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8일 화요일

[김갑수 소설가님 글]박정희에게 쿠데타 혼(魂)을 심어준 ‘소화정변’의 군인들

박정희에게 쿠데타 혼(魂)을 심어준 ‘소화정변’의 군인들
극우 아베의 재집권과 일본의 ‘수구꼴통’들 - ①

지난 16일 실시된 일본 총선에서 자민당이 압승함으로써 극우주의자 아베가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아베는 태평양전쟁 전범 기니의 손자이기도 하다. 그는 역사왜곡을 주도하는 단체의 든든한 후원자이고 종군위안부를 "꾸며낸 얘기"라고 공언하는 일본 정치인이다. 일본에서 극우파가 다시 집권한다는 것은 한국에 대단히 심장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에서 극우가 권력을 쥐었던 시간에는 어김없이 한국인의 긴장과 불행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는 미국과 중국과 일본 세 나라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특히 일본은 한국을 무력 지배한 나라이며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에 개입했고 오늘날 한미동맹의 가장 큰 변수이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 극우파 아베가 압도적인 표차로 재집권하게 된 것은 일본에 ‘극우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언론과 국민 다수는 눈앞의 대선 때문인지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사실 대선이 아니라고 해도 한국의 언론과 국민은 국제정세에 대한 관심이 매우 낮은 편이다. 나는 일본의 극우를 마음 편하게 ‘수구꼴통’으로 호칭하고, 몇 차례 글을 통해 그들의 본질을 공개함으로써 우리의 타산지석으로 삼고자 한다.

일본 수구꼴통들의 발호는 한국 수구꼴통들의 동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분명히 한국의 수구골통들에게는 일본의 수구꼴통들을 흠모, 효칙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쿠데타의 원조 박정희의 후예가 집권할 것인지가 판가름 나는 기로에 서 있다. 무서운 위기의 시간이다. 박정희의 쿠데타는 일본 수구꼴통의 쿠데타 혼(魂)을 이식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1937년 일본 관동군 육군 수뇌부는 자작극으로 만주 철도를 폭파하고, 그것을 중국 측 소행이라고 뒤집어씌우며 전장을 확대한다. 관동군은 만주와 외몽고 그리고 화북까지 전선을 넓혀간다. 당연히 호전적인 관동군 병력이 소련 군사 주둔지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소련과의 충돌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화북에서 관동군을 철수시키는 대신 만주 지배권을 확실히 못 박는 선에서, 중국과 휴전하려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런데 일본 육군본부는 이에 반대했다. 피 흘리며 화북까지 쳐 올라간 제국군대의 ‘대화혼(大和魂)’에 흠집을 낼 수 없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쿄 시내에 폭설이 내렸다. 시내 전부가 하얀 눈으로 덮여가고 있었다. 미명이 걷혀가는 새벽이었다. 때 아니게 요란한 총성이 겨울의 냉기를 찢었다. 시민들은 시내 다른 지역에 사는 친척이나 친구에게 전화로 이 소식을 알렸다. 그런데 친척이나 친구가 사는 지역에서도 총소리가 울렸다고 했다. 그 날 아침 도쿄 시내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린 지역은 줄잡아 10곳 이상이었다. 시민들은 총성이 울린 곳이 하나같이 정부요인이 사는 동네란 것을 알아차렸다.

첫 총성이 울리고 불과 24 시간 동안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수상은 굴뚝 속으로 몸을 숨겨 목숨을 겨우 건졌지만, 일본제국의 내무대신, 재무대신, 교육총감 등이 살해되었다. 뿐만 아니라 천황의 측근들마저 추가로 살해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천황의 궁정대신까지 죽인 것은 실수였다. 아무튼 경시청과 육군성과 참모본부 등이 1,500명의 육군 병사들에게 장악되었다. 이 쿠데타를 주도한 것은 겁 없는 청년 장교들이었는데. 그들은 호전적인 관동군 수뇌부와 교감하던 (마치 박정희와, 전두환의 하나회처럼)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거사를 '명치유신'에 버금가게끔 '소화유신'이라고 명명했다. 난동 청년 장교들의 서슬에 공포를 느낀 정부와 군 수뇌부는, 그들을 사태 수습의 계엄군에 편성시켜 권력을 쥐게 함으로써 그들의 유혈거사는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반대한 것은 그들이 숭배해마지 않는다는 천황(실감을 위해 일본식으로 호칭함)이었다. 천황은 나름대로 그들의 약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천황은 지체 없이 쿠데타군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철없고 흉악한 것들이 내 오른팔 같은 궁정대신을 죽이더니, 이제는 내 목까지 조이려 드는구나."

천황은 쿠데타군을 즉각 제압하라고 명령 내렸다. 천황의 일갈로 사태는 일순 역전되고 말았다. (아마 일본인들만큼 종교적인 민족도 없을 터이다. 이는 태풍이나 지진, 화산 폭발 같은 자연 조건 때문이라고 보는 학자가 많다.) 당시 천황은 일본 종교의 살아 있는 교주였다.

일이 그르친 것을 깨달은 주동 장교들은, 영예로운 죽음을 택하겠다고 하면서, 천황에게 자결 명령을 내리는 칙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구했다.
천황은 즉각 응답했다.

"죽든지 말든지 너희들 맘대로 해라."

천황은 칙사 파견을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주모자 17명을 체포해 사형에 처해 버렸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그들은 죽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국민들의 성향에는 전에 없던 변화가 나타난다. 기존의 종교기질보다 파시즘이 더 우세하게 된 것이었다. 수많은 수구꼴통들이 생겨나면서 청년 군인들이 외쳤던 이른바 '대화혼'에 공감을 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불과 1년 후 파시즘의 광기가 일본 열도를 휩싸게 된다. 결과로 일본은 350만의 병력 중 200만이 넘는 병력을 대중국 전에 투입해야 했고, 이는 태평양전쟁의 도발과 패망 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한일 역사가들은 2,27 쿠데타의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한다. 쿠데타란 국가에 대한 강간과 같은 것이어서 국민의 심리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다. 소화정변이 그렇다. 오늘날 고이즈미나 아베 등의 일본 현대 수구파들은 이 쿠데타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정말 의미심장한 것은 2·27 코데타의 잔여자들이 모두 박정희의 선임자들이라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박정희는 일본 소화정변 주모자들을 흠모하는 군인이었다. 친일과 독재는 뿌리를 공유한다. 요컨대 일본군 소화정변의 ‘대화혼’이 이식되어 5·16 쿠데타가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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