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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은 정말로 미국의 간첩이었나?
박헌영은 정말로 미국의 '간첩'이었나
[해방일기] 1946년 7월 5일 김기협 역사학자
1946년 7월 5일
1953년 3월 21일 북한 외무상 박헌영이 체포되었다. 이승엽 등 관련 인물들은 그 해 7월에 기소되었는데, 수괴로 지목된 박헌영은 1955년 12월에야 기소되었다. 죄목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전복 음모와 미제국주의자들을 위한 간첩 행위"였다. 기소장에 기록된 그의 '진술' 가운데 간첩 행위와 관련하여 이런 대목이 있다.
1945년 11월 초순에 나는 남조선 주둔 미군 사령관 하지를 서울 반도호텔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습니다. 그 사무실에는 하지와 그리고 이미 오래 전부터 나하고 간첩 연계를 맺고 있던 언더우드가 있었습니다. 이때 하지와 언더우드는 나를 반가이 맞이하여 주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자기의 사령관인 하지에게 향하여 나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1939년 10월부터 알게 되었는데 그때에 이미 친미적으로 나아가겠다고 언약한 바 있습니다"라고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하지도 나에게 대하여서는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나의 활동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 석상에서 정식으로 하지의 간첩으로 될 것을 약속하고 난 다음 하지에게 다음과 같은 과업을 수행할 데 대한 지시를 받았습니다.
즉 하지는 나에게 앞으로 "당신의 세력을 규합하고 남조선 공산당 내에서 지위를 튼튼히 하기에 노력할 것이며 북조선지역 공산당 조직 내부에 당신의 세력을 적극 부식시킬 것, 공산당 내에서의 일체 활동에 대하여 중요하다고 보는 것은 사전에 알려줄 것이며 공산당 내에서 호상 분열 사상을 조성시킬 것, 우리와의 관계가 나타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공산당을 합법적인 방법으로 타협적으로 나아가도록 지도하며 친미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다. 조선 사람은 일본 시대에 비합법적 투쟁과 폭동 파업 등의 방법으로 나아가서 분쟁을 많이 일으켰는데 미국 사람들 앞에서는 그러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렇게 앞으로의 활동 방향에 대하여 강조하였습니다. 나는 이에 대하여 그렇게 하겠노라고 언약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언더우드는 나에게 앞으로 자기는 나와 더 만나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알아달라고 말하기에 나도 좋다고 대답하고 나의 이러한 관계에 대하여 비밀에 붙여 주기 바란다고 제의하니 그는 그에 대하여서는 안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비밀 회견은 한 시간 이상 계속되었으며 통역은 언더우드가 직접 하였습니다. (<박헌영 노선 비판>(김남식·심지연 편저, 두리 펴냄), 463~464쪽에서 재인용)
여기 나오는 언더우드는 원두우-원한경-원일한 3대(代) 선교사의 중간인 원한경(元漢慶, 1890~1951년)이다. 1930년대에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지내고 미일 전쟁 발발로 쫓겨 갔다가 군정청 고문으로 임명받아 1945년 10월 26일 조선에 돌아왔다.
박헌영의 재판은 권력 투쟁의 산물이므로 공정한 재판일 수 없는 것이었고, 그의 혐의나 '진술'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럴싸하게 만들기 위해 애를 썼을 것도 또한 당연한 일이다. 1945년 11월 초의 만남도 그 자체가 조작된 것일 리는 없고 실제로 있었던 비밀 회동의 내용을 어느 정도 윤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 기소장에는 박헌영이 1939년 10월 "당시 서울 연희전문학교 교장이었으며 선교사로 가장한 미국 정보기관의 노련한 탐정인 언더우드"와 연계를 맺고 미국의 고용 간첩으로 전락되었다고 했다. 출옥 직후의 박헌영이 항일 운동에 동정적이던 언더우드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언더우드가 군정청 고문 취임 직후 공산당 총비서 박헌영과 하지의 비밀 회동을 주선한다는 것도 있을 법한 일이다.
임경석의 <이정 박헌영 일대기>(역사비평사 펴냄) 225~227쪽, 239~240쪽에 따르면 박헌영과 하지의 첫 번째, 두 번째 만남은 1945년 10월 27일과 11월 15일이었다고 한다. 기소장에서 말한 11월 초순의 모임이 10월 27일의 모임을 가리킨 것 같지는 않다. 언더우드가 바로 그 전날 입국했는데, 그렇게 빨리 움직였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첫 만남이 큰 성과 없이 끝난 것을 언더우드가 나중에 알고 보완을 위한 비밀 회동을 주선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자리에서 간첩 고용 계약이라도 맺은 것처럼 주장하는 기소장 내용은 터무니없는 것이지만, 비밀 회동이라면 뭔가 비밀 거래는 있었음직한 일이다. 군정청과 공산당 사이의 거래가 아니라 그 관리자인 하지와 박헌영 사이의 거래가 가능했다. 두 조직의 관리권(executive power)을 가진 두사람 사이의 양해 관계는 두 사람 모두에게 이득을 줄 수 있었다. 정보의 공유만 하더라도 관리자의 역할에 크게 보탬이 되는 것이었고, 행동의 조율을 통해서는 더 큰 이익을 바라볼 수 있었다.
박헌영이 공산당에서 강한 지도력을 유지하는 데는 하지와의 비선(秘線)도 한 몫을 맡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기소장의 주장처럼 공산당을 팔아먹는 짓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나름대로는 당을 위한 행동이었다 하더라도, 이런 비밀 거래는 편의주의에 빠질 위험이 크다. 자신의 이익이 곧 당의 이익이라는 믿음을 가지면 당의 이익보다 자기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기 쉽다는 말이다.
김남식과 심지연은 1946년 9월 6일의 체포령(박헌영 등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미군정의 체포령)을 계기로 박헌영의 미국에 대한 태도가 전반부의 '우의적 친선 방향'에서 후반부의 '적대적 대립 방향'으로 옮겨간다고 본다.
미국과 미군정에 대해 박헌영은 일관된 견해를 갖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도에 정반대로 태도를 바꾸어 많은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즉 46년 9월 체포령을 계기로 그의 견해는 우의적 친선 방향에서 적대적 대립 방향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체포령을 내린 군정 당국에 대한 보복 심리에서 나온 조치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미국을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호칭하는 등 마르크스 레닌주의적 이론 무장에 미흡해 "객관세계를 분석함에 있어서도 공산주의적 관점과 시각에서 일탈할 수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박헌영 노선 비판>, 76쪽)
1946년 봄까지 박헌영과 공산당이 미국과 미군정에 대한 직접 공격을 삼가고 미군정의 조선인 관리들과 경찰이 미군정의 노선을 벗어나는 행동을 한다고 비난했다. 미군정과의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전술적 고려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미군정의 이미 드러난 의도에 대해서까지 너무 눈을 감은 느낌이 든다. 지나치게 유화적인 태도가 공산당의 활동 노선 설정에까지 지장을 준 것으로 많은 비난을 모았다. 박헌영이 진짜 간첩 노릇까지는 아니더라도 당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미군정과 비밀 관계를 갖고 있었으리라는 의심을 일으키는 점이다.
공산당과 미군정 사이의 관계는 5월 초순 미소공위 정회와 함께 결정적인 악화의 길에 들어섰다. 5월 6일 정판사 사건수사가 벌어졌고 이튿날 미군 방첩대(CIC)가 조봉암의 편지를 공개했다. 미군정이 좌우 합작 지원 방침을 결정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미군정이 원하는 방향으로 좌우 합작을 진행시키기 위해 공산당이 좌익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상황을 깨뜨리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정판사 사건으로 수배되었던 공산당 재정부장 겸 총무부장 이관술이 7월 6일 체포되었다. 이를 계기로 사건 처리가 빨라져 7월 9일에 이관술을 제외한 12인이 검찰로 송국되었고, 7월 19일 9인이 기소되었다. 김용린 검사장은 '사건 전모'를 이렇게 발표했다.
1) 조선정판사 사건 관계자 급 범죄 사실
조선정판사 사장(조선공산당원) 박락종 동 서무과장(조선공산당원) 송언필 동 인쇄주임(조선공산당원) 신광범 동 창고주임(조선공산당원) 박상근 동 평판과장(조선공산당원) 김창선 동 평판부과장(조선공산당원) 정명환 동 인쇄직공(조선공산당원) 김상선 동(조선공산당원) 김우용 동(조선공산당원) 홍계훈
상 박락종 송언필 신광범은 작년 9월에 부내 장곡천정 74번지 근택삘딩을 접수하여 동소에서 경영하던 근택인쇄소를 조선정판사라 개칭하고 인쇄업을 경영하였는데 김창선 외 수명은 일정 시대 근택인쇄소 직공 재직 시 관헌의 명령으로 조선은행권을 인쇄한 사실이 있고 또 동 인쇄원판을 절취 소지함을 기화로 하여 상 전원이 공모하여 공산당비 급 정판사 경영비에 사용하기 위하여 작년 10월 하순부터 금년 2월 상순까지 수회에 긍하여 상 정판사 내에서 조선은행권 100원 권 1200만 원을 위조하여 조선공산당본부 재정부장 이관술에게 교부 사용케 하여서 경제를 교란케 (…)
(<동아일보> 1946년 7월 20일자)
용의자들이 검찰로 송국된 직후 7월 11일자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공산당의 혐의를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맹렬히 규탄했다. 그러나 이 사설의 마지막 문단을 보며 쓴웃음을 금할 수 없다. 뒷골이 당기기는 당긴 모양이다.
"지금까지에 알려진 내용은 경찰의 활동에 의한 군정 당국의 발표를 중심으로 한 사실뿐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이상의 논단을 내리기에는 충분한 재료가 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못 일부의 □□ 추측과 같이 사건이 어떠한 정치적 작위 하에서 경찰이 강작하였거나 위작한 사실이 판명된다 할진대 우리는 경찰을 과신한 우리의 불명과 군정 당국의 발표에 의거한 우리의 불찰을 천하에 사죄하는 동시에 그 사건의 중추를 해부하여 이 붓이 꺾일 때까지 규명할 것을 엄숙히 공약하는 바이다."
2013년 5월 24일 금요일
박헌영은 이론가가 아니라 책략가였다!
기사입력 2013-05-24 오후 6:26:38
그는 글머리에서 "박헌영과 절친하던 소련의 역사학자 샤브시나 여사"의 증언을 재인용함으로써 박헌영에 대한 애정을 밝혔다.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고 본다. 샤브시나는 해방 당시 서울에 주재하는 소련 부영사의 부인이었는데, 그의 기록 <1945년 남한에서>(김명호 옮김, 한울 펴냄)을 보면 매우 편파적인 기록자다. 해방 직후 상황의 외국인 목격자로서 그의 기록을 내 <해방일기>(너머북스 펴냄) 작업에 많이 활용하고 싶었지만 심한 편파성 때문에 가치가 적었다.
▲ <박헌영 트라우마>(손석춘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 ⓒ철수와영희 |
예컨대 그는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 아니라고 단언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남한 진보지식인들의 이러한 무지와 편견 혹은 기회주의적 측면"이라고 여지없이 매도한다. 이런 가혹한 비판을 하면서 그 대상을 명확히 표시하지 않는 것은 올바른 비판의 태도가 아니다.
나는 비록 진보지식인도 아니고 박헌영에 관해 깊은 연구를 쌓지 못한 사람이지만, 최근 3년간 해방공간의 상황을 넓고 깊게 살피려 애써 온 사람으로서 박헌영에 대한 안재성의 평가를 수긍하지 않는 이유를 나름대로 밝히고 싶다.
안재성은 글 끝에서 박헌영은 1945년 11월 30일 방송 연설이 "합리적이고도 감동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고 극찬하며 독자들에게 읽어보기를 권하는데, 나는 그에게 공산당-남로당 외의 그 무렵 다른 연설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듣기 좋기로 그만 못한 연설을 찾기 힘들 것이다. 정태식이 대독한 이 연설에는 당시 좌익에서 누구나 주장하던 상식적 내용을 넘어서는 것이 없다.
말보다 실천이 중요하다. 이 연설에서 박헌영은 6개 강령을 제창했는데, 그 대부분을 박헌영 자신이 행동에서 등진 것으로 나는 본다. 예컨대 제5조는 '정론 논쟁의 올바른 수단 방법'인데 박헌영이 이끄는 공산당-남로당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태를 많이 보였다. 그리고 제6조는 '각 정당은 주의 강령이 동일할 것 같으면 단일 정당으로 통일할 것'인데, 1946년 여름에서 가을에 걸친 좌익 합당 과정에서 박헌영 일파는 극히 패권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손석춘은 책 8쪽에서 "심지어 박헌영은 미제의 간첩이라고 부르짖는 진보세력도 남쪽에 나타났다"고 했는데 그런 주장을 내가 살펴본 것은 없다. 하지만 '간첩죄'의 일부분은 사실일 것 같다는 생각을 박헌영의 행적을 더듬어 오며 나는 갖게 되었다.
예컨대 그의 '월북'을 둘러싼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46년 9월 7일 미군정은 박헌영을 비롯한 공산당 간부들의 체포령을 내렸고, 떠들썩한 체포 작전으로 서울 시내가 발칵 뒤집혔다. 박헌영은 잠적했다가 몇 주일 후 몰래 38선을 넘었다. 그 직후에 공산당이 남로당으로 개편되었는데 허헌이 명목상 위원장을 맡은 남로당을 박헌영은 해주에서 지도했다.
9월 7일의 체포령이 경찰 아닌 군정사령부 쪽에서 나온 것부터 이상한 일이다. 당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기자들에게 "이번 사건은 경찰에서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상부명령으로 경찰이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수배 이유는 미군정 비방으로 포고령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당시 비슷한 혐의로 체포된 이주하는 공안방해죄로 8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런 사소한 혐의로 공산당 대표를 체포한다는 것은 미군정에게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좌익 지도자 입장에서는 체포를 당하고 법정투쟁과 선전공세를 펴는 것이 자연스러운 길이었다. 손석춘은 책 189쪽에 1946년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불법화했다고 적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박헌영 자신에게 북쪽으로 넘어갈 동기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서울이 모든 면에서 조선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공산당도 서울에 당 중앙이 있었고 박헌영이 그것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소련의 직접 지원을 받는 이북에선 공산주의 세력의 성장이 원활했다. 박헌영은 해방 직후 서울에 오자마자 소련영사관에 매달려 활동의 근거로 삼았는데 이북 주둔 소련군은 영사관보다 비교가 안 되게 더 큰 지원 통로가 되었다. 1946년 7월 김일성과 함께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을 만났을 때 박헌영은 소련의 지원을 놓고 경쟁하기 위해 이북에 가 있을 필요를 느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상황에서 체포령은 마치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려준 격이었다. 그래서 박헌영과 미군정 핵심부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 사령관과 박헌영의 초기 만남을 둘러싼 의문도 이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
임경석의 <이정 박헌영 연대기>(이정박헌영기념사업회 엮음, 역사비평사 펴냄)에 의하면 두 사람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만남은 1945년 10월 27일과 11월 15일에 있었다. 그런데 박헌영의 기소장에는 11월 초순 언더우드와 함께 하지를 만난 일이 적혀 있다. 언더우드(원한경)는 10월 26일에 사령관 고문으로 조선에 부임했는데, 해방 전에 박헌영에게 도움을 준 일이 있다고 한다. 박헌영 기소장에는 언더우드가 "선교사로 가장한 미국 정탐기관의 노련한 탐정"으로 지목되어 있다.
사령관 고문으로 막 부임한 언더우드가 아는 사이인 공산당 지도자와 사령관 사이의 비밀모임을 주선하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비선(秘線)을 유지함으로써 각자의 조직에서 관리자 역할에 도움을 주고받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약간의 정보 교환만 해도 하지에게는 좌익의 동향 파악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박헌영에게는 좌익의 헤게모니 장악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생각하면 박헌영의 항일투쟁 경력에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그가 똥을 집어먹는 등 정신병자 행세로 병보석을 받은 얘기를 손석춘이 책 앞머리에 적었는데,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같은 사건으로 수감된 죄수들 가운데 옥사한 사람은 있어도 병보석은 박헌영 하나뿐이었다. 병이 나면 감옥 안에서 죽게 놔두지, 풀어주지는 않는 상황에서 죽을병도 아닌 정신병으로 병보석? 그리고 병보석으로 나온 몇 달 후에 해외탈출 성공? 일제당국과 사이에도 어떤 교감이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 증거는 없지만 합리적 의심이다.
▲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박병엽 지음, 정창현·유영구 엮음, 도서출판선인 펴냄). ⓒ도서출판선인 |
안재성은 '보천보'가 어느 작은 마을에 있는 둑 이름이라고 했다. '보천洑'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데 사실 '보천堡'는 면소재지 급의 마을 이름이다. 어떻게 이런 착오가 나왔는지 궁금해서 손석춘 책을 뒤져보니 78쪽에 실린 원경의 발언 내용이다. 물론 문제의 초점은 보천보 전투의 주인공이 김일성이냐 여부에 있는 것이지만 기본 팩트는 정확하게 제시해야 독자의 신뢰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원경의 잘못된 생각을 아무 여과 없이 독자에게 전한 것은 두 분 모두에게 아쉬운 일이다. '프레시안 books' 편집자에게도 아쉬운 일이다.
현실에서 좌절을 겪은 인물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박헌영을 높이 평가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손석춘이 책 뒤에 '8월 테제'를 붙여놓은 것은 이것이 그가 이론적 지도자 자격을 얻은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중석은 '8월 테제'의 "많은 부분이 12월 테제의 번안이라고 판단될 정도"라고 평했다.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펴냄), 236쪽)
12월 테제는 1928년 제6차 코민테른의 비타협적 노선에 따른 것이었다. 1935년의 제7차 코민테른에서는 연대를 중시하는 쪽으로 노선이 바뀌었다. 그런데 박헌영이 제7차 코민테른의 노선을 해방 때까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바로 샤브시나의 증언으로 알아볼 수 있다.
재건위원회에서 정치노선을 작성할 때 박헌영은 우리 영사관 도서관에 자료 특히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 관련된 자료를 여러 번 의뢰하곤 하였다. (임경석, <이정 박헌영 연대기> 214~215쪽에서 재인용)
해방 직후 서울 시내 여기저기 "박헌영 선생은 어서 나타나 우리를 지도해 주시오!" 하는 벽보가 나붙어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 나는 박헌영의 지도력이 '8월 테제'보다 이런 책략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비밀을 좋아하는 책략가였다는 사실은 그의 행적 어느 대목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다.
박헌영의 책략가 성향이 민족사회나 좌익 전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가 이끈 공산당과 남로당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현시적 효과를 위해 당의 역량과 인민의 신뢰를 지나치게 소진시켰다는 지적은 널리 제기되어 왔다. 한국전쟁 발발에 대한 그의 책임도 그 연장선 위에서 거론되는 것이다. 그가 실제로 행사한 권력보다 더 큰 권력을 쥐었을 경우 이 민족에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나는 상상할 수 없다.
안재성의 저술을 내 작업에 고마운 마음으로 많이 활용해 왔지만, 근거 없는 생각을 너무 앞세우지 말아야 독자의 신뢰와 이해를 더 잘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번 글이 특히 그랬다.
박병엽의 진술을 안재성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하다. 노동당 간부 출신으로 남한에서 여생을 보낸 박병엽의 회고 내용이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2책, 중앙일보사 펴냄)에서는 '서용규'라는 가명으로 소개되었고, 최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도서출판선인 펴냄)과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도서출판선인 펴냄)에서 본명으로 나타났다. 나는 <해방일기> 작업 중 많은 장면에서 그의 진술이 정황에 부합한다는 판단을 내렸는데, 아마 안재성은 나랑 다른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종렬 "진짜 민생복지는 자주통일"
오종렬 "진짜 민생복지는 자주통일" |
14일 강연서 "자기 현장에 충실하자" 열변토해 |
▲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이 14일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초청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원호 통신원] |
“노동자, 농민, 학생, 공무원, 교원 등 각자 현장이 있다. 그대의 현장은 어디인가? 학교인가, 공장인가, 논두렁인가?”
“모든 출발점은 자기 현장이다. 학생은 강의실이고 학교 앞 술집이다. 노동자는 공장이요 사무실이다. 농민은 논두렁이다. 현장이 전선이고 전선이 현장이다. 현장에서 모든 것을 생산한다. 현장을 이탈하는 것은 자기 뿌리를 자르는 것이다. 진짜 민생복지는 자주통일이 아니면 안 된다. 자기 현장에 충실하자.”
“나도 걷겠다. 여러분도 평화순례단에 참여해서 통일의 길을 함께 걸어보자.”
한국진보연대, 통합진보당, 전국여성연대, 전국여성농민회총연맹, 서울통일연대, 통일의길 등이 공동으로 14일 오후 7시 서울여성플라자 대회의실에서 주최한 초청강연에서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이자 통일의길 이사장이 오랜만에 거리가 아닌 강연장에서 대중들과 함께 대화를 나눴다고 통일뉴스가 보도했다.
오종렬 의장은 먼저 광복 후부터 한국전쟁 전까지의 상황을 짚어보면서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에 전쟁이 있었다. 6.25라고 하는 전쟁으로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고 구원하러온 미국은 산타클로스라는 것이 지난 60년 동안 만들어진 우리의 역사 현실”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 당시 1945년부터 6.25전쟁 전까지 무려 10만여 명이 사망했다. 그것도 대부분이 총으로 인한 것이다. 하루에 54명씩 죽어나간 것이다. 전쟁상태가 아니고서 어찌 사람이 총에 의해 이렇게 많이 죽을 수 있단 말인가? 현실은 그 당시 이미 내전상태였다. 3.8선을 사이에 두고 6.25발생 1년 전부터 천회 이상의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다. 하루에 3건 이상의 전투가 있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전쟁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한 과정에서 가장 큰 무력동원이 6.25에 있었던 것”이라고 현재의 우리 국민들의 인식 정도와 당시의 남북 대치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서 그는 정전협정과 한미상호상위조약 체결까지 살펴보면서 한미군사훈련의 심각성에 대해 말했다.
“전쟁 발발 후 3년만에 미국측 플라크, 중국측 팽덕회, 북한측 김일성 3자에 의해 정전협정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는 전쟁을 중단하자는 것이지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협정문에는 정전협정 체결후 3개월 내에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외국군대 철수 및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들을 협의하기로 명문화 했다. 그러나 그해 10월 한미 당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면서 정전협정을 회피하였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후 거의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한미합동군사훈련을 해왔다. 군사훈련이라는 것이 명령만 바꾸면 곧 바로 전쟁이 개시된다. 훈련은 언제나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상존한다. 이러한 군사훈련으로 미국은 처치 곤란한 무기를 소모하고 한국은 값비싼 신무기를 도입하게 된다. 반대로 북한은 한미군사훈련에 대응하느라 경제력을 소모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외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이 기이하다고 한다. 강화조약 즉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60년간의 정전체제 하에서 평화가 된 것인 양 어떻게 그토록 무심하게 살수 있냐고 말이다”면서 우리 국민의 무감각한 정세인식을 꼬집기도 했다.
▲ 오종렬 의장은 평화체제 문제는 물론 개성공단 등 현안 문제까지 두루 진단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원호 통신원] |
또한 개성공단 사태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미해상합동훈련에 대해서는 “박근혜 대통령은 끝까지 개성공단을 지켰어야 한다. 북이 개성공단을 차단했다고 하나 인질 발언이나 돈줄을 막아야 한다는 등의 발언은 북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당국에서 대화제의를 하면서 하루만에 답변을 하라는 것은 무릎을 꿇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 당시 방한 중이었던 미국무부 부장관은 한국정부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미국의 고위 관리가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개성공단에 대한 한미 당국의 사전조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특히 “한미합동해상훈련을 위해 부산에 항공모함 니미츠호가 입항 했다. 누가 전쟁을 주도하고 누가 평화를 주도하는가를 보여준다”며 “민중이 알아야 한다. 깨어난 민중이라야 자기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오종렬 의장은 중국의 사상가 노신에 대해 언급하면서 “중국 현대사에서 인민을 깨우치기 위해 일어선 분이 있다. 노신 선생이다. 원래 의사 지망생이었다. 일본 유학시절에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하면서 저질렀던 만행을 기록한 영화를 보는 도중에 함께 보던 중국 동포들이 무덤덤한 것을 보고 병을 고칠 것이 아니라 인민들의 마음을 고쳐야겠다고 하면서 문학가, 사상가가 되었다. ‘청년아 나를 타고 오르거라’라는 유명한 말로 중국 인민을 일깨웠다”고 밝혔다.
또한 “노동자, 농민, 학생, 공무원, 교원 등 각자 현장이 있다. 그대의 현장은 어디인가? 학교인가 공장인가 논두렁인가. 모든 출발점은 자기 현장이다. 학생은 강의실이다. 학교 앞 술집이다. 노동자는 공장이요 사무실이다. 농민은 논두렁이다. 현장이 전선이고 전선이 현장이다. 김남주의 현장은 시 쓰는 책상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일깨우고 북치고 장구치고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현장에서 모든 것을 생산한다. 현장을 이탈하는 것은 자기 뿌리를 자르는 것이다. 진짜 민생복지는 자주통일이 아니면 안 된다. 자기 현장에 충실하자”고 역설했다.
그는 지난 4월 30일 미국 당국의 입국 거부 사건에 대해 지적하면서 수구 보수세력의 종북타령에 대한 우려도 나타냈다. “미국 동포들과 반전평화를 위한 활동을 하려 미국에 가려 하였으나 미국 정부의 입국거부로 가지 못했다. 심상치 않다. 모든 평화운동을 종북이라 몰아댄다. 쫄면 못한다. 종북이라 몰아치면 ‘아! 내가 애국자구나’ 하고 생각해야 한다.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하는 자세로 해나가자. 그래야 노동자가 살고 농민이 살고 학생이 산다. 그래야 복지가 있고 민생이 있다. 종북을 두려워 마라. 반전평화운동은 민생이요 복지다”라며 정전협정 60년을 맞아 이제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운동에 전면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도 함께 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 오종렬 의장 초청강연은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2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사진 - 통일뉴스 조원호 통신원] |
이날 초청강연에는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손미희 전국여성연대 상임대표 등 학생, 시민 1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2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한편, 지난 4월, 정전협정 60년을 맞아 평화협정 체결과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종교, 시민, 노동, 농민, 농민, 여성. 청년, 인권, 역사 단체들로 결성된 ‘전쟁반대 평화실현 국민행동’은 한반도평화 10만인 서명운동을 통해 취합된 8만여명의 서명이 담긴 용지를 5월 초에 청와대와 미대사관에 전달했다.
또한 평화나무잎새 달기운동, 평화지킴이, 국제평화선언, 국제평화심포지엄, 국제평화사절단, 평화순례단 도보행진, 7.27 국제평화대회 등을 계획하고 있다. 특히 평화순례단은 7월 4일부터 7월 27일까지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출발하여 전쟁의 상흔을 위로하며 전국을 걸어 7월 27일 임진각에서 국제평화대회에 참석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어 주목된다.
곽동기상임연구원- [곽동기 상임연구원] 진보의 자산은 미래를 향한 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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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은 곧 신념의 문제
미래를 향한 낙관은 개별 활동가들이 단순히 자기 기분을 좋게 가진다는 뜻이 아니다.
진보진영의 미래를 향한 낙관은 한 두 사람의 기분이 아니라 진보진영 전반에 형성될 수밖에
없는 과학적 필연이다.
진보운동의 정당성에 기초해 투쟁하는 진보진영은 언제나 운동승리에 대한 신념이 굳을 수밖에 없다.
진보운동의 신념이란 한국사회는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자주통일을 실현한다는 믿음이며,
그 길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의미한다.
진보운동의 신념, 승리의 신념은 운동정세의 평가로부터 확인된다.
개별 상층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정국을 분석하는 것은 공중파의 정치평론가들이나 할 일이다.
민중의 편에 선 진보운동가는 역사발전의 주인인 민중의 처지와 조건,
민중의 각성정도를 기본으로 정세를 분석해야 한다.
통합진보당의 몇몇 정치인들이 이른바 “자해소동”까지 빚으며 탈당한 결과,
통합진보당의 대중적 인식이 흐려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통령을 결정하는 사람은 몇몇 정치평론가와 국회의원들이 아니라 유권자, 민중이다.
위험천만한 남북관계와 이명박 정부의 경제파탄에 대한 높은 분노, 실망스런 기성정치권 등
민중의 분노는 현재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 땅 수천만 민중이 민족적, 계급적 모순의 본질을 직시하며 국민주권을 향한
커다란 걸음을 내딛고 있는 오늘의 역사적 흐름을 읽어야 한다.
미국이 세계를 제멋대로 쥐락펴락하던 시절은 영원히 끝났다. 미 달러경제의 몰락은
국내 친미보수세력의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친미보수세력이 안보장사로 재미보던 시절도 영원히 끝났다. 현정세는 북한이
사실상의 핵보유국에 올라서서 한반도 평화협정과 전면전 가운데 양자택일을 요구하고 있다.
주한미군 철수와 국가보안법 폐지문제가 떠오르는 것은 사실상 시간문제이다.
한국사회의 핵심모순인 미국의 한반도 군사적 지배체제와 달러의존, 재벌의존 경제의
문제점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오며 민중들은 이제 “국민주권”을 외치고 있다.
미래의 희망은 정치상층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기저에 흐르는 민중의 의식흐름에서
찾아야 한다.
역사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
진보진영이 미래에 대한 낙관에 넘치는 것은 지난 역사발전의 궤도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 지난 역사는 민중의 정치적 진출이 적극화되어 왔던 민중승리의 과정이었다.
우리국민들은 냉전시기만 하더라도 미국이 세계의 경찰인 줄 알았지만 세기가 바뀌어 21세기가 되니 누구나 부시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에 침을 뱉고 있다. 수천만 국민에게 일방적인 통행금지를 강요하고, 백주대낮에 무고한 시민을 고문하던 야만적인 군사독재체제는 민중의 냉혹한 심판을 받고 역사의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80년대 IMF의 구제금융에 신음하던 남미대륙에서는 좌파 정부가 연이어 집권하고 있다. 북한을 적으로 바라보던 지난 과거에는 선거철만 되면 각종 북풍논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2010년 지방선거에서 이명박 정부는 5.24 조치를 단행하였지만 한나라당은 오히려 역풍을 맞고 선거에서 패배하였다.
정치평론가들이 제 아무리 정국을 잘게 쪼개어 민중의 정치적 진출이 후퇴하는 것처럼 포장하려 해도, 역사는 엄연히 반제자주의 길, 국민주권의 한길로 도도히 굽이쳐왔다.
너무나 명백한 역사발전의 진리 앞에, 우리는 미래에 대한 낙관을 확신하게 된다.
20세기가 제국주의와 반제민중간의 첨예한 투쟁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제국주의 패권이 사라진,자주와 평등의 공정한 국제질서가 정립된 세기로 기록될 것이다. 패퇴 몰락하는 미국의 처지는 한반도 체제변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날로 높아지는 민중의 국민주권 열망은 기어이 기성정치권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정치, 참된 진보정치를 꽃피울 것이다.
낙관은 비관의 반대말
미래를 향한 낙관은 미래를 비관하지 말자는 말과 같다. 지난 역사적 과정에서 뚜렷이 증명되는 것은, 미래를 비관하는 운동가는 누구나 예외없이 자기운동을 자학하며 운동노선을 부정해 민중을 혼란에 빠뜨리곤 하였다는 점이다.
진보는 하나의 통일된 사상이론적 체계가 아니라 보수에 대한 상대적 표현이다. 현재의 사회문제점을 고쳐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든 세력을 진보라 통칭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래를 비관하는 사람은 진보의 자격이 없다.
진보진영이 현실의 문제점을 고치려고 애쓰는 것은 보다 밝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미래를 어둡게 느끼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과거에 집착하게 되어있고, 결국은 보수진영을 두드리게 되어 있다. 과거 민중당 시절의 김문수, 이재오가 지금은 새누리당에 들어앉아 있는 희한한 현실도 기본은 그들이 자기운동의 신념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내던졌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비관은 오히려 이명박 정권의 몫이다. 이제 몇 달 뒤면 청와대를 나와야 하는 이명박 대통령은 실세들이 이미 줄줄이 구속되었으며 현재 대통령 친인척에 대한 특검까지 진행되고 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들의 처참한 말로를 보더라도 미래에 대한 비관은 현 정권의 몫이지 우리 진보진영의 몫이 아니다.
상층정치 명망가들의 행보가 아니라 민중의 의식과 지향을 중심으로 정세를 판단하는 진보진영은 언제나 낙관에 넘치고 신심에 넘칠 수밖에 없다. 지난 5년간 벼르고 벼른 결과 마침내 대선국면이 다가왔다. 민심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고 내외 운동정세는 역동적으로 급진전하고 있다.
문제는 이제 진보는 다 끝났다며 자학하는 일부 상층 정치인들이다. 하늘을 찌르는 민중의 정권교체 열망에 부응하려는 진보운동진영이 문제될 이유는 전혀 없다.
미래를 낙관할 때 난관도 극복한다
물론, 미래를 낙관한다고 해서 진보운동 앞에 탄탄대로가 펼쳐져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낙관은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얻는 것이지 현존하는 어려움을 애써 외면하는 자기최면이 아니다.
진보운동에 열정을 가지고 임하면 숱한 가능성과 방법이 떠오르게 된다. 낙관은 열정을 낳고 열정은 진보운동의 폭발적 성장을 견인한다. 진보운동의 승리를 확신할 때, 투쟁에 나서는 민중의 열정은 배가 되고 새로운 창조가 연이어 나타난다.
그런 면에서 자기위업의 정당성에 기초한 정치적 자각 아래 진보활동에 뛰어든 진보운동가들은 비록 몸은 고될지라도 승리를 향한 낙관으로 마음만은 행복하다. 수십억 인류가 개척해나가는 역사발전의 한켠에서 내딛는 이름없는 작은 발걸음이라 하더라도 진보운동가의 마음은 긍지와 자부심으로 넘쳐난다.
고지는 여전히 눈앞에 있고 진보진영 앞에는 숱한 과제가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모든 난관을 헤쳐온 한국진보운동의 전통이 있으며 진보의 한걸음으로 줄달음쳐오르는 민중의 바다가 있다.
승리의 신심 드높이 민중의 바다에 뛰어들자. 미래는 투쟁하는 민중의 것이고 국민주권시대의 찬란한 미래는 확정적이다.
미래를 향한 낙관은 개별 활동가들이 단순히 자기 기분을 좋게 가진다는 뜻이 아니다.
진보진영의 미래를 향한 낙관은 한 두 사람의 기분이 아니라 진보진영 전반에 형성될 수밖에
없는 과학적 필연이다.
진보운동의 정당성에 기초해 투쟁하는 진보진영은 언제나 운동승리에 대한 신념이 굳을 수밖에 없다.
진보운동의 신념이란 한국사회는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자주통일을 실현한다는 믿음이며,
그 길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의미한다.
진보운동의 신념, 승리의 신념은 운동정세의 평가로부터 확인된다.
개별 상층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정국을 분석하는 것은 공중파의 정치평론가들이나 할 일이다.
민중의 편에 선 진보운동가는 역사발전의 주인인 민중의 처지와 조건,
민중의 각성정도를 기본으로 정세를 분석해야 한다.
통합진보당의 몇몇 정치인들이 이른바 “자해소동”까지 빚으며 탈당한 결과,
통합진보당의 대중적 인식이 흐려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통령을 결정하는 사람은 몇몇 정치평론가와 국회의원들이 아니라 유권자, 민중이다.
위험천만한 남북관계와 이명박 정부의 경제파탄에 대한 높은 분노, 실망스런 기성정치권 등
민중의 분노는 현재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 땅 수천만 민중이 민족적, 계급적 모순의 본질을 직시하며 국민주권을 향한
커다란 걸음을 내딛고 있는 오늘의 역사적 흐름을 읽어야 한다.
미국이 세계를 제멋대로 쥐락펴락하던 시절은 영원히 끝났다. 미 달러경제의 몰락은
국내 친미보수세력의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친미보수세력이 안보장사로 재미보던 시절도 영원히 끝났다. 현정세는 북한이
사실상의 핵보유국에 올라서서 한반도 평화협정과 전면전 가운데 양자택일을 요구하고 있다.
주한미군 철수와 국가보안법 폐지문제가 떠오르는 것은 사실상 시간문제이다.
한국사회의 핵심모순인 미국의 한반도 군사적 지배체제와 달러의존, 재벌의존 경제의
문제점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오며 민중들은 이제 “국민주권”을 외치고 있다.
미래의 희망은 정치상층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기저에 흐르는 민중의 의식흐름에서
찾아야 한다.
역사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
진보진영이 미래에 대한 낙관에 넘치는 것은 지난 역사발전의 궤도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 지난 역사는 민중의 정치적 진출이 적극화되어 왔던 민중승리의 과정이었다.
우리국민들은 냉전시기만 하더라도 미국이 세계의 경찰인 줄 알았지만 세기가 바뀌어 21세기가 되니 누구나 부시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에 침을 뱉고 있다. 수천만 국민에게 일방적인 통행금지를 강요하고, 백주대낮에 무고한 시민을 고문하던 야만적인 군사독재체제는 민중의 냉혹한 심판을 받고 역사의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80년대 IMF의 구제금융에 신음하던 남미대륙에서는 좌파 정부가 연이어 집권하고 있다. 북한을 적으로 바라보던 지난 과거에는 선거철만 되면 각종 북풍논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2010년 지방선거에서 이명박 정부는 5.24 조치를 단행하였지만 한나라당은 오히려 역풍을 맞고 선거에서 패배하였다.
정치평론가들이 제 아무리 정국을 잘게 쪼개어 민중의 정치적 진출이 후퇴하는 것처럼 포장하려 해도, 역사는 엄연히 반제자주의 길, 국민주권의 한길로 도도히 굽이쳐왔다.
너무나 명백한 역사발전의 진리 앞에, 우리는 미래에 대한 낙관을 확신하게 된다.
20세기가 제국주의와 반제민중간의 첨예한 투쟁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제국주의 패권이 사라진,자주와 평등의 공정한 국제질서가 정립된 세기로 기록될 것이다. 패퇴 몰락하는 미국의 처지는 한반도 체제변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날로 높아지는 민중의 국민주권 열망은 기어이 기성정치권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정치, 참된 진보정치를 꽃피울 것이다.
낙관은 비관의 반대말
미래를 향한 낙관은 미래를 비관하지 말자는 말과 같다. 지난 역사적 과정에서 뚜렷이 증명되는 것은, 미래를 비관하는 운동가는 누구나 예외없이 자기운동을 자학하며 운동노선을 부정해 민중을 혼란에 빠뜨리곤 하였다는 점이다.
진보는 하나의 통일된 사상이론적 체계가 아니라 보수에 대한 상대적 표현이다. 현재의 사회문제점을 고쳐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든 세력을 진보라 통칭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래를 비관하는 사람은 진보의 자격이 없다.
진보진영이 현실의 문제점을 고치려고 애쓰는 것은 보다 밝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미래를 어둡게 느끼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과거에 집착하게 되어있고, 결국은 보수진영을 두드리게 되어 있다. 과거 민중당 시절의 김문수, 이재오가 지금은 새누리당에 들어앉아 있는 희한한 현실도 기본은 그들이 자기운동의 신념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내던졌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비관은 오히려 이명박 정권의 몫이다. 이제 몇 달 뒤면 청와대를 나와야 하는 이명박 대통령은 실세들이 이미 줄줄이 구속되었으며 현재 대통령 친인척에 대한 특검까지 진행되고 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들의 처참한 말로를 보더라도 미래에 대한 비관은 현 정권의 몫이지 우리 진보진영의 몫이 아니다.
상층정치 명망가들의 행보가 아니라 민중의 의식과 지향을 중심으로 정세를 판단하는 진보진영은 언제나 낙관에 넘치고 신심에 넘칠 수밖에 없다. 지난 5년간 벼르고 벼른 결과 마침내 대선국면이 다가왔다. 민심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고 내외 운동정세는 역동적으로 급진전하고 있다.
문제는 이제 진보는 다 끝났다며 자학하는 일부 상층 정치인들이다. 하늘을 찌르는 민중의 정권교체 열망에 부응하려는 진보운동진영이 문제될 이유는 전혀 없다.
미래를 낙관할 때 난관도 극복한다
물론, 미래를 낙관한다고 해서 진보운동 앞에 탄탄대로가 펼쳐져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낙관은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얻는 것이지 현존하는 어려움을 애써 외면하는 자기최면이 아니다.
진보운동에 열정을 가지고 임하면 숱한 가능성과 방법이 떠오르게 된다. 낙관은 열정을 낳고 열정은 진보운동의 폭발적 성장을 견인한다. 진보운동의 승리를 확신할 때, 투쟁에 나서는 민중의 열정은 배가 되고 새로운 창조가 연이어 나타난다.
그런 면에서 자기위업의 정당성에 기초한 정치적 자각 아래 진보활동에 뛰어든 진보운동가들은 비록 몸은 고될지라도 승리를 향한 낙관으로 마음만은 행복하다. 수십억 인류가 개척해나가는 역사발전의 한켠에서 내딛는 이름없는 작은 발걸음이라 하더라도 진보운동가의 마음은 긍지와 자부심으로 넘쳐난다.
고지는 여전히 눈앞에 있고 진보진영 앞에는 숱한 과제가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모든 난관을 헤쳐온 한국진보운동의 전통이 있으며 진보의 한걸음으로 줄달음쳐오르는 민중의 바다가 있다.
승리의 신심 드높이 민중의 바다에 뛰어들자. 미래는 투쟁하는 민중의 것이고 국민주권시대의 찬란한 미래는 확정적이다.
2013년 5월 22일 수요일
2013.5.22 동백동 일기
2013.5.22 동백동 일기
오늘부터 당원분들을 전화도 하고 일대일로 만나기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만난 형님은 민노당 분당때 탈당하시고 다시 작년 합당때 가입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또다시 고민 중이라 하십니다.
형님께서 워낙 서슬 서글한 인상이시라 편히 대화를 나눌수 있었습니다.
진보당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이 이루어졌으나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
선단결후 대국민 사과, 후 진상규명은 어떠했냐고도 하십니다. 정치는 대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에 이걸 잊지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결국 다시 볼사람들이니 큰당에서 넓은 품으로 양보하고 했으면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 진보진영이 다시 통크게 단결할수 있다고 하십니다.
너무 큰 것을 잃었다는 것이 아쉽다고하십니다.
옳은 말씀 이십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진보진영에 대한 바램도 많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정책당대회를 말씀드렸습니다.
진보당이 국민들에게 내놓을 무기
진보당이 새롭게 나서겠다는 얘기
헤어지면서 분회모임 하면 불러달라고 하십니다.
좋은 느낌입니다.
자주 연락드리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만날 당원 분들은 더 힘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첫시작이 힘들지 두번 세번은 더 좋아 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탈당하신분들께도 자주 연락드릴겁니다. 그 이유는 언젠가는 결국 다시 만날 수 밖에 없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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