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14일 일요일

속까지 붉은 토마토당, 네덜란드 총선 돌풍

장석준의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속까지 붉은 토마토당, 네덜란드 총선 돌풍

제927호
 
2012.09.06
등록 : 2012-09-06 20:13 수정 : 2012-09-07 11:35
유럽 재정위기로 국제회의가 열릴 때마다 항상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편드는 나라들이 있다. 오스트리아와 핀란드, 그리고 네덜란드다. 독일과 함께 이들 나라는 유럽의 대표적인 채권국이다. 독일을 중심으로 한 채권국 연합이 현재 유럽 금융 과두제의 정치적 대변자 노릇을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채권국 연합에서 독일 다음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나라가 네덜란드다. 이런 네덜란드에서 9월12일 총선이 실시된다.

전신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네덜란드 공산당’

조기 총선이다. 자유민주인민당(VVD)이 이끌던 우파 연정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으며 내각을 지지해온 극우파 자유당(PVV)이 지지 입장을 철회해 연정이 붕괴한 탓이다. 쟁점은 긴축정책이었다. 정부가 유럽 재정위기를 고려해 긴축재정을 추진한 게 화근이었다. 채권국인 네덜란드는 그리스나 스페인 같은 채무국과는 다른 상황에 있을 것 같지만 이 나라에도 역시 경제위기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2주 뒤로 다가온 이 나라 총선을 놓고 온 유럽이 다시 술렁이고 있다. 몇 달 전 그리스 총선 때처럼 금융 과두세력이 가슴을 졸이고 있다. 그리스의 급진좌파연합(SYRIZA)처럼 금융자본주의를 정면 공격하며 갑자기 지지세를 늘려가는 한 좌파 정당 때문이다. 토마토를 당의 로고로 사용해서 흔히 ‘토마토당’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사회(주의)당(SP)이 바로 그것이다. 

본래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두 정당은 자유민주인민당과 노동당(PvdA)이다. 전자는 총선 전까지 여당이던 보수 우파 정당이고, 후자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다. 이제까지 네덜란드 정치의 상식대로라면 우파 연정의 붕괴로 조기 총선이 열리는 만큼 노동당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지거나, 자유민주인민당과 노동당 두 당 사이에 각축이 벌어지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노동당이 아니라 사회당이 좌파 쪽의 최다 지지 정당으로 치고 올라오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제1당 자리를 놓고 자유민주인민당과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그럼 사회당은 도대체 어떤 정당인가? 이름만 들으면 그냥 또 다른 사회민주주의 정당 같다. 프랑스나 벨기에에서는 ‘사회(주의)당’이라는 이름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좌파의 제1당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당의 애초 창당 당시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듣고 나면 느낌이 달라질 것이다. 바로 ‘마르크스레닌주의 네덜란드 공산당’이었다. 

1971년 주로 68세대로 이뤄진 마오쩌둥주의 세력이 친소파 공산당과는 별개로 결성한 정당이 현재 사회당의 모태다. 뿌리만 놓고 보면 자본주의의 발상지인 네덜란드에 이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정치세력도 없는 듯하다. 게다가 바로 전 총선인 2010년 선거 결과를 놓고 봐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때 사회당은 불과 9.9%를 득표해 15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그런데 2년 만에 상황이 돌변해 여론조사에서 20% 안팎의 지지율을 보이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리스 총선 때 한 차례 혼비백산했던 유럽 정치 전문가들이 사회당에서 급진좌파연합의 환영을 보며 경기를 일으키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좌파 노동당, 극우파 자유당 동시 타격

사회당이 주류 여론을 당혹시킨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6년 총선에서도 사회당은 이전 선거에서 거둔 득표율(6.6%)의 거의 세 배에 달하는 16.6%의 지지를 얻어 주목받았다. 이때의 급성장은 1년 전 있은 유럽헌법안 국민투표의 여파 덕분이었다. 이는 근대 네덜란드 역사상 최초의 국민투표로, 프랑스에서 먼저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헌법안이 거부되고 사흘 뒤에 실시됐다. 결과는 프랑스와 마찬가지였다. 63%의 국민이 참여해 62%가 반대표를 던졌다. 두 나라의 국민투표 결과로 유럽헌법안은 휴지 조각이나 마찬가지가 되고 말았다. 

사회당은 이때 좌파 쪽의 유럽헌법안 반대운동 중심 세력이었다. 반면 좌파의 다른 두 대표 정당, 노동당과 녹색좌파(GL)는 찬성 입장이었다. 노동당은 다른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유럽연합-유로존이 등장하는 데 주축 역할을 해왔다. 1989년 친소파 공산당이 다른 소규모 좌파 정파들과 함께 ‘녹색정치’를 내걸며 창당한 녹색좌파 역시 유럽 통합 프로젝트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원내 좌파 세력 중에서 오직 사회당만이 분명한 반대 입장이었다. 이에 따라 사회당은 국민투표 뒤 실시된 총선에서 유럽 통합 비판 여론의 좌파 쪽 수혜자가 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비판도 많이 받았다. 극우 인종주의 입장에서 유럽 통합에 반대하는 헤이르트 빌더르스의 자유당과 다를 게 없는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것이었다. 노동당은 2006년 총선이 끝나자 이런 이유를 들며 좌파인 사회당이 아니라 우파 정당과 함께 연립정부를 구성하기도 했다. 토마토당은 그 괄목할 성공에도 주류 여론에서는 여전히 왕따 취급을 당했다.

그러나 경제위기와 함께 유럽 통합 프로젝트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폭로된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사회당의 고집스러운 유럽 통합 비판론은 이제 좌파 성향 유권자들의 지지가 이 당으로 쇄도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 반면 노동당의 지지율은 사회당에 추월당했고 녹색좌파의 지지율은 2.7%로까지 떨어졌다. 노동당이나 녹색좌파가 온갖 고상한 수사로 포장하던 유럽연합-유로존이 사실은 신자유주의 금융화 물결의 한 갈래에 불과했음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노동당과 녹색좌파만 사회당 돌풍의 타격을 받은 것은 아니다. 또 다른 피해자가 있다. 극우파 자유당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자유당은 2010년 총선에서 15.5%를 얻었다. 그런데 이번 총선을 앞두고는 여론조사에서 계속 10%대 초반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최대 5% 정도의 지지층을 잃은 것이다. 그간 극우 인종주의 정당을 지지하던 일부 하층 노동자 집단이 사회당 쪽으로 이동한 결과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사회당 바람이 극우파 바람을 제압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간 주류 좌파들이 극우파의 약진에 속수무책이었던 데 비하면 주목할 만한 양상이라 하겠다. 

다시 좌파의 근본을 생각케 하다

사회당이 이번 총선에서 내건 핵심 정책은 긴축정책 중단과 복지투자 확대다. 이들 역시 정부 재정의 일정한 삭감이 필요하다는 데는 동의한다. 그러나 이들이 보기에 가위질이 필요한 것은 복지 예산이 아니다. 비효율적인 관료 기구를 손보는 게 우선이다. 국방비도 줄여야 한다. 그리고 고소득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물려야 한다. 반면 위기를 극복하려면 공공투자를 늘려야 한다. 사회당은 그 대상으로 주거, 에너지 절약, 환경 개선, 공공 교통, 보건 그리고 교육을 제시한다. 사회당의 이런 공약이 지금 복지 축소에 반대하는 네덜란드 민심을 결집시키고 있다. 

하지만 사회당의 힘은 정책에만 있지는 않다.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다. 다름 아닌 이들의 정치활동 방식이다. 사실 68세대가 만든 정당치고 별로 성공한 사례가 없다. 좌파보다는 ‘녹색’을 강조한 독일 녹색당 정도가 거의 유일한 예외였다. 그런데 네덜란드 사회당은 좌파 정체성을 분명히 하며 성공한 또 다른 희귀한 사례다. 그럴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이들의 끈질긴 풀뿌리 정치활동이 있었다. 

아직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당’이던 시절부터 이들은 지역사회에 뿌리내리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들은 가톨릭 성향의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지역 차원의 정치 쟁점에 대해 지속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주류 거대 정당들이 중앙정부의 권력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상황에서 신생 사회당의 이런 활동 방식은 유권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덕분에 사회당은 차츰 지방의회 내에 진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노동운동에 대한 이들의 접근법도 철저한 풀뿌리 방식이었다. 노동당은 노총의 조직적 지지를 받았지만 사회당은 그렇지 못했다. 사회당은 이런 약점을 노동자 당원들의 활발한 실천을 통해 극복해나갔다. 

사회당의 독특한 성장사는 주요 지도자들의 이력에 뚜렷이 새겨 있다. 2008년까지 당 대표를 지내며 오랫동안 당의 얼굴 노릇을 해온 얀 마레이니선은 노동자 출신이다. 그의 정치 이력은 24살 때 지방의원에 당선된 것에서 시작됐다. 이후 그는 17년간이나 지방정치 무대에서 활동했고 이를 바탕으로 1994년 사회당 최초의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 현재 당 대표로서 선거운동을 이끌고 있는 에밀 루머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의 전직은 초등학교 교사다. 2002년까지도 학교 현장에 있었다. 그러면서 1994년부터 사회당 소속 지방의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런 그가 외치는 ‘교육투자 확대’ 공약은 결코 빈말로 들리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사회당의 이런 당문화에 이 당의 저력이 있다고 지적한다. 네덜란드의 인구 규모에서 이 당의 4만6천여 당원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더구나 사회당원들은 어느 정당의 당원들보다 일상활동에 적극적이다. 사회당 지역조직들이 이런 당원 활동의 구심 역할을 한다. 사회당 지역조직들은 당원들이 참여하는 지역 사회운동을 조직할 뿐만 아니라 한 세기 전 초기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역센터(‘민중의 집’)를 건설해 노동자들의 일상생활에 접근한다. 이 모든 게 실은 노동당 같은 오래된 정당들이 언제부턴가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좌파 정당의 본래 모습이다.

그러나 좌파 연정 쉽지 않아

현재 사회당은 차기 정부 구성권을 지니는 제1당 자리를 놓고 자유민주인민당과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다. 누구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접전이다. 여기에서 사회당이 승리하더라도 노동당·녹색좌파와 함께 좌파 연정을 구성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몇 달 전 그리스 총선이 그랬듯이 선거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네덜란드 정치권의 혁명은 진행 중이다. 토마토당의 돌풍은 한 세기 만에 좌파의 대표주자 자리가 교체되는 이변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좌파정치 문화가 그 근본으로 돌아가는 의미심장한 흐름의 출발이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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