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2일 토요일

협동조합, 물류 혁신의 실마리



협동조합, 물류 혁신의 실마리 (7)
BY admin   |  201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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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주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99%의 경제
HERI의 시선

우리의 물류산업은 신규진입 증가, 영세사업자 양산, 다단계거래 만연 등으로 업체 간 양극화와 시장의 불안정성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 화물차주의 집단운송 거부로 야기된 2003년의 첫 물류대란 이후 정책당국은 다양한 시장개선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 하지만 정책효과는 기대에 미치고 못하고 있다. 시장 내부의 자발성보다는 정책당국의 의지에 지나치게 의존한 탓이 크다.

이런 때에 다음달 1일부터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된다. 5인 이상의 조합원만 확보되면 자유롭게 협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기본법 시행은 물류시장에 자발적 혁신의 단초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근거를 보자.

첫째, 협동조합이 물류시장에 성공적으로 도입되면 ‘영세사업자 중심의 개별경영’에서 ‘조합 중심의 협동경영’으로 시장기조가 바뀌게 된다. 협동경영은 시장 내 갈등을 완화시키고, 규모 및 범위의 경영이 발휘되도록 작용할 것이다. 둘째, 생협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협동조합은 생산자와 소비자 간 직거래로 중간거래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경영구조를 보유하고 있다. 협동조합이 활성화하면 고질적인 다단계거래와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가 완화되어 거래의 신뢰성이 크게 제고될 수 있다. 셋째, 영세 물류사업자가 협동조합에 편입되면 고용과 경영안정의 도모가 가능해져, 결과적으로 물류시장의 양극화 완화로 이어진다.

다만, 물류시장에서 협동조합이 안착하기까지 넘어야 할 과제도 많다. 먼저 시장주체들의 협동조합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떨어진다. 제조업과 달리 물류산업이 동적 서비스산업이라는 점도 걸림돌이다. 매일 전국을 돌아다니는 화물차주가 경영에 참여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생계형 자영업자나 특수고용직 종사자가 많아 협동조합의 설립 자금 확보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 도입 초기에는 원청업체나 거래업체의 비협조 문제도 만만치 않다.

결국 물류시장에서의 협동조합 안착 여부는 시장의 속성과 산업 현실에 맞는 체계적인 지원책 마련에 달려 있다. 우선 협동조합에 대한 교육과 홍보체계 구축이 중요하다. 교육과 홍보는 협동조합의 활성화 못지않게 설립에 따른 시장에서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섬세하고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의 뒷받침도 요구된다. 다만 농협 등 기존 협동조합의 육성과정에서 야기된 문제점을 고려해볼 때 보조금 등 직접지원방식은 지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지막으로 협동조합 설립을 막는 제도적 장벽은 없는지, 개별법 및 제도에 대한 체계적 검토와 개선 조처도 필요할 것이다.

물류시장에서의 협동조합 안착은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경제민주화의 실천 내지 지속가능발전과도 연계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정책당국과 이해관계자 모두 중지와 지혜를 모아야 하는 이유이다.

정승주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12년 12월 18일 화요일

[김갑수 소설가님 글]박정희에게 쿠데타 혼(魂)을 심어준 ‘소화정변’의 군인들

박정희에게 쿠데타 혼(魂)을 심어준 ‘소화정변’의 군인들
극우 아베의 재집권과 일본의 ‘수구꼴통’들 - ①

지난 16일 실시된 일본 총선에서 자민당이 압승함으로써 극우주의자 아베가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아베는 태평양전쟁 전범 기니의 손자이기도 하다. 그는 역사왜곡을 주도하는 단체의 든든한 후원자이고 종군위안부를 "꾸며낸 얘기"라고 공언하는 일본 정치인이다. 일본에서 극우파가 다시 집권한다는 것은 한국에 대단히 심장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에서 극우가 권력을 쥐었던 시간에는 어김없이 한국인의 긴장과 불행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는 미국과 중국과 일본 세 나라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특히 일본은 한국을 무력 지배한 나라이며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에 개입했고 오늘날 한미동맹의 가장 큰 변수이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 극우파 아베가 압도적인 표차로 재집권하게 된 것은 일본에 ‘극우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언론과 국민 다수는 눈앞의 대선 때문인지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사실 대선이 아니라고 해도 한국의 언론과 국민은 국제정세에 대한 관심이 매우 낮은 편이다. 나는 일본의 극우를 마음 편하게 ‘수구꼴통’으로 호칭하고, 몇 차례 글을 통해 그들의 본질을 공개함으로써 우리의 타산지석으로 삼고자 한다.

일본 수구꼴통들의 발호는 한국 수구꼴통들의 동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분명히 한국의 수구골통들에게는 일본의 수구꼴통들을 흠모, 효칙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쿠데타의 원조 박정희의 후예가 집권할 것인지가 판가름 나는 기로에 서 있다. 무서운 위기의 시간이다. 박정희의 쿠데타는 일본 수구꼴통의 쿠데타 혼(魂)을 이식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1937년 일본 관동군 육군 수뇌부는 자작극으로 만주 철도를 폭파하고, 그것을 중국 측 소행이라고 뒤집어씌우며 전장을 확대한다. 관동군은 만주와 외몽고 그리고 화북까지 전선을 넓혀간다. 당연히 호전적인 관동군 병력이 소련 군사 주둔지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소련과의 충돌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화북에서 관동군을 철수시키는 대신 만주 지배권을 확실히 못 박는 선에서, 중국과 휴전하려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런데 일본 육군본부는 이에 반대했다. 피 흘리며 화북까지 쳐 올라간 제국군대의 ‘대화혼(大和魂)’에 흠집을 낼 수 없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쿄 시내에 폭설이 내렸다. 시내 전부가 하얀 눈으로 덮여가고 있었다. 미명이 걷혀가는 새벽이었다. 때 아니게 요란한 총성이 겨울의 냉기를 찢었다. 시민들은 시내 다른 지역에 사는 친척이나 친구에게 전화로 이 소식을 알렸다. 그런데 친척이나 친구가 사는 지역에서도 총소리가 울렸다고 했다. 그 날 아침 도쿄 시내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린 지역은 줄잡아 10곳 이상이었다. 시민들은 총성이 울린 곳이 하나같이 정부요인이 사는 동네란 것을 알아차렸다.

첫 총성이 울리고 불과 24 시간 동안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수상은 굴뚝 속으로 몸을 숨겨 목숨을 겨우 건졌지만, 일본제국의 내무대신, 재무대신, 교육총감 등이 살해되었다. 뿐만 아니라 천황의 측근들마저 추가로 살해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천황의 궁정대신까지 죽인 것은 실수였다. 아무튼 경시청과 육군성과 참모본부 등이 1,500명의 육군 병사들에게 장악되었다. 이 쿠데타를 주도한 것은 겁 없는 청년 장교들이었는데. 그들은 호전적인 관동군 수뇌부와 교감하던 (마치 박정희와, 전두환의 하나회처럼)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거사를 '명치유신'에 버금가게끔 '소화유신'이라고 명명했다. 난동 청년 장교들의 서슬에 공포를 느낀 정부와 군 수뇌부는, 그들을 사태 수습의 계엄군에 편성시켜 권력을 쥐게 함으로써 그들의 유혈거사는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반대한 것은 그들이 숭배해마지 않는다는 천황(실감을 위해 일본식으로 호칭함)이었다. 천황은 나름대로 그들의 약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천황은 지체 없이 쿠데타군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철없고 흉악한 것들이 내 오른팔 같은 궁정대신을 죽이더니, 이제는 내 목까지 조이려 드는구나."

천황은 쿠데타군을 즉각 제압하라고 명령 내렸다. 천황의 일갈로 사태는 일순 역전되고 말았다. (아마 일본인들만큼 종교적인 민족도 없을 터이다. 이는 태풍이나 지진, 화산 폭발 같은 자연 조건 때문이라고 보는 학자가 많다.) 당시 천황은 일본 종교의 살아 있는 교주였다.

일이 그르친 것을 깨달은 주동 장교들은, 영예로운 죽음을 택하겠다고 하면서, 천황에게 자결 명령을 내리는 칙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구했다.
천황은 즉각 응답했다.

"죽든지 말든지 너희들 맘대로 해라."

천황은 칙사 파견을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주모자 17명을 체포해 사형에 처해 버렸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그들은 죽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국민들의 성향에는 전에 없던 변화가 나타난다. 기존의 종교기질보다 파시즘이 더 우세하게 된 것이었다. 수많은 수구꼴통들이 생겨나면서 청년 군인들이 외쳤던 이른바 '대화혼'에 공감을 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불과 1년 후 파시즘의 광기가 일본 열도를 휩싸게 된다. 결과로 일본은 350만의 병력 중 200만이 넘는 병력을 대중국 전에 투입해야 했고, 이는 태평양전쟁의 도발과 패망 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한일 역사가들은 2,27 쿠데타의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한다. 쿠데타란 국가에 대한 강간과 같은 것이어서 국민의 심리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다. 소화정변이 그렇다. 오늘날 고이즈미나 아베 등의 일본 현대 수구파들은 이 쿠데타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정말 의미심장한 것은 2·27 코데타의 잔여자들이 모두 박정희의 선임자들이라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박정희는 일본 소화정변 주모자들을 흠모하는 군인이었다. 친일과 독재는 뿌리를 공유한다. 요컨대 일본군 소화정변의 ‘대화혼’이 이식되어 5·16 쿠데타가 되었다는 것이다.

2012년 12월 8일 토요일

[김갑수소설가] 왜 이정희는 죽이고 박정희는 살리려 하는 거니?

왜 이정희는 죽이고 박정희는 살리려 하는 거니?
<한겨레신문>과 <오마이뉴스>의 기회주의적인 이중잣대              - 김갑수 소설가 페이스북 퍼옴 -

“충성 혈서를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 누군지 아실 거다. 한국이름 박정희.” 
- 이정희 후보

이정희의 대선후보 토론회 발언이 엄청난 파급력을 보이자 <한겨레>와 <오마이>에 약간 수상쩍은 기사가 동시에 실렸다. 두 기사는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약화, 희석시킴으로써 이정희 발언을 견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먼저 <한겨레>는 현직 기자들이 공동집필한 ‘박정희, 일왕에 혈서쓰고 일본군 장교됐나?’ 제하의 기사를 통해 <만주신문>에 근거한 민족문화연구소의 ‘혈서론’을 전한 후 이에 반대하는 우익단체의 주장을 대등하게 소개했다. 

- 이 후보 주장처럼 일왕에게 혈서로 충성을 맹세했다는 부분은 우익단체를 중심으로 조작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런데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일본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혈서를 보낸 사실이 1939년 3월 <만주신문>에 실린 사실과 신문 원본을 찾아내 이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면서 국내에 알려졌다. 일본 국회도서관에도 보관돼 있는 <만주신문> 1939년 3월31일치에는 “경상북도 문경 공립소학교 훈도(교사) 박정희(23)군의 피로 쓴 편지가 송부돼 관계자를 감격시켰다”는 기사가 당시 박 전 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박 전 대통령이 당시 연령 초과로 군관학교 시험에 탈락하자, ‘혈서’와 함께 입학허가를 호소하는 편지를 지원서류에 동봉해 제출했다는 소문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우익단체에서도 <만주신문>의 보도 사실 자체는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만주신문>이 보도한 편지 내용에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박 전 대통령이 편지를 보낸 1939년에는 만주계만 모집(1940년부터 일본계로 확대)했기 때문에 해당 기사의 신뢰가 떨어진다는 반론도 있다.
- <한겨레> 기사 중에서

<한겨레>가 언제부터 이토록 극우단체의 날주장을 존중해주었는지 모를 일이다. 박정희의 ‘진충보국멸사봉공(盡忠報國滅私奉公)’ 충성혈서는 사료적 문헌과 증언이 멀쩡히 존재한다. 이런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다루면서 양측 주장을 기계적으로 형평화하는 기사 생산법은 조중동이 익히 써오던 수법 아닌가? 게다가 이 기사가 말하는 ‘우익단체’는 대관절 뭐 하는 단체인지 고유명사로 된 이름조차 명기하지 못했다.

다음으로 <오마이뉴스>는 ‘오카모토 미노루', 박정희 창씨명 아니다’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를 쓴 정운현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은 친일문제의 전문가이자 <실록, 군인박정희>의 저자이기도 하다.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에 비하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 實)'는 훨씬 더 친일성향이 노골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가 군관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혈서'를 써서 보낸 바 있는데 이는 당시 그의 나이가 많아 입교가 어렵게 되자 입교를 목적으로 일종의 '충성맹세'를 보여준 것이다....그러나 군관학교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해 일본 육사 유학 특전까지 얻은 그가 일본 냄새가 짙은 이름으로 다시 창씨개명을 해야 할 필요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오카모토 미노루'가 박정희의 두 번째 창씨개명이라는 주장은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본다.
- <오마이뉴스> 기사 중에서

이 기사가 지적하고 있듯이 ‘오카모토 미노루’는 ‘다카키 마사오’보다 한 층 친일적인 이름이다. 다카키 마사오에는 ‘고령박씨, 정희’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오카모토 미노루’는 완벽한 일본인 이름이다.

(* 이 기회에 나는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에 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보아 좀 길더라도 자세한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자 하니 읽어주셨으면 한다.

창씨(創氏)란, 씨를 바꾸는 게 아니고, 말 그대로 ‘씨를 새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개명(改名)이란 당연히 이름을 고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일제는 조선인에게 창씨만 강요했을 뿐 개명까지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다카키 마사오처럼 창씨와 개명을 둘 다 한 사람은 일단 친일파일 가능성이 있다.

일제는 성을 목숨처럼 여겼던 조선인에게 창씨개명이 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을 바꾸지 말고 하나 더 만들라고 했던 것이다. 일제는 조선인이 창씨를 안 할 경우, 각종 인·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여행을 불허했다. 무엇보다도 교육열이 높은 조선인에게 자녀의 학교 재학을 불가능하게 만든 점이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일제는 창씨가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누가 보아도 창씨를 할 만한 사람 중에 일부를 골라 창씨를 하지 않도록 관리하거나 방임했다. 예컨대 비행기를 헌납한 박흥식, 중추원 고문 한상룡, 일본 대의사를 지낸 박춘금 같은 이도 창씨를 하지 않은 골수적인 친일파였다. 그러므로 창씨 여부를 가지고 친일의 잣대를 삼을 수는 없다.

물론 창씨개명에 날카롭게 저항한 조선인도 있었다. 전남 곡성의 58세 유건영은 창씨제에 대해 엄중한 항의서를 미나미 총독에게 보낸 후 자살했다. 전북 고창의 의병 출신 설진영은 창씨 통보를 받자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창씨를 시킨 후, 자신은 조상 볼 낯이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돌을 가슴에 안고 우물로 뛰어들었다.

한편 조선인들이 혈통의 족보를 지키려한 노력은 눈물겨웠다. 김씨의 경우 ‘원래 김씨’였다는 의미로 김원(金原) 또는 김본(金本)으로, 안동 권씨는 안권(安權)으로, 하동 정씨는 하동(河東)으로, 전주 이씨는 조선의 본가라고 하여 조본(朝本), 노(盧)씨는 시조가 용강 쌍제촌에서 우거했다고 하여 강촌(岡村) 그리고 박정희의 본관 고령박씨는 고목(高木)으로 표기했다.

물론 개중에는 친일의지와 출세욕 때문에 적극적으로 창씨개명을 한 이도 있었다. 친일 승려이자 조계종의 실권자 이종욱은 일본 외무대신 히로다의 성을 본떠 히로다 쇼이쿠로 창씨했고, 중추원 참의 최지환은 일본의 후지산과 정한론자인 다카모리의 이름을 따서 후지야마 다카모리로 창씨에 개명까지, 주요한도 일제의 황도 정신인‘팔굉일우’를 따서‘마쓰무라 고이치’라고 창씨에 개명까지, 이광수도 일본의 시조 천황 진무가 즉위한 산의 이름 향구산에서 ‘향산’을 따고 일본의 남자 이름에서 많이 사용하는 ‘랑’ 자를 써서 향산광랑(香山光朗)이라고 씨와 이름을 모두 완전 왜색으로 만들었다.)

이와 같은 이치로 오카모토 미노루는 완전 일본식 성명으로서 박정희가 적극적인 친일파라는 방증이 된다. 그런데 <오마이뉴스>는 ‘오카모토 미노루', 박정희 창씨명 아니다’라고 단정하는 제하의 기사를 내보낸 것이다. 박정희의 2차 일본명 오카모토 미노루는 일본 『육해군총합사전』에 등재되어 있으며 박정희 시절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회고록 『혁명과 우상』, 재미 기자 문명자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역사학자 최상천의 『알몸 박정희』등에 기록되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일본 『육해군총합사전』이 일본 정부의 공식기록이 아니라 도쿄대학 출판물인 데다 개인 저작이라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식민지시대의 기록을 가해국인 일본의 공식기록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또한 도쿄대학 출판부에서 발간한 이 사전이 개인물판물이어서 안 된다는 주장도 가당치 않다. 이 세상 저작물의 99% 이상은 개인 출판물 아닌가?

또한 오카모토 미노루는 북한 <노동신문>에도 보도된 바 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북한의 주장이기 때문에 날조된 것이라고 한다면 발생학적 오류가 된다. 빗대어 말하자면 ‘분석철학은 제국주의국가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철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식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오마이뉴스>의 주장은 식민사관을 만든 친일사학자 이병도 류의 기만적 실중주의 또는 과도한 문헌주의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정희의 발언이 큰 파급력을 행사하자마자 나왔다는 점에서 그 의도가 더욱 석연치 않다.

무엇보다도 <한겨레>와 <오마이>는 지난 5월 이래 생판 날조된 진상보고서 하나를 근거로 이정희와 통합진보당을 죽이는 데 앞장섰다. 당시 그들은 일말의 사실보도는커녕 이정희의 주장을 외면하면서 유심노조 등 협잡 정치인들 편만 일방적으로 들지 않았던가? 그랬던 그들이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또 이정희 파급력을 잠재우기 위한 기사를 남발하고 있으니 그들이야말로 ‘친노어용언론’이라는 말을 백 번 들어도 싸다 할 수밖에 없다.

[김갑수 선생님 글] 세상에 이런 역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인가?

“세상에 이런 역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인가?”
-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들... 당선되더라도 박근혜를 인정하지 않으련다 -               김갑수 소설가 페이스북퍼옴

세상에 이런 역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점령국의 군인이 피점령국의 대통령이 되어 18년, 그의 양자 전두환이 7년, 전두환의 동생 노태우가 또 5년, 그리고 한 세대가 엄연히 흘렀음에도 또 다시 그 점령국 군인의 따님이 민선 대통령에 오를 수가 있다는 것인가? 게다가 그들은 하나 같이 같은 지역의 수구 패거리들... 나는 설사 박근혜가 당선된다 해도, 아니 압승을 거둔다고 해도, 그를 결코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인가? 이름 없이 죽어간 무장항쟁 독립군들은 도대체 누구였던가? 상해에, 노령에, 북간도 서간도에 누워 있는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들..
.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 따님을 인정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추위에 떨고 배고픔에 주렸던 그들, 의복 하나 제대로 걸치지 못했던 그들, 모래알 같은 조밥에 날된장 저린무를 먹고 살았던 그들, 그마저 떨어지면 좁쌀가루에 소금을 섞어서 먹으며 견뎠다는 그들,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들...

백 근이 넘는 무장을 하고 하루에 백오십리 길을 행군하기도 했다는 그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는 보통이라고 말했던 그들, 솜 군복이 지급되면 환호작약했던 그들, 소독약이 없어서 상처 구멍을 째서 숯가루를 우겨 넣어 화농을 막았던 그들, 큰 부상을 입으면 동지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자살로 해결하기도 했던 그들,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들...

어떤 때는 조국을 증오하기도 했다는 그들, 바이칼의 빙설을 물들이며 수백 개 꽃잎 모양으로 도살된 그들, 계곡의 하얀 빙설에 동지들의 피가 얼룩지고, 그 피 향기를 시베리아의 바람이 휩쓸어 갈 때 조국을 증오해 보았다는 그들,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들...

이 모든 것들을 떠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가장 큰 형벌이었다는 그들, 행군 중에 조국의 풀포기와 닮은 것을 보게 되면 포개서 호주머니에 넣었고, 조국의 산천을 닮은 산자락이 나타나면 울컥 눈자위가 벌개졌다는 그들. 그리하여 조국을 그리는 향수가 금수와 다를 바 없는 본능이 되어 달밤에 개 짓는 소리 하나에도 흥분했던 그들,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들...

그들의 유골이 아직 눈을 감지도 못한 채 해골을 조국 쪽으로 향해 굴리고 있을 터, 세상에 이런 역사가 또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아버지 할아버지들을 두고서 일본군인의 딸을 또 다시 대통령으로 만드는 나라가 정상일까? 그 나라의 백성들이 제 정신일까? 그 손가락들이 사람의 것일까? 아버지 할아버지를 부정하면서 살아간들 또 뭐 한단 말인가? 다시 천명하노니 나는 죽어도 그 따님을 인정할 수가 없다.

2012년 12월 2일 일요일

우리는 지난여름 너희들이 한 짓을 알고 있다 -김갑수선생님

선거운동의 핵심은 <진보의 진실>을 알리는 것이다
- 우리는 지난여름 너희들이 한 짓을 알고 있다 -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를 비롯한 선대위·당원 분들의 분투는 감동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늘 아침 페북에서 성남 ‘언니당원’들의 율동을 담은 동영상을 보았다. 노래와 율동은 흥겨운 것이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울컥 뜨겁게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저들의 순수한 몸놀림, 온갖 정한이 배인 얼굴얼굴들...그러나 차가운 대기는 응답 대신 그들의 하얀 입김들만 속속 잠적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해야겠다. 한국의 유권자는 총선에서 8~10%, 대선에서 3~5% 정도 진보당에 표를 주어왔다. 아직 여론상 수치가 표면화되지 않는 이유는 여론조사 때 진보당을 지지한다는 점을 노출하지 않는 유권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감안하더라도 노력에 비하여 현실적인 성과가 미약한 것이 사실이다.

왜 그런 것일까? 통합진보당의 정책과 후보가 훌륭하다는 것을 아는 유권자는 많다. 정권교체도 중요하지만 미래에 착목하여 진보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머뭇거리고 있다. 아직도 부정선거 집단이라는 의구심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은 나름대로 알렸고,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여전히 진보문화권력이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현실에서, 정치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는 시민들이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선 전략상 정책 홍보도 중요하지만 지난여름 있었던 ‘진보의 진실’을 더 알리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한다. 복잡한 진실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려면 ‘상세(祥)하면서도 요약(節)’된 정보라야 한다. 아래는 거칠게 만들어 본 ‘진보의 진실’ 이른바 ‘진보상절’이라고나 할 수 있으려나.

1.유시민·심상정·노회찬은 차기 대선에서 민주당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지자 야권연대의 주체가 되려는 욕망을 공유했다. 이미 사태의 수괴 유시민과 심상정은 경기도지사 선거 이래로 밀월관계를 유지해왔다.

2.그래서 그들은 통합진보당과 위장합당한 것이다. 심상정은 일단 진보세력의 대선후보가 된 후 궁극적으로는 차기 정부의 총리직을 목표로 했다고 하는데. 민주당 측에서는 노동장관 직을 제의했다고 한다.

3.그들은 야권연대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통합진보당의 당권과 대선후보직을 거머쥐어야 했다.

4.일단 그들은 자파 국회의원을 최대한 당선시키기 위해 당내 비례대표 선거부정을 감행했다.

5.그러나 총선 결과 의석수를 통해 당권을 장악하려는 1차 목표가 실패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기들의 부정행위가 드러날 위기에 봉착했다.

6.그들은 자기들의 부정행위도 호도하면서 자파의 의석수도 늘리고 나아가 이정희의 대선 출마까지 봉쇄하려는 삼중 노림수를 모색했다.

7.이것이 지난 5월 초 유시민 사주를 받은 조준호의 통합진보당 선거 총체적 부정·부실 자해 폭로로 현실화된 것이다.

8.그들은 당원 투표로 뽑은 비례의원을 당직자 표결로 사퇴시키려는 비민주적인 폭거를 획책했다. 그리고 여기에 교묘하게도 이정희의 백의종군까지 은밀히 덧붙여 놓았다. 이에 당원들, 특히 이정희 지지자들이 반발한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이른바 5·12 ‘폭력사태’인데, 날치기나 불법적인 의사 진행을 실력으로 저지하는 것은 미관상 좋지는 앉지만 불가피한 일이다. 노무현 탄핵 국회나 미디어법 날치기 국회 등을 생각해 보면 된다.

9.‘폭력사태’ 이후 조중동 및 친노언론의 융단폭격과 마녀사냥으로 이정희 세력이 다 죽었다고 지레 판단한 심상정은 머리염색에 얼굴미용을 하고 TV 백지연 프로그램에 나가 ‘당원과 국민이 원한다면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말한다.

10.그러나 이정희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들은 작전을 바꾸어 이석기와 김재연의 사퇴로 압축한다. 이때에도 구당권파의 백의종군을 덧붙였는데 사실은 이것이 진짜 목표였다.

11.이런 일련의 작태는 천인공노할 수준의 정치적 만행이자 교묘, 대담, 무모한 범죄적 기획인데 이는 유시민의 머리가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고 본다. 그들은 차기정권의 실세가 되면 이런 범죄행위들을 너끈히 감출 수가 있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12.하지만 이정희와 당원들의 순수, 완고한 태도는 그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당권 장악에 실패한 데다 차츰 자기들의 부정행위까지 드러날 위기가 가시화되자 그들은 서둘러 진보정의당을 만들어 셀프제명까지 감행하며 뺑소니쳤다.(이 과정에서 유시민은 안고 들어온 국참당 부채 8억을 통합진보당에 떠넘김으로써 ‘돈떼보이’라는 희귀한 별명을 얻게 된다.) 아무튼 이렇게 됨으로써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뺑소니사고’라는 김인성보고서의 분석이 100% 적확했음이 입증되었다.

13.심상정은 기형정당인 진보정의당의 대선후보직을 마치 배우처럼 연기하다가 문재인 품으로 들어갔고 사전 약속이라도 되는 양 문재인은 그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상 내 나름대로 지난여름의 일을 거칠게 요약해 본 것이다. 하지만 내 글보다 40분짜리 동영상 <진보의 진실>을 널리 퍼트릴 수 있다면 그것이 더 효과적이다. 이런 작업은 투표일까지 부단히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가 알았다고 해서 멈춰서는 안 된다. 앞서 말한 대로 <진보의 진실>을 알리는 작업이야말로 가장 능률적인 선거운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12년 12월 1일 토요일

이승만과 다른 대통령에게서 배워야 할 것들- 60년 사기극의 역사, 속는 자에게도 책임은 있다 -

이승만과 다른 대통령에게서 배워야 할 것들
- 60년 사기극의 역사, 속는 자에게도 책임은 있다 -                       김갑수 선생님 (소설가) 의 페이스북 글을 퍼옴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음향과 분노』는 ‘한 번 갈보면 영원히 갈보’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것을 가장 희극적으로 유비, 모방한 집단이 미국과 한국의 해병대가 아닐까 한다. 정말 ‘한 번 해병이면 영원히 해병’일까? 해병 출신이 아니라면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한 번 배신하면 영원히 배신한다’는 말에는 경험칙적인 개연성이 있다. 그렇다면 ‘한 번 속으면 영원히 속는다’는 말은 어떠한가? 최소한 한국 대통령 선거의 역사에는 이 명제가 적용되어 온 것
 같다.

이승만은 학력이 출중했고 이것을 유효 적절히 이용하여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된 인물이다. 그는 조지워싱턴대학 학사와 하버드 석사 그리고 프린스턴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물론 여기에는 100년 전이라는 시점, 식민지 선교 전략과 맞물린 당대 미국 권력 목사들의 편법적 지원을 감안해야 하지만 아무튼 그의 학력이 세속적 관점에서 세계적 수준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학력자 중에 의외로 저지능이거나 경박한 사람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일례로 정운찬 역시 프린스턴 박사학위를 소지자지만 나에게 비치는 그의 언동은 대부분 유치하거나 위선적인 것들 일색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에 가기 전 한국의 과거에 다섯 번 응시하여 다섯 번 낙방했다. 그는 이것을 당시 과거제도의 부정 때문이었다고 변명하지만 비슷한 시기 아무런 재력이나 배경도 없던 매천 황현 같은 이는 과거에 두 번 응시하여 두 번 다 우수하게 합격한 바 있다.

정작 큰 문제는 이승만이 프린스턴대학 박사 학력을 악용하여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과 대단한 친분이나 있는 것처럼 호가호위함으로써 뜻을 이루었다는 점에 있다. 윌슨은 프린스턴대학 총장 출신의 대통령이었다. 이승만은 파리회의 한국 대표를 자임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는 파리 행 비자조차도 얻지 못함으로써 안창호의 불신을 샀다.

다음으로 박정희는 일본 관동군과 대한민국 군사반란군 출신의 대통령이다. 그의 집권 양상이 어떠했는지는 박근혜 빼고는 다 알 터이기에 부연하지는 않겠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한국인의 국민소득은 1.600불 정도였다. 18년 장기독재, 한국인의 우수성, 특히 한국 노동자들의 근면성에 비하면 턱없이 볼품없는 경제성장이었다. 박정희의 특기는 ‘반공과 국가주의’였다.

민선 대통령은 아니지만 전두환은 ‘정의사회구현’을 표방했다. 그는 국풍 행사 등을 기획하는 등 끊임없이 ‘국민대통합’을 제창했다. 하지만 그의 임기 동안 김근태 고문사건, 부천서 성고문사건, 건국대 학생항쟁,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등이 발발하여 사회가 극도로 위태로웠다.

김영삼은 자타가 인정하듯이 지적 능력이 열등한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고 했는데 이 말을 했다는 것부터 그의 머리가 좋지 않다는 점의 방증이 된다. 왜냐하면 이 말속에 이미 자기 머리 나쁜 것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기색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가 별건 아니지만 그가 서울대 출신이라고 하는 점 또한 미스터리에 속한다. 나는 김영삼과 동창 또는 동문이라는 사람을 단 하나도 본 적이 없다. 우리가 알듯이 그는 IMF 환란으로 한국경제를 거덜내버렸다.

이명박은 747로 국민을 부자 만들겠다고 하며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다. 정확히 말해 유권자들이 자진해서 그에게 속은 측면이 크다. 당시 많은 유권자들이 소득과 아파트에 현혹된 것이 사실이다. 나는 한국인을 좋아하지만 최근 들어 한국인이 스포츠와 연예에 열광하고 물질적 풍요에 지나친 환상을 갖는 점을 못내 유감스럽게 본다. 이명박 집권 5년 동안 한국은 정치, 경제, 남북관계, 환경 등 거의 모든 방면에서 퇴행해 버렸다.

박근혜는 신이 내린 대통령 후보이다. 그는 이승만의 ‘학벌 중시’, 박정희의 ‘반공과 국가주의’, 전두환의 ‘국민대통합’, 김영삼의 ‘저지능’, 이명박의 ‘부자 만들기’ 등을 한 몸에 육화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단지 위에 열거된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실패한 인물들이라는 점에 문제가 있어 우려되는 바가 없지는 않다.

나는 현 시점에서 진정한 대통령 후보라면 다음 세 가지 것만 표방하면 된다고 본다. 그것은 ‘인권’과 ‘서민’과 ‘통일’이다. FTA 페기로 서민을 보호하고 국가보안법 폐지로 인권을 신장하며 코리아연방제로 통일을 지향하는 대통령 후보가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행운이 아닐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