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에게 레닌이 필요한가?(최세진 글)
지금 우리에게 레닌이 필요한가?
최세진
‘종간호가 될 예정’이라는 12월호에 글을 준비해달라는 쪽지를 받고는 착잡한 기분으로
한동안 무엇을 쓰면 좋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 작년 한국을 떠나서 베네수엘라를 거쳐서 현재 캐나다에
머물면서 품어온 생각을 정리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먼저 현재 세계를 자극하고 있는 남미와
베네수엘라의 혁명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을 해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지만, 현재 베네수엘라에서 진행되는 혁명은 그야말로 세계 각국의 활동가 사이에서 관심의 촛점입니다. 제가 만나본 한 캐나다 활동가는 베네수엘라에 다녀온 뒤 ‘혁명의
사우나’에서 몸을 정화시키고 오는 기분이라는 우스개 소리를 하더군요.
베네수엘라에 차베스 정권이 들어선 이후, 베네수엘라에 펼쳐지는 혁명에 자극받은 남미의 민중들은
현재 대륙 전체를 흔들면서 좌파 도미노 현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덕분에 한국에서도 차베스의 정책을
연구하거나, 최근베네수엘라와 남미 상황에 대한 기사나 글들이 발표되는 모습을 자주 보는데, 안타깝게도 대부분 그런 연구와 글들은 ‘차베스’와 ‘차베스 정권’에 머물고
말더군요.
그런데 그 글들을 읽다 보면, 솔직히 그런 연구가 도대체 현재 한국의 민중운동에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왜 민중을 입에 달고 사는 운동가들이 베네수엘라를 민중의 시각에서 보지 않고,
차베스의 관점에서 보려 하는 걸까? 왜 차베스 정권을 만들기까지의 민중들의 투쟁을 보지
않고, 현재의 차베스 정책에만 관심을 가지는 걸까? 지금
우리에게 차베스가 없어서 운동이 질곡에 빠져 있는 건가? 아니 차베스가 한국에 오면 현재 베네수엘라와
같은 혁명이 가능하기나 한가? 베네수엘라에서 펼쳐지고 있는 정책들이 한국에서 대안으로 적용 가능한 것인가?
우선 차베스가 베네수엘라 혁명을 이끌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선 민중적인 시각이 아닐 뿐더러, 베네수엘라 현실에도 부합하지 못하는 착각일
뿐입니다. 오히려 차베스 정권 그 자체가 기나긴 베네수엘라 민중 투쟁의 결과물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작년에 베네수엘라에 가기로 결심했을 때, 물론 차베스 정권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지만 그보다 제가 배우고 싶었던 것은 차베스의 영광이 아니고, 차베스 정권을 만들어 낸 베네수엘라
민중들의 기나긴 투쟁과 운동의 역사였습니다. (당시 이런저런 사정으로 현지에 정착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금도 계속 아쉬울 따름입니다) 겉에서
보면 차베스의 정책에 대해 베네수엘라 민중들이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베네수엘라
민중들과 운동진영은 차베스 대통령을 무조건 추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야 ‘우리’의 말을 듣는 대통령이 나왔다.”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여당(차베스의
정당)이든 야당(우파 정당)이든
그들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혁명을 지지한다.” 즉, 민중들이 차베스 정권을 선택한 것이지, 차베스가 민중들을 지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민중들은 누구의 지도도 받지 않습니다.
베네수엘라 민중 운동 진영은 약 20여 년 전부터 빈민들과 농민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교육하고, 조직하기
시작했으며, 현재 베네수엘라 혁명에서는 바로 그들 민중이 혁명의 주체 세력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베네수엘라에서 ‘활동가’라는
말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 민중과 활동가를 구별하는 것이 더 이상 무의미한 상태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베네수엘라 활동가들이 기존의 좌파적 전통과 달리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생각
버리고 다른 길을 갔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베네수엘라 활동가들은 민중공동체 안에서 권력을 장악하기
보다는, 기존의 권력을 급속히 해체하고, 민중들을 공동체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만들었으며, 그들이 혁명의 주체가 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 결과 더 이상 활동가와 일반 민중이 구별되지 않는 현재 상태를 낳은 것입니다. 이제 한세대를 넘어가는 역사를 갖는 지역 공동체들에서는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민중을 위한 위대한 혁명가가 되는
꿈을 꿉니다. 실제로 베네수엘라는 지금 인구의 절반 이상이 이미 혁명가이자 활동가라고 봐도 다르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것은 차베스가 정권 초기 헌법 개정을
할 때 민중들에게 스스로 혁명 헌법을 만들도록 맡길 수 있었던 자신감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또한 2002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을 당시, 좌파 활동가들은 1973년 칠레의 피노체트 쿠데타를 떠올리며 도망가기 바빴는데, 민중들은
자발적으로 봉기하면서 이 군사 쿠데타를 무력화 시켜버렸습니다. 스스로 주인으로 인식하고, 혁명의 주체가 된 민중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잘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차베스는 다음날 “여러분들 민중이 스스로 민중권력임을 입증한 날이었다.”고 연설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였지요. “가난을 해결할 가장 간단한 방법은 가난한 자들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다.” 그
민중들은 차베스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민중들은 우파들의 공격에 맞서서
차베스 정권을 사수하는 투쟁을 전개하고 있지만, 안에서는 차베스 정권의 권력집중이나 그 관료들에 맞선
투쟁을 지금도 계속하고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를 ‘혁명 속의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이번에는 예전에 차베스 정권과 닮은꼴로
많이 비교되는 칠레의 아옌데 정권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해봅시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후 3년 내에 약 10%의 인구가 줄어들었습니다. 최저 약 3000명에서 3만
명이 암살당하거나 실종되었으며, 대규모 망명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
결과 아옌데가 집권할 당시 1천만 명이었던 칠레 인구가 3년
내에 900만 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물론 그 100만 명이 모두 활동가는 아니었겠지만, 활동가였거나 최소한 적극적
지지자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로 치자면 현재 인구가 약 5천만
명이니까, 약 500만 명이 활동가거나 혁명의 적극적 지지자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상상이 되시나요?
바로 그 정도의 두터운 활동가층이 있었기
때문에, 아옌데의 선거 혁명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터운
활동가층이 있었음에도 결국 미국의 지원을 받은 우파세력에게 전복당하고 말았습니다. 현재의 우리 상태를
한번 보죠. 현재 민주노총 조합원의 수가 2006년 6월 현재 76만 명이랍니다. 이
중에 활동가라고 볼 수 있는 건 몇 %정도 될까요?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당원 숫자가 약 8만, 그리고 그 외 다른 정치조직을
다 합치면 엄청나게 뻥튀기 해서 약 1만 명 될까요? 그럼
한번 계산해 봅시다. 이 사람들 중에 겹치는 사람이 없다고 치고, 그
인원을 전부 다 ‘활동가’로 봐도 겨우 100만 명을 넘지 못 합니다. 전체 인구의 2%가 안 됩니다. 실제로는 어떨까요? 심지어 NL 주사파까지 활동가라고 쳐도 남한의 활동가 숫자는 채 5만 명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전체 인구의 0.1%도 안 됩니다. 그런데 만약 좌파 활동가만 계산한다면?
왜 활동가의 숫자에 그렇게 집착하냐고
따지고 싶은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민중이 주체가 되지 못했던 ‘혁명’이 어떤 말로를 겪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민중들을 믿지 못해 혁명의 대열에서 민중을 소외시키고, 권력은 중앙으로 집중시킨 채 몇몇 ‘지도부’에 의해 좌지우지 되던 그 혁명은 끝내 부패한 독재권력으로만 남아 결국 민중들에 의해 다시 한 번 거부당하는
운명을 맞이했었습니다. 그 상처는 지금까지도 너무도 깊기만 합니다.
이번에는 레닌과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지요. 잘 알고 있는 사실처럼,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의 끝은 레닌과 볼셰비키가 마무리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 혁명을 과연 레닌이나 볼셰비키의 혁명으로 볼 수 있는 것인지는 개인적으로 상당히 의심스럽습니다. 레닌은
당시 십 수 년을 외국에서 떠돌아다니고 있다가 노동자 봉기 소식을 들은 후 러시아로 돌아왔고, 볼셰비키는
당시까지도 혁명 진영 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했으며, 진행 중인 혁명의 방향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내에서 다양한 혁명진영 중 한 그룹에 불과했습니다. ‘노동계급 독재’라는 개념은 레닌이 복귀한 이후 제창된 것이었고, 최종적으로 ‘사회주의소비에트공화국’으로
그 혁명의 성격이 결정된 것은 레닌과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인 1918년 1월이었습니다.
조금 앞으로 돌아가 보지요. 우리가 보통 1905년 러시아 혁명을 이야기 할 때 그 출발선으로 1905년 1월 겨울궁전 앞에서 1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학살되었던 ‘피의 일요일’ 사건을 떠 올리고, 당시 인민 봉기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찍었던 오데사의 전함 포템킨 수병들의 봉기를 쉽게 떠올립니다. 하지만, 피의 일요일 그 시위대열을 이끌었던 것은 볼셰비키가 아니었고, 그 피의 학살 직후 노동자들의 파업을 조직한 것 또한 주로 멘셰비키였습니다.
나중에 레닌이 ‘러시아 혁명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고 평가했던 포템킨호의 봉기를
이끌었던 수병들이 실은 아나키스트들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포템킨호에서 노동자위원회
대표로 뽑혔던 마뚜센꼬는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조직 혐의로 오데사에서 체포되어 1907년 사형 당했습니다. 또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당시 오데사의 수병들과 인민들의 봉기를 사수하기 위한 행동을 전혀 조직하지 못 했었습니다.
그럼 더 앞으로 가보기로 하지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하기
3년 전 1902년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탁월한 문건을 발표했습니다. 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발표했을 당시 러시아 노동자의 60%가 그 글을 읽었다고 합니다. 이 문건이 노동자들의 머리 속에 ‘레닌’이라는 이름을 각인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글을 참 많이들 읽고, 인용했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그 문건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그 글 자체의 내용보다는 ‘노동자의 60%가 읽었다’는
사실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배경을 빼고 나면 그 글은 사실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레닌이 무대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혁명을 기다리던 숫한 노동자들이 이미 거기에 존재했기에 그 글은
의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만일 당시 그렇게 준비된 노동자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탁월한 글이라고 할지라도 그 글은 그냥 꿈속에 사는 좌파의 의미 없는 선동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상황이라면 레닌은 아마도 전혀 다른 글을 썼겠지요.
저는 그 문건이 러시아 혁명의 시작이라고
생각지 않으니, 조금 더 앞으로 가봅시다. 잘 알다시피 레닌의
볼셰비키가 소속되어 있던 ‘맑스주의 러시아 사회민주 노동자당’은
겨우 1898년에 조직된 신생 정당이었으며, 1903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나누어질 때 볼셰비키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멘셰비키를 누르고 다수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신생 정당이 그 광대한 대륙의 노동계급을 그 단시간 내에 그렇게 조직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건 대단한 오해거나, 승자의 과장된 포장일 것입니다. 오히려 그 이전 오랜 기간 러시아
민중운동의 성과를 레닌과 볼셰비키가 수확했다고 보는 게 맞겠지요.
지금 우리의 상황이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어
수확할 상황이라고 판단한다면, 레닌이 펼쳤던 당시의 전술이 많은 교훈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80년대에 가졌던 그 커다란 착각을 지금까지 계속 고집할
이유는 전혀 없을 것 같습니다. 80년대 이후 과연 우리에게 노동계급의 60%가 혁명적 문건을 찾던 시기가 있었던가요? 전체 인구의 10%가 활동가였던 때가 있었던가요? 러시아와 칠레는 그럼에도 실패했습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의 사망 이후 광범위한 대중들에 의해 진행되었던 촛불시위를
우리 모두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2002년 촛불시위에 도달하기까지 배경이 되었던 다양한 투쟁들과 사건들, 선전과
소통, 대중적 참여는 다 사라지고, 촛불만 남은 모습을 우리는 FTA 반대 투쟁에서 봅니다. 당시 촛불시위의 의미는 ‘촛불’에 있었던 것이 아닌데, 현재
민중운동 진영은 오로지 촛불만 기억하고, 그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2002년 이후 아무런 반성 없이 운동 조직의 관료화와 비민주적인 운영, 소수 명망가 중심의
집회문화는 그대로 둔 채 촛불만 켜면 대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이만저만 심한 착각이 아닙니다. 좌파진영에게 있어서 꼭 레닌과 볼셰비키가 그런 촛불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레닌이 아닙니다. 지금 한국은 혁명적 고양기도 아니고, 20세기초 러시아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던져졌던 레닌은 우리의 착각만 크게 불러 일으켰다고 생각됩니다. 80년대 간절히 혁명을 원하던 우리는 그 시기를 레닌의 눈을 통해 20세기
초 러시아의 혁명적 시기라고 착각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민중운동의 성과를 수확하는 시기가 아니라, 아직 젊디젊은 우리의 운동이 이제 막 던져진 씨앗을 파릇파릇 새싹으로 가꾸어야 할 시기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중운동의 결과물을 수확하는 레닌이 아니라, 거름을
주고 잡초를 솎아내고, 오랜 기간 그 속에서 함께 할 활동가들입니다.
우리는 ‘맑스주의 러시아 사회민주 노동자당’이
등장하기 이전의 러시아 민중운동을 살펴봐야 합니다. 민중들이 계급정당의 탄생을 요구하게 된 과정을 보아야
합니다. 현재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레닌의 막판 뒤집기가 아니라,
19세기의 러시아 민중운동일 것이며, 차베스 이전의 베네수엘라 민중운동 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동안 가졌던 ‘혁명적’ 착각에서 벗어나 왜곡된 운동 진영의 구조를 개편하고, 새롭게 인식한 상황에 전망과 이에 걸맞는 활동가 재생산 일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만약 레닌에게 배워올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가 항상 주장했던 “학습하라, 선전하라, 조직하라!” 일 것입니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해서 새로운 이론으로 무장하고, 대중들에게 알리고, 그 선전을 바탕으로 조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운동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 상황을 한번 돌아보지요. 좌파에게 있어서 가장 큰 비극은 사회과학 서점과 출판사가 문을 닫고, 민중문화
단체가 하나둘 사라져 간다는 것입니다. 이건 새로운 현상도 아닙니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진행되어 온 일입니다. 과연
한국에 ‘좌파’가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요? 현재 한국에 좌파가 존재하다면, 그 ‘소위’ 좌파는, 생각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고, 토론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재생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문화를 포기했습니다. 이는 ‘싸움’은 있더라도 세상을 바꾸기 위한 ‘운동’은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현재의 투쟁들은 과거의 축적된 운동을 소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상황은 현재의 운동뿐만 아니라, 미래의 투쟁까지도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노정연이 문을 닫게 될 것이라는 소식은 그래서 더 착잡합니다.
아직도
‘커리큘럼’이라는 게 있는 곳들을 뒤져보면, 80년대
만들어진 학습 과정이 버젓이 버티고 있습니다. 80년대에 만들어진
19세기의 이론으로 21세기를 바꾸겠다고 주장하는 건 한마디로 코메디입니다. 이건 ‘운동’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입니다. 세상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자기 꿈속에나 있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한다면, 그건 활동가가 아니라 몽상가겠지요.
현재 민주노총이나, 민주노동당 안에서 그 ‘권력’을
쥐고 벌이는 주사파들의 삽질은 말 그대로 그냥 삽질일 뿐입니다. 그 삽질은 세상을 변화시키지도, 사람을 변화시키지도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조직
내 권력 싸움에 매몰되어서, 민중들로부터 이탈되고, 고립된
그런 삽질 권력다툼에 같이 동참해봐야 남는 건 ‘먼지구덩이’일
뿐입니다. 제발 이제라도 그 삽질에 동참하는 것을 중단합시다. 이는
그 조직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조직 내에서 우리의 활동방향을 바꾸자는 것입니다. 좌파는 다시 민중 속으로 들어가고, 학습하고, 선전하고, 조직해야 합니다. 다시
학습과 토론 시스템을 세우고, 대중과 조직 내에 좌파적 요구에 대한 선전을 강화하고, 그 결과물을 가지고 조직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토론하고, 공부하고, 선전하고, 조직하는
게 안 되니까 그 쪼그마한 운동권내의 권력싸움에 뛰어드는 겁니다. 가장 쉬우며, 가장 빨리 망하는 길이 운동권 내 ‘권력’ 잡기 놀이판을 펼치는 것이고, 조직 밖의 98%의 민중들을 만나는 게 아니고, 채 2%도 안 되는 조직원 내에서 ‘권력 잡기’ 놀이를 펼치고, 거기에 역량을 투여하는 겁니다. 도대체 지금 그 안의 권력투쟁이 왜 중요할까요? 내일 혁명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안에서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이후 혁명의 진행에 필수적인 상황인가요? 저에게는 오히려 거기에
발목 잡힌 상황으로만 보일 뿐입니다.
최소한
30년을 준비하는 좌파의 운동이 필요합니다. 학습하고, 선전하고, 조직하자. 이게 기본입니다. 현재에
매몰되지 말고, 미래를 만들어 나갑시다. 각 조직에서는 헤게모니
싸움에 역량을 소비하기 보다는 2-3년 앞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의견으로 ‘조직내 조직활동’을 전개해 나갑시다.
제가 한번은 베네수엘라 활동가들에게 의문을
표시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미 차베스 정권이 들어선지 수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빈부격차는 여전하고, 전면적인 경제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차베스 정권 이후 무료
의료 등 여러 가지 복지제도가 들어섰지만, 이렇게만 진행된다면 그 결과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서구형 복지국가를
벗어나기 힘들지 않겠느냐. 왜 현재 차베스는 전면적인 경제 혁명을 추진하지 않는 것이냐. 만일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차베스는 ‘포퓰리스트’라는 혐의를 벗기 힘들 것이다.” 그러자 그 활동가는 “네 말이 다 맞다. 아직 빈부격차는 여전하고, 전면적인 경제 시스템을 바꾸는 혁명을
일어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말이다, 모든 혁명이 같은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생각을 버려라. 베네수엘라에는 베네수엘라에 맞는 혁명이 있는 거야. 만일 너희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면 그건 또 다른 혁명이겠지. 우리는
러시아가 경제 체제를 먼저 변경하고, 정치 혁명을 진행하는 것과는 반대로 진행이 되었어. 우리는 먼저 정치 혁명이 일어난 후 경제 혁명으로 나아가는 단계에 있는 거야.
차베스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 혁명에 있어서 그의 역할을 썩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혁명은 차베스가 하는 게 아니야. 바로 우리 민중들이 하는
거지.”
우리는 이제 우리의 혁명을 다시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 혁명은 ‘우리’ 활동가의 혁명이 아니고, 민중과 노동계급의 혁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시작합시다. 다시 민중 속으로 들어갑시다.
글을 쓰다가 지나간 생각들
- 우파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돈 계산만 잘하면 된다. 주사파도 공부할 필요가
없다. 지도자 동지 말씀만 잘 따라가면 되니까. 하지만 좌파는
공부해야 된다. 민중이 믿을 거라곤 민중 자기 자신 뿐이기 때문이다.
- 레닌과 볼셰비키로 상징되는 러시아 혁명사 역시 승자의 기록이다.
- 레닌이 무엇을 했나 보다, 왜, 어떻게 당시 러시아 민중들이 레닌을 선택했는지 알아봐야 한다. 러시아와
베네수엘라의 민중을 보지 않고, 레닌과 차베스를 찬양하느라 바쁜 사람들은 혁명을 위해서 ‘영웅’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 골라서 자기들의 영웅을 만드는 운동을 하면 된다. 아니면 지가 영웅이 되던지.
- 혁명을
이야기하면서 ‘지도’를 말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민중 혁명이나
계급 혁명으로 부를 것이 아니라 ‘지도부 혁명’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만들고 싶어 하는 세상은 ‘운동권 세상’이 아니고, 민중이 해방된 세상이다.
자기 머리 속에 원하는 혁명을 위해 민중의 이름을 팔지 마라.
- 레닌, 차베스, 아옌데를 이야기하기 전에, 러시아 민중과 베네수엘라 민중, 칠레 민중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자.
- 미국 핑계 좀 대지 마라. 미국의 뒷마당이라 불리는 남미는 지난
19세기까지 400여 년간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20세기
이후에는 남한이나 북한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훨씬 더 강력한 미국의 지배 아래 놓여있었다.
- 현재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관료제’를 채택하고 있다. 한국 내 대부분의 다른 단체들도 관료제로 운영되고
있다. 그 ‘관료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면서 거기서 일하는 상근 활동가들을 ‘관료’라고
비난하는 건 사실 코메디다. 관료주의와 관료가 싫으면 의사결정과 집행체계에 있어서 골간이 되는 그 관료제를
먼저 바꿔야 한다.
-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에 보면 다음 구절이 나온다.
주인공 셀던은 앞으로 3백년 후에 다가올 암흑의 세월 3만년을 예감하고, 그 3만년을 1천년으로
줄이기 위해 조직을 건설한다. 그에 대한 질문과 답변.
질문
: 인류의 전체 역사를 바꾸는 것이 가능한가?
답변
: 네.
질문
: 쉽게?
답변
: 아니요. 엄청나게 어려울 것입니다.
질문
: 왜 그런가?
답변:
행성에 가득한 사람들의 역사심리학적인 경향은 거대한 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비슷한 수준의 관성과 만나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여하거나, 만일 관련된 사람의 숫자가 적다면 변화를 위해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 맑스와 엥겔스, 로자가 살았던 독일조차
나치라는 가장 극악한 극우 정권을 막지 못했다. 나치가 태동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은 역사상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헌법 체계를 가졌던
국가로 남아있다. 나치는 그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
당시 독일 민중들은 왜 나치를 선택했으며, 왜 독일의 자유주의자들과 좌파 노동운동은 결국
나치를 막지 못하고 거듭해서 실패했는지 살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