘당권파’ 쪽에서 나에게 조사 결과를 자세히 소명해 달라고 공개석상에 초청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당내 경선 중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 요청은 거절했다. ‘논란이 되고 있는데 한 쪽에만 가서 얘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가능하면 전 선거캠프가 동의해서 불러달라고 말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꼼수’ 김어준 총수를 만날 일>>이 있었는데, <<통합진보당 얘기를 물어보더라. 내가 ‘팩트와 범죄의 증거가 있다’, ‘우리 모두 한 명의 범죄자에게 속고 있다’>>고 하니까 <<김 총수가 나에게 ‘유시민 씨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하더라.>> 유시민씨는 이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해서 만나겠다고 했다. 그래서 팩트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해주겠다고 했는데, <<유시민 대표가 거부했다.>>

나꼼수팀의 IT기술 쪽 일을 도와주는 김 모씨가 김어준 총수와 함께 유시민씨와의 만남을 주선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유 대표가 ‘자기 말만 하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6월 말에 이미 참여계 쪽에선 더 이상 팩트조차 중요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 같다. 다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더라도 다른 목적이 있어 팩트는 알고 싶지 않았던지,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PS. 이른바 '통합진보당 사태'를 다룬 화제의 다큐멘터리 <비밀전문 12서울0502> 국회시사회합니다. 15일 목요일, 오후7시 국회 헌정기념관입니다. 저도 웬만하면 조기퇴근후 올라갑니다. ^^
 — 우위영님 외 23명과 함께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증언보다 폭발력이 넘치는 새로운 증언이 나왔습니다. 국내 최정상 <디지탈 포렌스식> 전문가 김인성 교수가 나꼼수 김어준 총수의 중재로 유시민과 만나 사태의 진상을 알리려 했으나 <유시민이 거부>했다는 증언입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아래 링크된 기사본문은 길지만 정신을 집중해서 꼭 <정독>을 해주십시요. 

기사 내용중 가장 충격적인 부분이며 최근  유시민계 오옥만, 고영삼의 구속사태를 겪고서도 <정당분쇄기 유시민>은 이미 <진상보고서에 있던 내용이다>라며 전혀 사실과 다른 얘기(진상보고서에 오옥만의 'ㅇ'도 없음)로 책임회피하며 도마뱀꼬리자르기에 이은 <물귀신작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유시민의 범죄적 행각은 끝끝내 단죄받아야 합니다. 당에서 유시민, 조준호 등 일당 5명에 대한 법적 고발을 취한다고 하니 끝까지 관심을 기울여 주십시요. 아래 기사는 현재시각 <페이스북 좋아요 1967회, 트윗전송 931회>로 엄청난 폭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한공유>와 <RT>하면 당파괴범들을 단죄하면서 억울하게 매도당한 당원들과 지지자들 그리고 돌아가신 박영재 당원의 <한恨>을 풀 수 있습니다. 이하 기사 인용(본문 필독, 공유, RT필수)//

“김어준 중재 노력도 유시민 거부...구속된 참여계 인사들이 진상조사 왜곡” [인터뷰]‘가해자의 뺑소니’ 밝혀낸 김인성 교수, “진상조사 했으면, 민주당처럼 쉽게 수습됐을 것” http://www.vop.co.kr/A00000561400.html

-오옥만, 고영삼 씨가 구속이 됐는데, 유시민 전 대표는 ‘이미 조준호 보고서에 있던 내용이다’라고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해명이다. 통합진보당 사태가 한창일 때, 소위 ‘당권파’ 쪽에서 나에게 조사 결과를 자세히 소명해 달라고 공개석상에 초청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당내 경선 중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 요청은 거절했다. ‘논란이 되고 있는데 한 쪽에만 가서 얘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가능하면 전 선거캠프가 동의해서 불러달라고 말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꼼수’ 김어준 총수를 만날 일>>이 있었는데, <<통합진보당 얘기를 물어보더라. 내가 ‘팩트와 범죄의 증거가 있다’, ‘우리 모두 한 명의 범죄자에게 속고 있다’>>고 하니까 <<김 총수가 나에게 ‘유시민 씨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하더라.>> 유시민씨는 이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해서 만나겠다고 했다. 그래서 팩트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해주겠다고 했는데, <<유시민 대표가 거부했다.>>

 나꼼수팀의 IT기술 쪽 일을 도와주는 김 모씨가 김어준 총수와 함께 유시민씨와의 만남을 주선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유 대표가 ‘자기 말만 하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6월 말에 이미 참여계 쪽에선 더 이상 팩트조차 중요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 같다. 다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더라도 다른 목적이 있어 팩트는 알고 싶지 않았던지,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PS. 이른바 '통합진보당 사태'를 다룬 화제의 다큐멘터리 <비밀전문 12서울0502> 국회시사회합니다. 15일 목요일, 오후7시 국회 헌정기념관입니다. 저도 웬만하면 조기퇴근후 올라갑니다. ^^

[소설가 김갑수 선생님의 글] 김지하는 변한 것일까 아니면 본색을 드러낸 것일까

김지하는 변한 것일까 아니면 본색을 드러낸 것일까

시인 김지하가 박근혜 후보 지지발언을 한 것이 화제가 되고 있다. 김지하는 불과 한두 달 전까지 자기 입으로 칭찬했던 안철수에 대해서는 ‘깡통’이라는 표현으로 비하했다. 주지하듯이 김지하는 박정희 독재에 저항한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이럴 때 흔히 “그 사람이 그럴 줄(은) 몰랐다.”고 반응한다. 이 말에는 ‘그 사람이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갑자기 변했다’는 판단이 전제되어 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작은 의문에 휩싸여든다. 과연 그 사람이 갑자기 변한 것일까?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인데 이제야 본색을 드러낸 것일까? 내 능력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점은 사람이란 ‘쉽게 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사람의 과거와 이면사를 정밀히 들여다보면 벌써부터 그럴 소지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수가 많다. 사실 김지하의 변화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1980년대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변화의 징후를 명백히 보여주었다.

나는 지난 번 글에서 유시민의 예를 들어 사람이 일찍 실명보다 큰 허명을 비주체적으로 얻어 유명인사가 될 때, 삶이 왜곡되기가 쉽고 그 결과 사회 문제와 관련하여 심각한 정신분열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말을 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김지하는 유시민보다 훨씬 더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다.

김지하는 불과 20대의 나이에 담시 <오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오해는 하지 마시라. 나는 <오적>의 저항적 가치를 과소평가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다만 <오적>의 창작이 예술가 김지하의 자발적 원망(願望)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밝히고 싶은 것이다. 오적, 즉 다섯 도적은 당시 사회에 널리 알려진 소문이었는데, 이를 착안한 <사상계> 편집장 김승균이 5·16 특집을 기획했다가 급한 사정이 생겨 3일 만에 김지하에게 쓰도록 청탁한 것이었다. 김지하는 <오적>의 창작 계기를 묻는 질문에 “산이 있으니까 오르듯이, 오적이 있으니까 오적을 썼다”고 아리송하게 답한 적이 있다. 이럴 때 김승균 편집장의 아이디어로 썼다고 답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을는지.

다음으로 우리가 김지하와 함께 떠올리는 것은 시 <타는 목마름으로>이다. 이 시는 노래로 만들어져 운동권 가요의 필두에 위치했다. 다음 두 편의 시 구절을 읽어 보자.

나의 학습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책장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자유여.
- 엘뤼아르의 시 <자유> 중에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 김지하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 중에서

김지하의 시는 엘리아르의 시를 참조한 것 같다. 예술 창작에서 표절과 인유(다른 작품을 참조)는 다르다. 표절이 되지 않으려면 다른 이의 것을 인유했다는 점을 ‘공공연’하고 ‘명백’하게 밝혀야 하는데 김지하는 <타는 목마름으로>를 발표하면서 웬 일인지 그렇게 하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

김지하의 또 다른 유명한 글로 <옥중양심선언>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도 사실은 고(故) 조영래 변호사의 창작이었다. 김지하는 노태우 시절 <조선일보>에 ‘젊은 벗에게 -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글을 전면으로 게재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나서, 일단 제목은 ‘젊은 벗에게’로 붙여놓고 실제로는 <조선일보> 독자를 겨냥해 쓴 교묘한 글이라는 느낌을 가졌다. 또한 생명의 가치는 지고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군부독재의 폭압 대신 학생의 화염병을 생명파괴의 주범으로 지목하는 대목에서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 김지하는 변한 것이 아니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 따름이다. 그는 노무현 서거 당시 봉하마을의 추모객들을 공산주의자들로 몰아붙였다. 참고로 그는 황석영, 손학규와 절친한 사이다. 그는 2009년 이명박과 어울리는 황석영을 적극 비호한 바 있다. 또 하나 더 참고로, 황석영은 소설가 조정래(앞의 조영래 변호사와 혼동 말기를)와 별로 사이가 안 좋다. 김지하가 갑자기 안철수를 ‘깡통’이라고 비하하게 된 것이 만에 하나 조정래가 안철수의 후원회장이 된 것과 관련된다고까지 보고 싶지는 않다. 아무튼 대한민국의 유명인사들 사이에 의외로 혈친주의가 강고하다는 점은 따로 지적하고 싶다.

2012년 11월 4일 일요일

<프레임 전쟁>, 어떻게 논쟁을 장악하고 유권자를 설득하는가 읽은 책


난 책이지만 사서 읽어 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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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 전쟁>, 어떻게 논쟁을 장악하고 유권자를 설득하는가 읽은 책

by cklist 2007/08/08 22:55 www.povertymatters.net/3673567 덧글수 : 0
프레임 전쟁
조지 레이코프.로크리지연구소 지음, 나익주 옮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그 순간 코끼리를 떠올릴 것 이다." 작년에 출간된 레이코프의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를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위의 책에서 인지언어학자 레이코프는 사람들은 '사고'보다 '직관'에 우선함을 지적한다. 이때의 직관이란 '프레임' -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 체계로 대상의 본질과 의미들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는 틀 -이다.

프레임 이론에 따르면 미국의 진보세력이 '이라크 전쟁'이란 단어를 받아들인 것은 곧 '전쟁 프레임' 자체를 승인한 것이므로 틀렸다. 그들은 이라크 '전쟁'이 아니라 '점령'이라고 말했어야 한다. 또 종합부동산세를 비판하기 위해 한나라당이 만든 단어 '세금폭탄'을 그대로 사용해 '종부세는 세금폭탄이 아니다'고 받아친 열린우리당도 틀렸다. 그들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고 외쳤다.

열린우리당의 워크샵 교재였다는 <코끼리를 생각하자 마>가 정치란 곧 '프레임 대 프레임'의 싸움임을 일깨웠다면, <프레임 전쟁>은 이를 이론으로 쳬계화하고, 실제로 목적에 맞는 프레임을 구성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실제로 미국 진보세력들 사이에서는 '교과서'로 불린단다.

책은 보수자의자들은 이미 습득했으나 진보주의자들은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 '인지언어학'의 기본 원리들을, (진보주의자들이 빠지기 쉬운) '열 두 가지 덫'으로 정리한다.

1. 상세 목록의 덫
진보주의자들은 사람들이 프로그램과 정책의 목록에 근거하여 투표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사실 사람들은 가치와 인간관계, 진정성, 신뢰, 정체성을 바탕으로 투표한다.

2. 합리주의의 덫
확고한 사실이 유권자를 설득할 것이고, '이성적'인 유권자들이 자신들의 사리와 이슈를 위해 투표하며, 어떤 프레임을 부정하는 것이 그 프레임을 반대하는 논증을 펴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믿는 것은 '이성의 덫'이다.

3. '정책은 가치'의 덫
진보주의자들은 정책과 가치를 혼동한다. 가치는 윤리적 개념이다. 정책이 가치에 근거하거나 근거해야 하지만, 정책 그 자체는 결코 가치가 아니다. 사회보장이나 전국민건강보험은은 가치 아니라, 인간 존엄성과 공평성, 평등의 가치를 반영하는 정책이다. 정책만 말하다 가치를 말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

4. 중심주의의 덫
이념적인 '중심' '중도주의자'란 없다. 사람들은 삶의 어떤 측면에서는 보수적이고 다른 측면에서는 진보적인, 이중개념주의자들이다. 중심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진보주의자들은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해 오른쪽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것은 역효과를 낸다. 오른쪽으로 이동함으로써 진보주의자들은 실제로 우파의 가치를 활성화하고 고유의 가치를 포기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부분적으로만 보수적인' 이중개념주의 진보주의자들를 소외시킨다.

5. 오해의 덫
너무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보수적으로 투표하는 사람들, 특히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 반해 투표하는 사람들을 멍청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보수적으로 투표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보수적 포퓰리즘은 본성상 경제적이 아니라 문화적"이다. 보수적 포퓰리스트들은 자신들이 평범하고 도덕적인 올바른 사람들인데, 자신들을 무시하는 엘리트주의 진보주의자들에게 억압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진보주의자들의 부도덕한 '정치적 올바름'을 자신들에게 강요한다고 보며, 그 점에 분노한다.

보수적 포퓰리스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염원을 특징짓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자유(liberty)'이다. 이 낱말은 정치적, 문화적 엘리트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따라서 경제적 복지에 대한 합리적인 호소로는 결코 그들의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

한편 진보주의자들은 또한 보수주의 의제를 오해하며 보수주의 지도자들을 무능하고 아주 어리석다고 묘사한다. 이것은 보수주의의 목표를 진보적 가치를 통해서 조망한 데서 비롯된다.

6. 진실의 덫
진실만으로 당신은 자유롭게 되지 않을 것이다. 진실이 상식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무엇이 '상식'으로 간주되는가는, 어떤 프레임이 뇌 속에 있는가와 그러한 프레임이 얼마나 자주 사용되고 환기되는가에 의존한다. 진실은 아주 중요하지만, 그러한 진실은 '프레임' 즉, 어떤 맥락이 주어질 때만 의미를 갖는다. (이하 생략)

책은 특히 '이중개념주의'를 설명하는 데 공을 들인다. 레이코프에 따르면 세상에는 부분적으로 진보적인 보수주의자가 훨씬 많다. 이들은 자신을 '환경주의자'로 부르지 않고, '지속가능성'이나 '생태다양성'같은 어구를 주고 받지도 않을 것이지만, 실제로 자연을 사랑하고, 궁극적으로 진보적인 가치들 중 많은 것을 공유한다.

따라서 "진보주의만이 사용할 수 있는 타당한 진보적 언어로 이들의 부분적인 진보성을 활성화 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보수주의자들의 성공이 '왼쪽으로 이동한' 결과가 아니었듯이.

나아가 책은 이같은 문제인식을 바탕으로 실제로 적절한 프레임을 구성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심층 프레임 / 이슈정의 프레임(문제의 특성을 규정하고, 책임 소재를 결정하며, 가능한 해결택을 통제하고, 특정한 관심사를 통제), 메시지 전달 프레임, 일상적 프레임(무엇이 '상식'인가를 결정)등으로 그 층위를 나누고 하나씩 상세하게 살핀다.

특히 전쟁, 세금, 입시, 낙태 등의 이슈부터 공정성, 자유, 평등과 같은 '경쟁적인 개념'에 얽힌 프레임 구성을 설명하고, 진보주자의들이 전략적 의안으로 선택할 만한 네 가지 - 깨끗한 선거, 건강한 식품, 윤리적 기업, 대중교통-를 예로 들어 실제로 프레임을 구성해보는 점이 참고서의 연습문제 풀이 꼭지같다. 도움된다.

프레임 구성의 기본 틀.
삶의 어떤 측면에서 보수적이라는 것은 '엄격한 아버지' 모형을 따른다는 것이다. 또 진보적이라는 것은 '자애로운 부모' 모형을 따른다는 것이다.' 엄격한 아버지의 도덕성의 핵심은 권위와 통제(자기 절제를 포함한)이고, 자애로운 부모가 가진 도덕성의 핵심은 타인에 대한 감정이입과 책임감이다.

또 보수주의자들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인과관계에 근거하며 주장을 펼치는 반면, 진보주의자들은 전체적이고 복합적인 인과관계를 바탕으로 주장을 펼치는 경향이 있다. 테러리즘에 대해서라면 진보주의자들은 테러리즘의 더 깊고 전체적인 원인에 문제를 제기한다. 무엇이 미국에 대한 증오를 초래했는가?에 주목한다. 반면 보수주의자들이 인정할 내용의 전부는 테러리스트들이 '우리의 자유를 증오한다'는 것이다.

천만 번 반복되는 이야기겠지만, "가장 효과적인 정치적 주장은 논증의 형태가 아니라 이야기의 행태로 나타난다." 프레임 이론 역시 이야기의 구성에 대한 주목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과연 누구인지를 진정으로 알아내도록 도와주는' 이야기에 가장 주목한다. 그리고 가치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할때만 특정 정견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것이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이다.

진보 세력에게는 진보 세력의 핵심 가치를 말하는 것이 최선이자 유일한 방법론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말하기 방법에 대한 공부가 얼마나 절실한지 어렴풋이나마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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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크리지 연구소 : 죠지 레이코프가 활동하는 비영리단체. 인지과학 연구를 통해 진보주의자들이 논지를 가다듬어 대중을 설득하는 방법에 대해 조언한다. <프레임 전쟁>의 원서를 다운로드 할 수 있다.

2012년 11월 3일 토요일

김갑수님 글 - 유시민, 벌써 떠났어야 한다



유시민, 벌써 떠났어야 한다                  김갑수  (소설가) 님의 페에스북글 2012.11.02

2003년 유시민은 과감한 파병 반대파였다. 그는 “반전평화의 길을 밝히는 거대한 횃불을 만들자”고 소리쳤다. 그러나 노무현이 파병을 결정하자 파병 찬성으로 돌아섰다. 그는 2002년 대선 때 민노당 지지자들에게 노무현을 찍어달라고 호소했다가 노무현이 당선되자 “민주노동당 표는 그리 영향력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2년 후 2004년 총선 때는 “민노당 후보 찍으면 사표 된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MBC 피디수첩을 비판하고 황우석을 두둔했다가 사태가 뒤바뀌자 다시 말꼬리를 돌리기도 했다. 그는 FTA의 열렬한 지지자였다가 작년부터 진보정당에 기웃거리면서 FTA 반대집회에 나갔다.

한때 유시민은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 있다. 노무현이 서거 직전 검찰 수사를 받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도 노무현을 두둔했어야 할 그는 꽁지를 내리고 사태를 관망했었다. 노무현이 검찰수사로 궁지에 몰렸을 때 유시민이 한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저는 이번 사건의 진실을 알지 못합니다. 정책이나 정치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님 내외분의 개인적인 일이어서 사실 관계를 잘 알지 못하며, 따라서 아직은 규범적 판단을 내릴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 검찰 수사와 재판을 통해 모든 진실이 드러나리라 생각합니다."(유시민)

이것은 노무현의 영역에서 발을 빼는 발언이었다. 그리고 검찰 수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말로 읽힐 수도 있는 말이었다. 게다가 그는 스스로 예정되어 있던 시국강연을 모두 취소하며 자숙모드로 들어갔다. 그랬던 그가 노무현 서거 후 다시 인기가 치솟자 또다시 열렬한 노무현 지지자로 환생한다. 

유시민은 경기지사로 출마했을 때 울먹이면서 ‘대통령님’을 부른다. “보통사람들이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하는 정치...... 대통령님! 저 잘하고 있나요?” 유시민이 이렇게 말하자 뭣 모르는 순진한 지지자들은 함께 눈물을 흘려주었다.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겠다며 만든 국참당이 실패를 거듭하자 그는 갑자기 “민노당이 민주당보다 성숙한 정당 같다. 동지는 (민주당보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에 많다.”고 하며 진보진영에 접근해 통합진보당에 들어갔다.

지난 4·11 총선 직전, 그는 자기와 밀착관계였던 오옥만이 비례대표 제주도 온라인 투표에서 엄청난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위기감을 느꼈다. 부정 사실을 덮은 채 조마조마 총선을 치른 그는 선거부정을 오히려 이정희의 당권파에게 뒤집어씌우며 이정희의 백의종군을 요구했다. 이것은 정말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도 대담한 만행이었다. 

일이 뒤틀리자 국참당 펀드 부채 8억을 떼먹고 통합진보당을 탈당한 그는 일단 안철수에게 추파를 보냈지만 아무런 반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그는 셀프의원 4명이 포함된 진보정의당 후보 심상정의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그는 심상정의 선거운동에는 거의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문과 안의 단일화를 부르짖으며 교묘히 문재인을 지지하는 발언을 일삼고 있다.

유시민은 벌써 정계를 떠났어야 한다. 늦었다고 느낄 때가 적기라는 말도 있기는 하다. 사실 이제 그는 힘을 잃었으며 정치적인 영향력도 없어졌다. 다만 그는 남아서 노무현을 욕되게 하고 소수의 지지자들을 유린하는 짓은 더 할 수가 있다. 그를 화급히 떠나도록 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2년 11월 2일 금요일

[민족21] “우리나라 력대 국호들의 의미 모두 같다”

“우리나라 력대 국호들의 의미 모두 같다”
북 《통일신보》 기고|북 30대 공명성 역사학 박사의 최초 주장
《통일신보》 기자 webmaster@minjog21.com
34세의 나이에 조선사회과학원 력사학연구소 근대사 실장이 된 북의 차세대 역사학자 공명성 박사. 그는 우리 민족의 역대 국호 의미가 모두 동일하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담은 박사논문을 제출해 화제가 되었다. 그를 《통일신보》가 만났다.
홍영식 / 《통일신보》 기자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실장인 30대의 공명성(34) 박사는 최근 력사학계에 새별처럼 떠오른 전도 유망한 새세대 과학자이다.
대학 생활 5년, 연구사 생활 13년, 이것이 그의 경력이다.
그는 《조선고대사연구》 《조선력사사전》 《조선력사상식》 《조선대백과사전》 등 국보적 가치를 가지는 도서 집필에 참여하였고 30여 건의 론문들을 발표했다. 33살에 《조선력대국호연구》라는 박사론문을 발표하여 학계의 파문을 일으킨 것도 몇 달 전 일이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한 생이 걸려도 못다 할 큰 연구 성과들을 거둔 그 남다른 비결은 무엇일가.

언어해석학적 국호 해석 배격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에서 만난 공명성 박사.[통일신보]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를 찾은 기자는 정창규 소장(56)을 만났다.
소장은 “공명성 실장은 재능과 열정, 실력이 뛰여난 보배”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와 함께 공명성 실장의 방에 들어섰다. 크고 작은 책들과 원고더미들이 쌓인 곳에서 공명성 박사는 사색에 잠겨 있었다.
정창규 소장은 일단 연구에 몰두하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지 주위세계를 다 잊는 정열가가 공명성 실장이라고 말하였다.
‘정열 없는 천재란 없다’는 말이 그의 경우를 두고 하는 것 같았다. 청춘의 넋과 열정을 민족사 연구에 바쳐 가는 그의 진지한 탐구 자세와 불같은 열정에 연구 사업에서의 성공의 비결이 있는 것 같았다.
공명성 박사와 마주 앉았다. 보통 키에 다부진 체격, 둥구스름한 얼굴, 이악한 성미의 반영인 듯 곱슬진 머리. 리지적인 두 눈, 저도 모르게 그의 지성의 세계에 빠져드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기자에게 공명성 박사는 사양조로 말했다.
“사실 처음부터 박사론문을 쓸 의도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그가 《조선력대국호연구》라는 제목으로 론문을 쓰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7년 전인 1997년, 우리 나라 력대 국호들에 대한 외곡된 견해들을 바로잡고 주체적 관점에서 그 력사적 의미와 유래를 새롭게 밝히려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공명성 박사의 말.
“아마 가장 짧은 명칭 속에 가장 깊은 뜻이 담긴 말을 찾는다고 하면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국호일 것입니다. 국호에는 나라와 민족의 존엄과 영예가 집약적으로 반영되여 있습니다. 해당 나라 사람들의 시원과 념원, 신앙 그리고 세대를 이어 오며 개척해 온 슬기와 재능의 력사가 담겨 있지요. 이로부터 국호를 외곡하거나 말살하는 것은 결국 그 민족 자체를 말살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에 의하면 지난 시기 음흉한 목적을 추구하는 일본을 비롯한 일부 반동사가들에 의해 우리나라 력대 국호들이 외곡해석되여 왔다고 한다.
그들은 고구려라는 말이 몽골어나 퉁구스어로 해석된다느니, 백제라는 말이 만주어로 풀이된다느니, 발해라는 말이 녀진어의 ‘말갈’과 같다느니 하면서 국호에 대한 언어해석학적인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혈연적 단일성을 흐려 놓고 민족사의 유구성을 말살하려 했다.
단순히 학술적인 문제이기 전에 반만년 력사를 가진 슬기로운 우리 민족의 명예와 존엄과 관련한 문제였기에 공명성은 아직은 학계에서 숙제로 남아 있던 이 초미의 과제 해결을 스스로의 공민적 의무로 받아들였다.

역대 국호 의미는 ‘태양이 솟는 밝고 선명한 나라’
아직은 높뛰는 애국열 하나로 미지의 탐구세계에 도전한 그였다. 허나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더우기 연구의 나날은 온 나라가 허리띠를 조이는 ‘고난의 행군’ 시기이기도 했다. 련이어 덮쳐드는 시련의 파도 속에서도 연구사업만은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그 기간 《고대사회》 《삼국사기》 《고려사》를 비롯하여 그가 읽은 책만 해도 370여 권, 하나의 문헌자료 조사를 위해 수백 리를 다녀오기도 했다. 수년 간에 걸친 정력적인 연구 끝에 공명성 실장은 마침내 비과학적인 력사 외곡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그 속에 숨겨진 보석 같은 진리를 찾아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력대 국호들에 담겨진 진정한 력사적 의미와 유래들을 과학적으로 새롭게 밝혀냈던 것이다.
공명성 실장으로부터 론문 내용에 대한 해설을 듣던 기자는 놀라움과 흥분을 금할 수 없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금껏 존재해 온 우리나라 력대 국호들이 모두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에서였다.
그의 말이 흥미 있었다.
“5천년을 헤아리는 우리 민족 력사에는 수많은 나라가 흥망성쇠했고 또 나라마다 자기의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예 소유자 국가들이였던 조선(고조선), 부여, 구려, 진국과 봉건국가들인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고려, 조선(리조)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번 연구과정에 이 많은 나라들이 비록 건국시기와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그 이름들에 담겨진 력사적 의미는 한가지, 즉 ‘동방의 해 뜨는 나라’ ‘태양이 솟고 밝고 선명한 나라’라는 공통된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새롭게 밝혔습니다.”
그의 연구에서 특징적인 것은 국호의 의미를 순수 언어해석학적인 방법(한자의 뜻으로만 해석하는)이 아니라 해당 나라 사람들의 시원(혈연적 계보), 건국 과정, 신앙과 념원, 고유 조선어 등에 대한 해석을 통해 립체적으로 분석 종합한 것.
우리 민족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국호 ‘조선’의 의미와 유래에 대한 공명성 박사의 말을 들어보자.
“지금까지 국호 ‘조선’에 대해 각이한 해석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 실례로 한문식으로 해석한 ‘동쪽에 해 뜨는 땅에서 살았기 때문에 조선이라고 한다’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국조보감》 《조선고이》 《기자조선》 에 이렇게 되여 있지요.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이 정확한 것으로 될 수 없는 것은 그것을 안받침 할만한 력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순수 한자 뜻이나 ‘조선’과 비슷한 음가를 가진 말을 결부시켜 해석하려 한 데 기본 원인이 있었지요. 국호 조선의 의미는 단군에 의한 고조선의 건국과 밀접한 련관 속에서 고찰해야 합니다. 단군은 우리 민족의 건국 시조입니다. 력사적으로 볼 때 국호는 새 왕조가 서거나 정권이 교체되는 것과 함께 새로 명명되는 것이 통례이며 거기에는 정권을 쥔 세력의 정치리념이 반영되게 됩니다.”
이러한 력사적 사실들에 기초하여 조선이란 국호가 고조선의 아사달(평양의 강동-아사달이란 뜻은 밝게 빛나는 아침, 광명을 가져다 주는 동방의 아침을 의미)과 건국 시조인 단군(태양의 후손, 하늘이 낸 임금이란 뜻)의 군주 칭호, ‘박달’이라는 종족명과 깊은 련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의미는 ‘태양이 솟는 동방의 나라’라는 것을 밝혔다.

학계에 던진 파문
이와 같은 방법론으로 공명성 실장은 고조선 이후 국호들의 의미로 새로 정리했다.
그에 의하면;

  • 부여 - 태양(하늘)과 불을 절대적인 것으로 숭배하면서 단군조선족의 후손임을 나타내기 위해 부여 사람들이 정한 국호로서 태양, 불이라는 뜻.
  • 진국 - 태양이 솟는 동족이란 뜻. ‘진’은 고유 조선어로 동쪽을 나타내는 말이고 고대 조선 사람의 후손들로서 ‘태양’과 ‘해 솟는 동쪽’을 숭배한 진국 주민들의 신앙관념이 반영된 것.
  • 고구려 - 태양, 선손이라는 뜻으로 ‘고’와 비슷하고 성스러우며 크다는 뜻의 ‘구려’라는 말의 결합으로서 ‘태양이 솟는 신비한 나라’, ‘천손이 다스리는 신적인 나라’라는 뜻.
  • 백제 - 고유 조선어로 ‘박달’, ‘밝은 산’이란 뜻.
  • 신라 - 하늘(태양)을 숭배하던 고조선 유민들이 세운 나라로서 ‘새 날이 밝는 곳’, ‘태양이 솟는 벌’, ‘새벌’이란 뜻.
  • 발해 - 고유 조선어로 ‘밝은 해(태양)가 비치는 나라’, ‘밝은 태양이 솟는 나라’라는 뜻.
  • 고려 -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서 고구려와 같이 태양(하늘), 신성하다, 거룩하다는 뜻.

결국 렬거된 국호들의 의미를 하나로 통합하면 ‘태양이 솟는 밝고 선명한 나라’, ‘동방의 해 뜨는 나라’로 된다. 그의 이 론문이 학계에 던진 파문은 컸다.
지금껏 조선이란 이름의 뜻이 ‘해 솟는 맑은 아침의 나라’라는 데 대해서는 누구나 다 아는 상식으로 되고 있었다. 그러나 고조선으로부터 리조 시기까지의 모든 국호들이 모두 그와 꼭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데 대해 과학적으로 해명한 것은 그에 의해서 처음인 것이다.
우리 민족이 여러 나라로 갈라져 존재해 왔지만 단군을 원시조로 하여 하나의 피줄과 언어, 력사와 문화를 가지고 대대로 한 강토에서 살아 온 하나의 겨레임을 국호 연구를 통해 새롭게 확증했던 것이다. 열렬한 민족애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낳은 고귀한 결실이였다.
이로 하여 공명성은 2002년 11월 박사학위를 받았다. 33살의 젊은 나이에 학계의 당당한 인정을 받는 박사로, 력사학계를 떠메고 나갈 기둥감으로 단연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다.
사실 공명성 박사가 뛰여난 재능과 실력을 선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0년 전인 1993년, 그는 20대 나이에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연구조에 망라되여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연구조의 임무는 신화적 존재로만 단정되고 전해져 온 단군 유적과 관련 자료들을 전면적으로 조사발굴하는 것이였다.
련구의 중요성으로 하여 김석형 원사, 채희국 후보원사, 선영종 후보원사 등 관록 있는 력사학자들로 구성된 20여 명의 연구조에서 공명성은 당년 23살로서 가장 나이가 어린 연구사였다.

“력사는 전례가 가르치는 철학”
박사학위증을 수여받고 기뻐하는 공명성 박사와 가족들.[통일신보]
연구조 성원들은 고심 어린 노력이 깃든 수많은 물질적, 문헌적 자료들을 가지고 평양에서 3차례에 걸쳐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학술 발표회를 열고 고조선의 건국 년대는 B.C. 2993년이며 평양이 단군의 출생지, 고조선의 수도였다는 력사적 사실을 확증했다.
공명성 박사는 자기의 성공적인 오늘에 대해 말할 때면 늘 옛 스승들을 잊지 못해 한다.
중학 시절에 그는 재미나는 옛 이야기책과 력사책들에 묻혀 시간 가는 줄 모르던 ‘력사 애호가’였다.
그의 꿈은 지나간 모든 력사를 환희 꿰뚫는 력사학자가 되는 것.
소망대로 사회과학원의 교육체계에서 력사학을 전공하게 된 그는 홍기문 선생, 김석형 선생과 같은 명망 있는 스승들에게서 력사학을 배우게 되였다. 한 생을 력사 연구에 바쳐온 전세대 로학자들로부터 그는 풍부한 력사지식과 함께 뜨거운 애국의 넋, 력사학도로서의 참된 자세를 물려받았다. 력사 연구 성과로써 부강조국에 이바지할 푸른 꿈과 참된 넋을 키워준 고마운 스승들이였다.
이와 함께 과학자들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민족의 귀중한 재보로 아끼며 연구와 생활조건을 위해 온갖 혜택을 다 돌려준 조국의 품은 그의 희망과 탐구의 나래를 활짝 꽃피워준 어머니의 품이였다.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근대사 실장인 공명성 박사는 우리나라 력사학회 회원으로서 조선 일본군 ‘위안부’및 강제련행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 위원을 겸하고 있다.
현재 그는 일본이 력사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입힌 막대한 피해와 죄행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동시대 인간들, 후대들에게 이에 대해 똑똑히 알려 주어 비극의 력사를 다시금 되풀이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에서라고 한다.
“력사는 전례가 가르치는 철학이라는 말이 있듯이 단순히 흘러간 과거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오늘과 래일이 비껴 있지요.”
공명성 박사는 이 분야에서도 북남 력사학자들이 주체성과 민족적 립장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외세에 의한 력사외곡 행위와 반세기 이상에 걸친 민족의 분렬은 하나의 력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북남 사이에 서로 다른 인식의 차이를 낳고 있습니다. 력사학자로서 이것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다르게 인식되여 온 력사를 하나로 만드는 것, 이것이 곧 통일로 향한 길이 아니겠습니까.”
외곡된 민족사를 바로잡는 것으로서 통일에 이바지하겠다는 공명성 박사. 가슴 속에 애국애족의 더운 피를 안고 사는 이런 실력있는 새세대 과학자들이 력사학계를 떠메고 나갈 기둥으로, 통일의 주역으로 믿음직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다. [2003년 11월호]

2012년 10월 27일 토요일

차베스의 승리와 심상찮은 제3세계 반미운동

차베스의 승리와 심상찮은 제3세계 반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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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계 눈으로본 서구열강](15) 제3세계의 자주화투쟁과 21세기 미국의 세계침략정책
유태영 박사 
기사입력: 2012/10/22 [09:04]  최종편집: ⓒ 자주민보

중남미 반미자주독립국가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 지난 10월 7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4선에 성공하여 2019년까지 6년 더 연임하게 됐다. 베네수엘라의 역사를 생각해 보자. 1500년대에 베네수엘라는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의 침략을 받기 시작하여 400년 동안 농산물과 금광석 등 막대한 자원을 착취당했으며 침략자들은 원주민들을 살해하여 거의 전멸시켰다.

베네수엘라는 400년 동안 제국주의 침략자들과의 투쟁 끝에 식민지통치를 끝장내고 1800년대말과 1900년대초에 들어서서 드디어 베네수엘라는 미제국주의자들을 물리치고 최초로 자주독립을 쟁취했던 것이다. 베네수엘라 민중의 투쟁의 승리로 인하여 키프리아노 카스트로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베네수엘라는 반제반미 자주독립 투쟁을 승리하여 처음으로 자주독립의 역사를 성취했다.

하지만 그 후로부터 베네수엘라는 또 다시 100여 년 동안 외세에 시달림을 받았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령이 1992년에 반미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2년간의 감옥생활을 했다. 차베스는 1997년 ‘제5공화국운동’이라는 정당을 창당하여 대선에 출마하였으며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2006년에 차베스는 75%의 유권자들이 참여한 선거에서 63%의 높은 지지율로 재선됐으며 2012년 10월 7일에는 54.42%의 득표(경쟁후보 44.47%)로 4선에 또 다시 당당히 성공하여 2019년까지 6년간 연임하게 됐다.

베네수엘라의 자주화 과정은 미국이 주장하는 이원론적 이데올로기 체제가 절대로 아니다.  베네수엘라의 자주화 과정과 그 결과는 순전히 베네수엘라의 선조들이 서방의 침략자들에 대항하여 반서방 투쟁을 수백년 동안 어떻게 전개했던가를 토대로 삼고 있으며 선조들이 자기 해방을 위해 투쟁한 역사적 실마리를 찾아서 자주화투쟁을 전개한 순수한 역사적 발자취를 따르는데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주화투쟁의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오늘의 순수한 베네수엘라 민중의 투쟁의 과정에 대하여 미국은 베네수엘라 민중의 자주화투쟁을 ‘좌경’, ‘공산주의’, ‘독재정권’이라고 하는 이데올로기로 규정하여 강대국의 모략적인 패권을 마구 남용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자주화투쟁의 승리가 제3세계에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제3세계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강대국의 침략과 죽음의 논리를 완강히 거부하여 자주와 민족해방의 새로운 역사를 스스로 개척해 나아가야할 것을 분명히 제시해 주고 있다.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은 정치적 독립을 기초로 하여 경제, 사회, 문화적 분야에 있어서 민족해방과 구조적인 평등한 사회를 성취하기 위한 운동이다. 제3세계의 투쟁과정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민중, 민족해방의 과정인 동시에 또한 인간해방의 과정이 되기도 하다.  이러한 인간해방의 논리는 평등주의, 평화주의, 주체의식, 나눔의 공동체를 이룩하여 총체적으로 제국주의를 배격하는 새로운 민중들의 시대를 여는 자주화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제3세계의 자주화 과정은 어디까지나 결사적 투쟁에 의하여 구축되고 성취하는 것이다. 미제국주의자들이 제3세계에게 호의를 베풀어 제공해 줌으로서 자주화가 가능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사실에 있어서 미제국주의자들은 제3세계가 쟁취한 자주화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으로만 관찰하여 공산주의국가를 건설하고 있다고 무조건 단정하고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이 민중의 승리로 어렵게 쟁취한 인간해방의 논리를 악의적으로 이데올로기의 논리로 둔갑시켜 양자대립의 세계적 이념투쟁의 구조를 조성하고 있다. 이와 같은 미제국주의자들의 악의적 흉계는 제3세계의 순수한 민족해방과 자주화 운동을 흑백논리로 규정하고 선과 악의 대립과 공산주의자들의 운동이라고 악선전을 하고 있다.

제3세계의 민족해방 자주화 과정은 절대로 이원론적으로 대립하는 이념투쟁의 문제가 아니다. 제3세계의 자주화투쟁은 역사적으로 수백년 동안 계속한 선조들의 자주화투쟁이 어떻했는가를 인식하고 선조들의 자주화투쟁의 유산을 토대로 삼으면서 21세기의 자주화투쟁을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 제3세계의 모든 자주화 과정과 진로는 선조들이 개척한 민족해방 투쟁의 전통적인 토대와 그 진로를 기본으로 삼고 자주화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 제국주의, 식민주의, 패권주의, 관료주의, 침략적 폭정, 살인적인 과학기술, 정치적 매수, 교조적인 종교의 위선 등 미국의 죄악에 대하여 제3세계의 선조들이 어떻게 싸우고 극복하여 해방과 평화로운 세계를 구축하였던가 하는 것을 모색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21세기 제3세계 자주화 운동의 중요한 과제이다.

1. 제3세계에 대한 1950년대 이후 미국 침략정책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모든 나라들이 제국주의 식민지통치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할 것을 세계 인민들에게 호소하는 국제적 연대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50년대의 국제적 연대는 아시아지역 관계회의(1948년 3월)를 선두로 하여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서 해방운동의 토대를 세계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했다. 제3세계 해방운동에 대한 미국의 기본적인 침략정책은 미국의 이익과 미국의 세계지배와 패권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주화운동을 미국의 적으로 규정하면서 반식민투쟁을 저지하고 제3세계를 미국의 이념체제 아래 묶어두려는 정책을 강화하고 있었다.

미국은 미국과 동일한 이념체제의 서방국가들인 서독, 프랑스, 영국, 캐나다와 일본 등 여러 서방 나라들과 동맹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제3세계에 대하여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세 가지 정책을 활용했다. 첫째는 제3세계 국가들을 선별적으로 미국의 종속국가로 유인하는 방법이다. 둘째는 민주화의 명목으로 반정부 쿠데타를 일으켜 친미정권을 수립한다.  셋째는 봉쇄정책과 무조건적인 착취와 탈취를 강행하는 억압 정책이다.

미국의 제3세계에 대한 기본적 전략은 그 나라의 권위주의 정권을 고무하고 원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만일 그 나라에서 민중세력이 등장할 경우 보수대연합을 지원하고 강화하여 민중세력을 약화시키고 재편성하도록 하여 흡수시킨다.

미국이 쿠데타로 세운 친미군사정권을 끝까지 유지하려 하다가 민중세력의 반대로 인하여 위험하게 보이면 그 때 미국은 재빠르게 문민정부를 명목으로 하여 친미적인 민간정부를 세운다. 이와 같은 미국의 침략정책은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 그리고 동남아시아에서 전매특허식으로 1950년대 이후 줄곧 진행했다.

미국의 침략정책은 제3세계에 대하여 경제협력, 군부원조, 정보교환 공작 등을 포함하여 총체적 대중전략 (Total Grassroots Strategy)으로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제3세계에서 민중의 반미세력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친미적 성격의 정치, 사회, 문화를 구축하려는 저강도 전략(Low Intensity Strategy)을 장기적인 안목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주장하는 제3세계의 평화운동은 ‘제3세계 죽임의 무기’를 무진장 구축해 놓고 온갖 전략적 계획을 확대시키는 것을 뜻한다. 1980년대의 미국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연간 5,500억 달러가 군사비로 소모됐다. 하루에 20억 달러, 한 시간에 6,000만 달러, 1분에 100만 달러가 미국의 침략 군사비로 소모됐다.

미국의 군사비는 제3세계를 살리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제3세계에 대한 살해의 길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제3세계를 위협하기 위하여 핵무기를 소유할 뿐만 아니라 핵무기 전략기지를 확보하고 있으며 그 기지를 지킬 수 있는 미국의 대리정부인 군사독재정권을 세워 놓고 있다. 핵무기로 무장한 미국은 제3세계에게 흑백논리를 강요하여 친미우방은 선한 나라이며 반대로 민중이 지배하는 나라들은 악한 나라라는 선악의 이원론을 가르침으로써 동서냉전 시대를 조성하고 있었다.

1950년대 이후 미국의 제3세계 정책은 불안정한 민주정권보다는 안전한 독재정권을 더욱 선호하는 국제적 체제를 주로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저개발국가에게 적응시킴으로써 급진적인 혁명운동을 사전에 방지하고 있었다.

미국은 제3세계에서 급진적인 혁명운동을 사전에 방지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 예로 1960년대 이래로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에서 18개국 이상의 민중이 세운 민주정권들을 미국이 지원하는 군사쿠데타를 일으켜서 전복시켰다. 이러한 미국의 제3세계에 대한 개입정책은 라틴아메리카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나 미국의 안전을 위하여 전개되고 있었다. 1950년대 이후 제3세계에 대한 미국의 개입정책을 수행하는 방법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ㄱ. CIA 공작은 막대한 달러를 투자하여 정권의 고하를 막론하고 지방행정기구에 이르기 까지 매수작전을 하여 친미적 독재정권을 지원해 준다.
ㄴ. 미국의 대기업체들이 그 나라의 경제적 구조를 완전히 장악하여 정권의 정책과 민중의 삶을 지배하고 노동조합의 활동을 제한하고 봉쇄한다.
ㄴ. 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봉쇄한다. 라틴아메리카 브라질의 예를 들어 말하면 전국에 80개의 방송프로그램을 독점하여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미리 제작하여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신문 보도와 선전 팜플렛을 통하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민심을 조정한다.
ㄷ. 라틴아메리카에서 종교를 이용한 CIA 공작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특히 카톨릭 신부들과 수녀들까지 이용하여 풀뿌리 민심을 친미와 군사정부를 지지하도록 반공주의를 주입시키고 있었다.

1950- 2000년에 이르는 미국의 3세계에 대한 침략정책에 대한 세부적 기록은 지면상 제약으로 이것으로 마친다. 다만 결론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미국의 정치, 군사, 경제의 안보를 위하여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하여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오직 미국의 주도권 하에서 이념적인 정치적 안정을 유지한다. 둘째 제3세계에서 미국이 구축한 친미적 국가에 공산주의적 반미정권의 등장을 원천 봉쇄하여 반정부 게릴라 세력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낸다. 셋째 미국의 전세계적인 시장의 확대와 원자재 공급의 안전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어느 때나 군사적 개입을 추진한다.

2. 제3세계 자주화투쟁과 21세기 미국의 침략정책

21세기에 있어서 제3세계를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는 하부조직으로만 생각하는 미국의 침략정책은 옛날에나 21세기에 있어서나 조금도 변함이 없다. 21세기 미국의 세계전략은 미국에 대한 일체의 경쟁과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 정책이며, 그 추진 방식은 핵무장을 강화하는 정책이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으로 인하여 핵억제력을 갖추지 못한 제3세계 군소국가들은 국가의 주권과 생존이 중대한 위협에 봉착해 있다. 그리고 미국의 침략정책에 순순히 복종하지 않는 국가에 대해서는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하고, 고립 압박, 봉쇄 포위, 공격과 점령, 정권 교체 등으로 21세기형 식민지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9.11사태 이후에 이른바 ‘국가안보전략’을 제정했다. 2002년 9월에 미국이 공개한 이 ‘국가안보전략’에 의거하여 미국은 선제공격 정책을 주장하고 있다. 2003년 3월 미국이 이라크를 선제공격한 것은 바로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에 의거하여 21세기형 식민지 침략정책을 실현한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미국의 이라크침공은 침략정책이라고 하는 미국의 국가정책의 핵심이라고 하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났다.

미국의 21세기 국가안보전략의 근원적인 뿌리는 미국독립역사에서부터 찾아야 마땅하다. 미국의 독립전쟁을 자유의 쟁취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에 있어서 미국이 영국의 제국주의 통치체제에서부터 이탈하여 미국의 독자적인 경로를 통하여 또 하나의 새로운 제국주의적 국가를 1760년대에 아메리카 대륙에 건설한 역사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은 역사적 인식이다.

미국의 독립을 설계한 토머스 제퍼슨은 건국 초창기부터 ‘자유의 제국(Empire of Liberty)’이라고 하는 침략적 정책이 내포되어 있는 선언문을 작성했다. 이것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건이 바로 미국의 백인들이 아메리카 토착민에 대한 대량 학살행위였다. 그런데 말이 대량이지 사실은 거의 전멸학살이었다. 그러므로 미국의 국가 창건의 기원은 문자 그대로 피로 물든 역사이다.

그리고 미국은 백인우월주의(white supremacy)와 근본주의 기독교 논리에 따라서 선택받은 나라라고 주장을 하면서 끝을 모르는 침략의 야욕으로 경계선을 확정하여 팽창주의적 미국이라는 나라를 창건했던 것이다. 그 후의 미국의 침략에 대한 기록은 지면상 제약으로 여기서 마친다.

21세기에 들어서서 미국의 지배체제에 대항하는 제3세계로부터 도전이 이어지고 있다. 그 한 예가 미국의 이라크침공의 논리가 거짓인 것이 드러남으로써 미국의 국가안보 전략의 정당성이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라크전쟁의 과정에서 미국이 저지른 거짓과 악행에 대하여 중동의 아랍권을 비롯하여 전세계적으로 제3세계의 반격과 저항이 거세게 이어지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퇴진한 이유는 미국의 대외정책이 베트남전쟁 증후군과 동시에 또한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침략전쟁에 대하여 미국 내부에서 대중의 신뢰를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동맹국들 사이에서도 미국의 여전한 침략정책에 대한 반감이보다 깊어지고 있다.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지배점령정책에 대한 저항이 이란을 비롯하여 널리 확산되고 있다. 제3세계를 미국의 통치기준에 맞추어 지배하려고 하는 미국의 오만한 전략은 오히려 전세계적으로 거꾸로 반미 투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미국의 침략정책에 대한 제3세계의 저항의 힘이 아직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미국은 오판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3세계의 반제반미 저항세력의 무한함은 제3세계의 잠재력의 문을 세계적으로 보다 크게 활짝 열어 놓고 있다.

3. 미국이 돌이키지 않으면 제3세계 심상치않다

제3세계의 국제기구인 상하이협력기구(SCO)는 2001년 7월 14일에 창설되었는데 러시아, 중국,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즈스탄 그리고 타지키스탄 등 6개국을 정회원국들로 두고 있다. 그리고 준회원국으로 인도, 이란, 몽골, 파키스탄 등 4개국들이 있다. 그 다음에 SCO의 협력 파트너국으로 벨라루스, 스리랑카,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이 있으며 그외에도 독립국가연합과 동남아시아연합도 초청국가들로서 연합된 국제적 기구이다.

SCO는 도대체 무엇하는 국제적 기구인가? SCO 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서방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맞서는 위상을 갖는 또 하나의 국제기구이다. 이 SCO 정상회의에 이란의 아마디네자드 대통령과 아프카니스탄의 대통령 등이 반드시 참석한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세계적으로 중요한 뉴스거리가 된다. 이란과 미국은 서로 사활을 걸고 대립과 대치를 하고 있는 나라이며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패배를 인정하고 2014년까지 물러날 것을 선언하고 있다.

SCO는 미국의 아시아 침략의 야욕을 약화시키고 있는 구체적인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중국의 후진타오가 SCO에게 100억 달러를 지원해 주고 있다는 사실과 그리고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에 G8정상회의에는 불참하고 중국방문을 선택했다고 하는 사실은 SCO의 중요성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명확하고 강력한 대미공세인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미국이 아시아의 나라들에게 정치적으로 정직하지 않으면 이제는 국제적 관계에서 절대로 설 자리가 없다. 미국의 악마적인 CIA의 국제적인 공작과 공화당 네오콘의 제국주의적인 술수가 제3세계를 앵무새와 원숭이로 길들여놓고 마음대로 지배해 왔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서 미국은 제3세계를 더 이상 속일 수 없다. 이제는 제3세계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19-20세기에 있어서 지구촌에 살고 있는 제3세계를 미국이 서구문명과 기독교의 전통으로 뒤덮는 산업화의 이름으로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를 식민지로 만들어 놓고 마음대로 지배했다. 미국은 지구촌을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붙이는데 있어서 선봉에 달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미국은 과학적인 기술을 통하여 인류의 평화와 지구촌의 생태문제를 해결하는데 대하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1969년에 미국은 인간 역사상 최초로 인간을 태운 우주선 아폴로 11호를 발사하여 달에 착륙시키는데 성공했다. 1969년은 인간 역사에 있어서 미국은 최대와 최고의 과학 문명의 절정에 도달하는 것을 전세계에 과시하는 1969년 이었다.

하지만 1969년은 미국에게 또 어떠한 해였을까? 1969년에 미국 뉴욕주의 한 작은 시골마을에서 ‘우드스탁 페스티벌 1969’를 8월 15일 부터 3일간 개최했는데 50만명이 모여서 세계적인 반전시위를 전개한 유명한 해이기도 했다. 우드스탁이라고 하는 이 작은 마을에서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큰 평원을 꽉 메운 50만명이 미국 전역에서 운집하여 ‘우드스탁 페스티벌 1969’을 개최했는데 이 모임의 주된 목적은 월남전 반대와 혼탁해진 자본주의 체제의 부패 그리고 미국의 인종주의적 불공정한 사회제도에 대한 시대적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미국의 새시대를 향한 역사적 청년문화 창건을 위함이었으며 이에 대한 커다란 이정표를 세우는 행사였다. ‘우드스탁 페스티벌 1969’의 뜻과 교훈은 미국 사회의 저변에 존재하고 있는 대량 소비문화, 물질주의, 종교적 위선의 도덕주의, 약소국가들에 대한 침략정책으로 인하여 미국이 오만에 빠진데 대하여 젊은 지성인들이 항의하는 대표적인 반전평화운동이었다.

미국은 제3세계의 혼란을 이유삼아 혼란에 빠진 제3세계의 정권을 도와준다는 명목 하에서 미국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그 나라의 내정간섭을 정정당당하게 착수 하면서 친미정권으로 전환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미국 CIA의 공작 정략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과 동남아시아 제3세계에 속하는 100여개의 나라들에서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제3세계 나라들에 침투하여 공작하고 있는 CIA 비밀 요원들의 수는 대략 2000명 정도라고 추산한다.

하지만 미국의 제3세계에 대한 침투 공작은 절대적 만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만일에 미국이 옛 로마가 멸망한 것처럼 패망하는 운명을 자초하지 않으려면 이미 무력으로 과시하고 있는 강대국의 오만을 하루 속히 버리고 평화를 추구하는 선량한 나라로 변신해야 한다. 한국 속담에 끝이 좋아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역사란 시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에 의미가 있는 것이며 과거와 현재와의 연결과 대화가 정당 해야만 역사는 값있는 인류의 소산이 될 수 있다.              

21세기에 들어서서 미국의 제3세계에 대한 CIA 침투공작과 침략정책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미국의 변함없는 침략정책에 대하여 제3세계의 대응은 단호하고 결정적이며 심상치 않다. 미국의 공작 침략행위에 대한 제3세계의 대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ㄱ. “아랍의 봄”이라고 하는 전 세계로부터 이목의 집중을 받고 있는 반미 시위가 2010년 이래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산불처럼 일어났다. 알제리, 바레인, 이집트, 이란, 요르단, 리비아, 모로코, 튀니지, 예맨 등 중동지역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반제반미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아랍의 봄”이라는 명칭 외에도 중동과 북아프리의 반미운동에 대하여 “중동의 겨울” 또는 “아랍의 자각” “아랍인들의 반란” 등 여러 명칭으로 아랍세계의 반제반미 운동을 부르고 있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하여 서방의 언론들은 혁명적인 아랍의 봄에 대한 봄소식을 제대로 전하지 않고 위선적으로 축소와 왜곡보도만을 일삼고 있다. 이와 같은 미국과 서방 언론의 병든 왜곡보도에 대하여 미국의 유명한 석학 노암 촘스키는 논평하여 말하기를 봄이 오면 꽃이 피는 것을 언론이 막을 수 없다라고 논평했다.

특히 튀니지와 리비아 그리고 이집트에서 발생한 대중적 반미 반독재 투쟁은 분명히 장기적인 미국의 패권에 대하여 파열구를 낸 민중의 승리를 보여 주었다. 미국의 오래된 침략에 대항하여 아랍국가들이 미국에 덤벼드는 항쟁이었다. 

ㄴ. 인도에 대한 미국의 전략이 실패하고 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인도를 미국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인도를 21세기의 강국이 되도록 돕는 것이 미국의 아시아 정책이라고 주장하면서 “인도 키우기”를 선언했다. 미국은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인도를 이용하려는 포섭정책이었다.

오바마 대통령도 취임 후 제일 첫 번째 미국의 국빈으로 인도의 만모한 싱 총리를 백악관에 초청하여 인도와 차원 높은 협력을 다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과 인도와의 관계는 21세기에 가장 결정적인 파트너십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부시 대통령이 “인도 키우기”를 주장했다면 오바마 대통령은 “인도 달래기”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미국이 그 후에 중국과 정상회담에서 발표하기를 완전히 이율배반적인 성명을 발표했는데, “미국과 중국은 남아시아의 평화를 위하여 함께 노력하는데 있어서 중국은 미국의 유일한 파트너이다”라고 했다. 미국은 남아시아에서 인도를 완전히 제외시킨 성명을 발표했던 것이다. 

미국에 대하여 인도는 즉각 반발하는 성명을 냈다. 인도는 미국의 들러리 노릇을 하지 않는다고 밝혔으며 또 “전략적 동반자”라는 말장난도 허구인 것을 절실히 느끼면서 인도는 미국과 동반자 관계를 폐기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2014년에 실시되는 인도의 총선에서 친미정권이 집권하도록 하기 위하여 인도 내부에 침투하여 인도의 중앙정부와 주정부 사이를 이간시키는 공작을 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 CIA는 인도의 선거에 틀림없이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와 중국은 2007년과 2008년에 두 번 합동군사훈련을 했는데 미국의 반대로 중단됐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2012년 9월 4일 중국의 량광례가 인도를 방문하여 인도와 중국의 합동군사훈련을 또 다시 재개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ㄷ. 미국에 맞서는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이 심상치 않다. 미국의 뒷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중남미와 라틴아메라카의 여러 국가들이 이제는 미국에 대항하여 제각기 서슴없이 반제반미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19-20세기까지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다.

그동안 미국이 뒷마당 국가들에게 저지른 죄악적 침략과 착취 행위는 드디어 역사적 심판에 직면하고 있다. 어쨌든 남미는 미국의 달러 횡포에 너무 시달려서 이제는 중남미 “공동통화”를 도입하겠다는 말이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미국의 자유무역지대(FTAA)에 맞서 라틴아메리카에 볼리바르동맹(ALBA)이 창설되어 23개 국가들이 가입하고 있는 것이 오늘 라틴아메리카의 실정이다.

민족주권과 민중주권을 분리시키지 않고 동일시하는 자유해방운동이 남미의 여러 나라에서 정치적 화두가 되고 있다. 미국이 남미에 자유무역지대(FTAA)를 창설하여 남미를 미국이 신탁통치하려 하고 있다. 이것을  분명히 인식한 오늘의 남미의 민중들은 미국에 결사적으로 반제반미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ㄹ. “아프리카의 눈물”이라는 시사교양용 다큐멘터리영화가 있다. 지구의 눈물시리즈 세 번째 작품으로써 아프리카의 빈곤과 기근 그리고 문화의 후진성으로 인한 비참한 원시적인 삶의 모습을 흥미로운 흥행거리로 보여주고 있는 영화가 바로 “아프리카의 눈물”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프리카의 눈물”이라는 영화는 백인들의 관점에서 흥미로운 오락영화일 뿐이다. 이 ”아프리카의 눈물”이라는 영화는 진정으로 아프리카 검은 대륙의 흑인들의 역사적인 눈물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영화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모욕이 되는 작품이 되고 있다. 백인들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노예무역을 419년 동안 했는데 956만 6,100명이 넘는 많은 흑인들을 노루 사냥하듯 붙잡아 미국 등으로 팔아 넘겼다.

현재 아프리카 대륙에 54개국이 명목상 독립국으로 UN의 회원국이 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 54개 국가들의 연간 GDP를 모두 다 합한 총액이 6천억 달러에 불과하다. 이 6천억 달러는 코리아반도 남녘 한국의 연간 GDP 6천억 달러와 거의 같은 수준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아프리카 대륙에 “아프리카연합(AU)”이 창설되어 반제반미투쟁을 반세기 동안 줄기차게 계속하고 있다. 오늘 북아프리카에서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반미항쟁으로 인하여 미국은 아프리카 정책에 있어서 큰 문제에 봉착하고 있다. 미국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홍수처럼 또 산불처럼 꺼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반미항쟁에 대하여 매우 뼈아프게 느끼고 있다. 지금 아프리카 전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반미항쟁에 대하여 미국은 제대로 대처하는 곳이 하나도 없으므로 대아프리카 정책에 있어서 총체적 파국에 봉착해 있다.

미국이 그래도 버티고 있는 유일한 곳은 UN이다. 아프리카 지역에 54개 국가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주하는 아프리카 대표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래서 남아공의 제이콥 주마 대통령이 안전보장이사회에 아프리카 대표로 한 명의 자리를 요청했다. 하지만 미국은 아프리카 나라들의 수없이 많은 요청들을 UN의 테이블 아래로 묵살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미국의 아프리카 위기관리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으며 아프리카연합(AU)은 어두운 땅에서 “화려한 대륙의 미래”를 꿈꿨던 마틴 루터 킹 목사처럼 단지 갈망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아프리카를 백인의 눈으로 보지 말아야 하며 또 아프리카에 대하여 말을 할 때  백인들의 입으로 말하지 말고 아프리카인들이 스스로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ㅁ. 끝으로 미국의 침략주의에 대하여 제3세계의 대응이 심상치 않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이것은 제3세계 반미국가들이 장거리미사일을 속속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러시아는 미국에게 미사일 협정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은 오만방자하게 러시아의 요청을 무시하고 유럽에 미국의 미사일방어망을 단독 구축했다. 러시아도 미국에 맞대항하여 서유럽을 향해 미사일 전진배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어찌하여 강대국들만 미사일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러시아는 미국과 맞대응을 하기위하여 미사일을 소유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또 그 외에 제3세계의 군사강국이 미사일과 핵무기를 소유하는데 대하여 손을 잡고 미국에 대항하면서 제3세계를 위한 평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는 미국과 정면으로 미사일과 핵무기 대결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히 여기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중국과 인도 그리고 북조선(북한)과 손을 잡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인도와 함께 합동군사훈련을 논한다는 최근의 뉴스도 있다. 러시아는 제3세계와 손잡는 넓은 정책을 명백히 과시하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인도의 3자 연대는 아시아와 세계평화의 핵심이 된다.

미국은 제3세계 국가들이 이란을 비롯하여 속속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데 대하여 공포증에 걸린 환자가 되고 있다. 게다가 북조선이 2010년 5월에 핵융합반응에 성공했다고 발표함으로써 미국은 대북조선 정책에 있어서 진퇴양난의 곤경에 빠져있다. 북조선이 핵무기를 소유하고 있으며 또 장거리 미사일발사를 한다고 해도 미국은 북조선에 대하여 저지른 과거의 죄과로 인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미국의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외교안보정책의 원리와 세계전략의 핵심은 부시의 외교정책의 실패로 인하여 폐기될 수밖에 없게 됐다. 오바마 정권은 중국과 북조선의 핵무기의 부상으로 인하여 변화된 아시아의 상황에 대처하여 지금까지의 부시의 일방주의적 형태를 버리고 제3세계와 균형자로서의 역할을 강화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글을 맺으며

2012년 10월 19일 국제 뉴스에 의하면 미국의 CIA가 지원하는 시라아의 반군이 시리아 정부군과 전투를 계속하고 있으며 이웃 나라 터키도 역시 미국에 동조하여 시리아 국경에서 시리아 정권을 압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반기문 UN 사무총장도 시리아 정부에 대하여 공격적인 발언을 마구 퍼붓고 있으면서 시리아가 미국에 항복할 것을 강요했다. 또 UN은 코리아반도의 남녘 한국을 유엔안보리에 진출시켰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오늘의 모든 국제 뉴스들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뼛속까지 친미”라고 하는 이명박의 임기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미국의 안보정책이 MB의 안전을 끝까지 보장해 줄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미국 CIA의 역할이 박근혜의 대통령 출마에 대하여 미국의 지원을 위하여 어떤 모양으로 가능할 것인가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 오바마 대통령 재선의 당락을 좌우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영원한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어떤 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손이 분명히 한국의 대통령선거에 대하여도 어떤 형태를 통하여 작용할 것이다. 미국의 비밀의 손이 한국의 3인의 후보에 대하여 결정적인 관계와 감시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고 확실하다.

김상일 전 한신대 교수가 지적한 바대로 5.16, 유신, 인혁당사건 등으로 중범죄자인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한국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하는 사실 자체가 미국의 관여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또 정기열 박사가 통일뉴스에 기고하여 밝힌 바대로 MB의 연속인 “이명박근혜”로 이어지는데 대한 논의에 대하여 필자는 두 말하면 잔소리로 미국 CIA의 결정사항에 속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세상의 비밀은 반드시 역사적 오해도 낳을 수 있는 것이 비밀의 법칙인 것이다. 그러므로 비밀은 때로는 진리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비밀이 불의한 악마와 저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것을 인류의 역사는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 CIA의 비밀공작에 이용당하지 말고 오직 한국의 고질적인 망국병인 지방색을 배격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오히려 지방색을 아름다운 민족적인 민속으로 승화시켜서 아름다운 역사를 창출하는 선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2012년 10월 19일)
 

2012년 10월 25일 목요일

이정희 대통령 후보 쌍용자동차 문제 해결 1,000배 기원제 발원문


이정희 대통령 후보 쌍용자동차 문제 해결 1,000배 기원제 발원문
쌍용차 일천 배에 들어가며, 하늘을 날고 싶었습니다. 
 



하늘을 날고 싶었습니다.

2009년 여름, 쌍용차 도장 공장 옥상에 날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이분들도 저와 똑같이 가족이 있고 김치찌개 끓는 밥상이 그리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세상에 말하고 싶었습니다.

 
정작, 하늘을 나는 사람을 보던 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86일의 굴뚝농성을 마친 날, 좁은 굴뚝에 스스로를 가두고 지내야했던 노동자는 자신의 다리로는 내려올 수 없어 헬리콥터에 매달려 하늘을 날아야 했습니다.



부끄럽고 죄스러운 기억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때 도장 공장에 들어갔더라면, 조현오 경찰청장이 억지로 밀어붙였다는 경찰 진압만큼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사회적 보증이라며 정당과 국회의원들 나서서 노사 간 합의서 확인해놓고도, 복직 약속된 시간이 와도 지켜만 본 것 아닌가, 왜 물러서 있었던가.

총선만 잘 되면 다 해결하겠노라 큰 소리 쳤던 것 아닌가, 왜 미뤄두었던가.

 
회사가 비정규직 고용 늘리면서도 블랙리스트 만들어 조합원은 안 받는다는 말 듣고도, 근로기준법의 재고용의무조차 완전히 무시되는 상황이라 판단하고서도, 해봐야 되겠나 지레 주저앉은 것 아닌가, 왜 더 크게 말하지 못했나.

저도 아파요, 때마다 말 보태는 것, 장례식마다 얼굴 비치고 조사 몇 마디 하는 것으로 제 할 바 했다고 여긴 것인가, 왜 정리해고의 진실을 정면으로 파고 들어가지 못하고 에돌았던가.


진보정당 키워주었으니 뭔가 해내겠지 기대했던 분들을 오랜 기다림으로 실망 더하게 해드렸습니다. 제가 책임져야 할 일, 제가 사죄드려야 할 시간입니다.

 
아프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고통 끊어내지 못해 죄송합니다.

무엇을 하겠다 말하기 전에, 희생되신 분들과 아픔 겪는 분들 앞에 죄스러운 기억 다 드러내려 합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부끄러움 다 털어놓고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2012년 10월 25일
쌍용차 분향소에서, 일천 배를 시작하며
통합진보당 대통령 후보 이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