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일 금요일

[민족21] “우리나라 력대 국호들의 의미 모두 같다”

“우리나라 력대 국호들의 의미 모두 같다”
북 《통일신보》 기고|북 30대 공명성 역사학 박사의 최초 주장
《통일신보》 기자 webmaster@minjog21.com
34세의 나이에 조선사회과학원 력사학연구소 근대사 실장이 된 북의 차세대 역사학자 공명성 박사. 그는 우리 민족의 역대 국호 의미가 모두 동일하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담은 박사논문을 제출해 화제가 되었다. 그를 《통일신보》가 만났다.
홍영식 / 《통일신보》 기자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실장인 30대의 공명성(34) 박사는 최근 력사학계에 새별처럼 떠오른 전도 유망한 새세대 과학자이다.
대학 생활 5년, 연구사 생활 13년, 이것이 그의 경력이다.
그는 《조선고대사연구》 《조선력사사전》 《조선력사상식》 《조선대백과사전》 등 국보적 가치를 가지는 도서 집필에 참여하였고 30여 건의 론문들을 발표했다. 33살에 《조선력대국호연구》라는 박사론문을 발표하여 학계의 파문을 일으킨 것도 몇 달 전 일이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한 생이 걸려도 못다 할 큰 연구 성과들을 거둔 그 남다른 비결은 무엇일가.

언어해석학적 국호 해석 배격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에서 만난 공명성 박사.[통일신보]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를 찾은 기자는 정창규 소장(56)을 만났다.
소장은 “공명성 실장은 재능과 열정, 실력이 뛰여난 보배”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와 함께 공명성 실장의 방에 들어섰다. 크고 작은 책들과 원고더미들이 쌓인 곳에서 공명성 박사는 사색에 잠겨 있었다.
정창규 소장은 일단 연구에 몰두하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지 주위세계를 다 잊는 정열가가 공명성 실장이라고 말하였다.
‘정열 없는 천재란 없다’는 말이 그의 경우를 두고 하는 것 같았다. 청춘의 넋과 열정을 민족사 연구에 바쳐 가는 그의 진지한 탐구 자세와 불같은 열정에 연구 사업에서의 성공의 비결이 있는 것 같았다.
공명성 박사와 마주 앉았다. 보통 키에 다부진 체격, 둥구스름한 얼굴, 이악한 성미의 반영인 듯 곱슬진 머리. 리지적인 두 눈, 저도 모르게 그의 지성의 세계에 빠져드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기자에게 공명성 박사는 사양조로 말했다.
“사실 처음부터 박사론문을 쓸 의도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그가 《조선력대국호연구》라는 제목으로 론문을 쓰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7년 전인 1997년, 우리 나라 력대 국호들에 대한 외곡된 견해들을 바로잡고 주체적 관점에서 그 력사적 의미와 유래를 새롭게 밝히려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공명성 박사의 말.
“아마 가장 짧은 명칭 속에 가장 깊은 뜻이 담긴 말을 찾는다고 하면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국호일 것입니다. 국호에는 나라와 민족의 존엄과 영예가 집약적으로 반영되여 있습니다. 해당 나라 사람들의 시원과 념원, 신앙 그리고 세대를 이어 오며 개척해 온 슬기와 재능의 력사가 담겨 있지요. 이로부터 국호를 외곡하거나 말살하는 것은 결국 그 민족 자체를 말살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에 의하면 지난 시기 음흉한 목적을 추구하는 일본을 비롯한 일부 반동사가들에 의해 우리나라 력대 국호들이 외곡해석되여 왔다고 한다.
그들은 고구려라는 말이 몽골어나 퉁구스어로 해석된다느니, 백제라는 말이 만주어로 풀이된다느니, 발해라는 말이 녀진어의 ‘말갈’과 같다느니 하면서 국호에 대한 언어해석학적인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혈연적 단일성을 흐려 놓고 민족사의 유구성을 말살하려 했다.
단순히 학술적인 문제이기 전에 반만년 력사를 가진 슬기로운 우리 민족의 명예와 존엄과 관련한 문제였기에 공명성은 아직은 학계에서 숙제로 남아 있던 이 초미의 과제 해결을 스스로의 공민적 의무로 받아들였다.

역대 국호 의미는 ‘태양이 솟는 밝고 선명한 나라’
아직은 높뛰는 애국열 하나로 미지의 탐구세계에 도전한 그였다. 허나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더우기 연구의 나날은 온 나라가 허리띠를 조이는 ‘고난의 행군’ 시기이기도 했다. 련이어 덮쳐드는 시련의 파도 속에서도 연구사업만은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그 기간 《고대사회》 《삼국사기》 《고려사》를 비롯하여 그가 읽은 책만 해도 370여 권, 하나의 문헌자료 조사를 위해 수백 리를 다녀오기도 했다. 수년 간에 걸친 정력적인 연구 끝에 공명성 실장은 마침내 비과학적인 력사 외곡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그 속에 숨겨진 보석 같은 진리를 찾아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력대 국호들에 담겨진 진정한 력사적 의미와 유래들을 과학적으로 새롭게 밝혀냈던 것이다.
공명성 실장으로부터 론문 내용에 대한 해설을 듣던 기자는 놀라움과 흥분을 금할 수 없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금껏 존재해 온 우리나라 력대 국호들이 모두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에서였다.
그의 말이 흥미 있었다.
“5천년을 헤아리는 우리 민족 력사에는 수많은 나라가 흥망성쇠했고 또 나라마다 자기의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예 소유자 국가들이였던 조선(고조선), 부여, 구려, 진국과 봉건국가들인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고려, 조선(리조)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번 연구과정에 이 많은 나라들이 비록 건국시기와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그 이름들에 담겨진 력사적 의미는 한가지, 즉 ‘동방의 해 뜨는 나라’ ‘태양이 솟고 밝고 선명한 나라’라는 공통된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새롭게 밝혔습니다.”
그의 연구에서 특징적인 것은 국호의 의미를 순수 언어해석학적인 방법(한자의 뜻으로만 해석하는)이 아니라 해당 나라 사람들의 시원(혈연적 계보), 건국 과정, 신앙과 념원, 고유 조선어 등에 대한 해석을 통해 립체적으로 분석 종합한 것.
우리 민족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국호 ‘조선’의 의미와 유래에 대한 공명성 박사의 말을 들어보자.
“지금까지 국호 ‘조선’에 대해 각이한 해석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 실례로 한문식으로 해석한 ‘동쪽에 해 뜨는 땅에서 살았기 때문에 조선이라고 한다’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국조보감》 《조선고이》 《기자조선》 에 이렇게 되여 있지요.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이 정확한 것으로 될 수 없는 것은 그것을 안받침 할만한 력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순수 한자 뜻이나 ‘조선’과 비슷한 음가를 가진 말을 결부시켜 해석하려 한 데 기본 원인이 있었지요. 국호 조선의 의미는 단군에 의한 고조선의 건국과 밀접한 련관 속에서 고찰해야 합니다. 단군은 우리 민족의 건국 시조입니다. 력사적으로 볼 때 국호는 새 왕조가 서거나 정권이 교체되는 것과 함께 새로 명명되는 것이 통례이며 거기에는 정권을 쥔 세력의 정치리념이 반영되게 됩니다.”
이러한 력사적 사실들에 기초하여 조선이란 국호가 고조선의 아사달(평양의 강동-아사달이란 뜻은 밝게 빛나는 아침, 광명을 가져다 주는 동방의 아침을 의미)과 건국 시조인 단군(태양의 후손, 하늘이 낸 임금이란 뜻)의 군주 칭호, ‘박달’이라는 종족명과 깊은 련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의미는 ‘태양이 솟는 동방의 나라’라는 것을 밝혔다.

학계에 던진 파문
이와 같은 방법론으로 공명성 실장은 고조선 이후 국호들의 의미로 새로 정리했다.
그에 의하면;

  • 부여 - 태양(하늘)과 불을 절대적인 것으로 숭배하면서 단군조선족의 후손임을 나타내기 위해 부여 사람들이 정한 국호로서 태양, 불이라는 뜻.
  • 진국 - 태양이 솟는 동족이란 뜻. ‘진’은 고유 조선어로 동쪽을 나타내는 말이고 고대 조선 사람의 후손들로서 ‘태양’과 ‘해 솟는 동쪽’을 숭배한 진국 주민들의 신앙관념이 반영된 것.
  • 고구려 - 태양, 선손이라는 뜻으로 ‘고’와 비슷하고 성스러우며 크다는 뜻의 ‘구려’라는 말의 결합으로서 ‘태양이 솟는 신비한 나라’, ‘천손이 다스리는 신적인 나라’라는 뜻.
  • 백제 - 고유 조선어로 ‘박달’, ‘밝은 산’이란 뜻.
  • 신라 - 하늘(태양)을 숭배하던 고조선 유민들이 세운 나라로서 ‘새 날이 밝는 곳’, ‘태양이 솟는 벌’, ‘새벌’이란 뜻.
  • 발해 - 고유 조선어로 ‘밝은 해(태양)가 비치는 나라’, ‘밝은 태양이 솟는 나라’라는 뜻.
  • 고려 -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서 고구려와 같이 태양(하늘), 신성하다, 거룩하다는 뜻.

결국 렬거된 국호들의 의미를 하나로 통합하면 ‘태양이 솟는 밝고 선명한 나라’, ‘동방의 해 뜨는 나라’로 된다. 그의 이 론문이 학계에 던진 파문은 컸다.
지금껏 조선이란 이름의 뜻이 ‘해 솟는 맑은 아침의 나라’라는 데 대해서는 누구나 다 아는 상식으로 되고 있었다. 그러나 고조선으로부터 리조 시기까지의 모든 국호들이 모두 그와 꼭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데 대해 과학적으로 해명한 것은 그에 의해서 처음인 것이다.
우리 민족이 여러 나라로 갈라져 존재해 왔지만 단군을 원시조로 하여 하나의 피줄과 언어, 력사와 문화를 가지고 대대로 한 강토에서 살아 온 하나의 겨레임을 국호 연구를 통해 새롭게 확증했던 것이다. 열렬한 민족애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낳은 고귀한 결실이였다.
이로 하여 공명성은 2002년 11월 박사학위를 받았다. 33살의 젊은 나이에 학계의 당당한 인정을 받는 박사로, 력사학계를 떠메고 나갈 기둥감으로 단연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다.
사실 공명성 박사가 뛰여난 재능과 실력을 선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0년 전인 1993년, 그는 20대 나이에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연구조에 망라되여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연구조의 임무는 신화적 존재로만 단정되고 전해져 온 단군 유적과 관련 자료들을 전면적으로 조사발굴하는 것이였다.
련구의 중요성으로 하여 김석형 원사, 채희국 후보원사, 선영종 후보원사 등 관록 있는 력사학자들로 구성된 20여 명의 연구조에서 공명성은 당년 23살로서 가장 나이가 어린 연구사였다.

“력사는 전례가 가르치는 철학”
박사학위증을 수여받고 기뻐하는 공명성 박사와 가족들.[통일신보]
연구조 성원들은 고심 어린 노력이 깃든 수많은 물질적, 문헌적 자료들을 가지고 평양에서 3차례에 걸쳐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학술 발표회를 열고 고조선의 건국 년대는 B.C. 2993년이며 평양이 단군의 출생지, 고조선의 수도였다는 력사적 사실을 확증했다.
공명성 박사는 자기의 성공적인 오늘에 대해 말할 때면 늘 옛 스승들을 잊지 못해 한다.
중학 시절에 그는 재미나는 옛 이야기책과 력사책들에 묻혀 시간 가는 줄 모르던 ‘력사 애호가’였다.
그의 꿈은 지나간 모든 력사를 환희 꿰뚫는 력사학자가 되는 것.
소망대로 사회과학원의 교육체계에서 력사학을 전공하게 된 그는 홍기문 선생, 김석형 선생과 같은 명망 있는 스승들에게서 력사학을 배우게 되였다. 한 생을 력사 연구에 바쳐온 전세대 로학자들로부터 그는 풍부한 력사지식과 함께 뜨거운 애국의 넋, 력사학도로서의 참된 자세를 물려받았다. 력사 연구 성과로써 부강조국에 이바지할 푸른 꿈과 참된 넋을 키워준 고마운 스승들이였다.
이와 함께 과학자들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민족의 귀중한 재보로 아끼며 연구와 생활조건을 위해 온갖 혜택을 다 돌려준 조국의 품은 그의 희망과 탐구의 나래를 활짝 꽃피워준 어머니의 품이였다.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근대사 실장인 공명성 박사는 우리나라 력사학회 회원으로서 조선 일본군 ‘위안부’및 강제련행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 위원을 겸하고 있다.
현재 그는 일본이 력사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입힌 막대한 피해와 죄행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동시대 인간들, 후대들에게 이에 대해 똑똑히 알려 주어 비극의 력사를 다시금 되풀이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에서라고 한다.
“력사는 전례가 가르치는 철학이라는 말이 있듯이 단순히 흘러간 과거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오늘과 래일이 비껴 있지요.”
공명성 박사는 이 분야에서도 북남 력사학자들이 주체성과 민족적 립장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외세에 의한 력사외곡 행위와 반세기 이상에 걸친 민족의 분렬은 하나의 력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북남 사이에 서로 다른 인식의 차이를 낳고 있습니다. 력사학자로서 이것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다르게 인식되여 온 력사를 하나로 만드는 것, 이것이 곧 통일로 향한 길이 아니겠습니까.”
외곡된 민족사를 바로잡는 것으로서 통일에 이바지하겠다는 공명성 박사. 가슴 속에 애국애족의 더운 피를 안고 사는 이런 실력있는 새세대 과학자들이 력사학계를 떠메고 나갈 기둥으로, 통일의 주역으로 믿음직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다. [200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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